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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한국 현대사 100년 100개의 기억(모지현 지음)

by 미건주 2020. 6. 19.

한국 현대사 100년 100개의 기억 모지현 지음 더좋은책 / 2019년 3월 / 472쪽 / 19,500원

저자 모지현

 

이화여대 사학과에 진학, 연세대학교 대학원 과정을 거치며 임용고시를 통과했다. 고등학교에서 십 년 넘게 한국사와 세계사 수업을 담당했다. 현재는 학교 밖 청소년과 부모, 교사를 대상으로 강의하면서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역사를 배워 지혜를 나눔으로써 건강하고 따뜻한 사람들의 세상이 되기를 꿈꾼다. 지은 책으로는 청년을 위한 세계사 강의 1, 2』 『하나님이 키우신다 GOD Schooling, 해설을 맡은 책으로 세계사톡 1: 고대 세계의 탄생』 『세계사톡 2: 중세의 빛과 그림자가 있다.

 

Short Summary

 

이제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 수립 100년입니다. 100년이나 되었는데 아직도 이 모양인가 할 수도 있습니다. 임정을 인정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문제로 학자들은 정치세력의 이해 관 계 속에 대립하고 있고, 그 문제로 다투는 학자들을 먹고살기 바쁜 와중에 무슨 소리냐며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국민들도 있죠. 그러나 영국, 프랑스, 미국, 중국 등이 자신들에게 걸맞은 정치체제를 만들어내기 위해 수백 년간의 혼란이 필요했던 세계사의 숨 가쁜 장면들과 비교하면 우리가 지금까지 쌓아온 시간들은 상당히 짧습니다. 지금은 누군가의 희생을 밟고 달려왔던 대한민국이 그 아팠던 자들의 눈물을 바라보고 닦아주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르는 시기를 지나는 중입니다. 그렇기에 그동안의 빛 같은 성장 뒤에 숨겨둔 어둠이 드러나 힘겹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한 사건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대립합니다.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집회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체가 발전의 증거입니다. 혼란의 긍정적인 면은 다양성입니다.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는 혼란스러운 분열기였지만 그 대립 속에서 그 어느 시기보다 경제 발전과 학문과 사상의 다양성이 나타났습니다. 다양성들을 하나로 모아내는 역량을 발전시키는 것이 앞으로 우리 한국의 미래를 담당할 젊은이들의 몫일 것입니다. 근현대사 속의 우리 스스로와 화해해 잘 기억하고 물려주어 우리 후손에게는 그 모든 것들이 발전된 조국이 있게 한, 고난의 시기이지만 그러기에 의미 있는 추억이 될 수 있게 해줄 수 있다면 그들의 조상으로서 우리는 성공한 것이 아닐까요.

학교 현장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가르치면서 학생들이 어려워했던 부분들, 그러면서 그 시대에 대해 말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 어르신들에게는 생활이었지만 우리들에게는 역사가 되어버린 부분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이 책에 담아내고 싶었습니다. 이를 위해 한국사에서의 결정적 계기를 기점으로 총 5개의 시간으로 나누어 기억을 꺼내보았습니다. 첫 출발은 100년 전에 벌어졌던 31운동의 배경에서부터입니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을 끝으로 1920년대까지 마무리한 뒤, 두 번째 장에서 브나로드 운동으로 시작된 1930년대 한국의 기억은 1945815광복으로 끝납니다. 세 번째 장은 신탁통치 파동으로부터 출발해 제1공화국과 제2공화국 시대의 기억을 지납니다. 516군사정변으로 출발한 1960년대부터 19876월 민주항쟁까지가 네 번째 기억 부분이며, 북방정책 이후 2018BTS 현상을 거쳐 남북정상회담까지의 우리들 기억을 마지막으로 정리했습니다.

추억이 되려면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억이 추억이 되는 데에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우리 한국인이 한국 현대사를 당한 자로서의 스스로와 화해하지 못하는 아픔의 역사로 바라보는 것이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과 같은 성장을 이루어낸 우리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이해의 역사로 바라보며 아픔을 극복할 수 있길 바랍니다. 더 나아가 지금 그런 아픔을 겪고 있는 나라의 사람들을 그리고 우리 안에서도 혹여 그런 아픔을 아직도 겪고 있는 자들을 보듬어낼 수 있는 성숙한 우리가 되는 밑거름으로서의 역사로 100년을 되돌아볼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차례

 

프롤로그

 

1장 희망으로 탄생한 대한민국 1919~1930

2장 밤을 뚫고 빛, 돌아오다 1931~1945

3장 세계가 그은 선 국경이 되어 1945~1961

4장 한국, 앞만 보고 전진 또 전진 1961~1987

5장 아픈 만큼 하나 되어, 세계로 미래로 1988~2019

 

에필로그

 

내용요약

 

1장 희망으로 탄생한 대한민국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19194) - 대한민국, 국체와 국호의 탄생

 

31운동은 민족독립운동의 전환점이 되었다. 31운동으로 민족의 독립 염원을 느낀 많은 애국지사들이 독립운동에 구심점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고 이에 임시정부 수립을 추진하면서 독립운동에 불을 지폈다. 최초의 정부 형태를 띤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와 국내의 한성정부,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가 다양한 움직임으로 수립된 7개 임시정부 중 대표 격이다. 프랑스 조계 상해 보창로에 임시 독립 사무소를 설치, 1919411일 임시 의정원으로 출발한 임정은 각 도 대의원 30명이 만든 헌법 격인 대한민국 임시 헌장을 통해 행정, 입법, 사법의 3권 분립 형태의 민주공화정부를 선포한다. 헌장(헌법)과 국호, 연호가 선포되면서 정식으로 임정이 수립된 후에 한성정부 수립 소식을 들은 지도자들은 세 임정들의 통합을 추진했다. 그 결과 근거지는 상해에 두고 임시 의정원과 대한국민의회를 합병한 의회를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9월 상해 대한민국 임정을 중심으로 대한국민의회와 한성정부가 통합되면서 한성정부의 이승만을 임시 대통령, 대한국민의회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하는 정부가 출범했다. 임정은 외교, 군사, 교육, 문화, 재정, 사법, 교통 등 10여 개 부분에 걸친 중앙부서를 조직하고 국내 각지를 연결하는 교통국과 비밀 연락망인 연동제를 시행했다. 국내와 해외에서 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모으고 독립공채를 판매하기도 했으며 운동가들 사이의 비밀 연락 업무와 소식 교환들을 수행하기도 했다. 역사편찬부를 설치하고 박은식의 독립운동지혈사를 간행해 일본 침략 사실을 기록, 세계인에게 알리고 독립의 당위성을 호소하거나, 독립신문과 잡지들을 발행해 독립운동의 전개 상황을 알리기도 했다.

그러나 다양한 세력으로 정부가 출범한 데서 예견되었던 대로 곧 내재되었던 갈등이 표출된다. 만주의 무장독립투쟁 세력이 이승만을 중심으로 추진된 외교독립노선과 독립청원운동에 반대하여 임정을 배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동휘를 중심으로 1920년을 독립전쟁 원년의 해로 선포하면서 실력 양성과 독립전쟁을 병행하는 노선을 채택하기도 했으나, 이승만의 위임통치 발언 등에 대한 파문은 컸다. 하와이에서 활동했던 이승만은 임정 수립 직후 상해로 왔지만 외교독립노선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자 미국으로 돌아간다. 이후에도 임정의 활동 방향과 구미위원부를 중심으로 모인 독립자금 운용에 대한 내부의 대립은 계속되었다. 결국 임정은 국민대표회의를 개최, 기존의 임정을 해체하고 새로운 임정을 수립하자는 창조파와 정부 자체는 두고 조직만 개조하자는 개조파로 분열되었고 이승만 대통령 탄핵안을 통과시켰다.

이후 십여 년간 대한민국 임정은 독립운동 세력 사이의 통일을 이뤄 내지 못하고 침체 상태에 놓이게 된다. 정부라 이름 붙이기에는 민족 운동 전체를 결집시킬 역량을 담보해 내지 못하면서 독립운동단체 중 하나로 전락했고, 무장독립투쟁과 외교독립운동은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815광복을 맞기까지 27년 동안 5차에 걸친 개헌을 비롯한 각 세력 간의 분열과 재정난, 8차례에 걸친 상해를 포함한 중국 각지 이동 등 극심한 부침을 겪으면서 말이다.

임정을 탄생시켰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떠난 뒤 약화된 임정의 자리를 지킨 것은 임시정부의 문지기를 자처했던 김구였다. 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변경하면서 임정의 명맥을 이어간 김구는 1930년대 중반 이후 변화되는 정세 속에서 임정의 위상이 변모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만주의 무장독립투쟁 세력이 만주사변 이후 활동 입지가 좁아짐에 따라 중국 관내로 이동한 뒤 임정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세력 간 통일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후 임정은 광복에 이르기까지 군사와 외교활동까지 담아내면서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서 정부 역할을 하게 된다.

 

봉오동전투ㆍ청산리대첩(19206월ㆍ192010) - 승전보를 알려라!

 

31운동을 겪으며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비폭력적ㆍ평화적 방법으로 독립을 달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중국 관내 독립운동 세력이 임정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동안 만주와 러시아 영내에서는 1919년 상반기에만 70여 개의 단체를 결성하고 군사력을 키울 만큼 무장독립투쟁 노선을 택한 독립운동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무장독립전쟁을 통한 조국 광복, 이것이 이들의 최종 목표가 되었고 국권 피탈을 전후해 형성된 이주민들의 망명촌이 이들의 근거지가 되었다. 특히 간도 지역이 키워낸 독립군은 1920년대를 전후해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국내 진공 작전을 전개해나간다. 관공서를 습격하며 일본 군대, 경찰과 전투를 벌였던 것이다. 이에 일제는 군대를 만주로 보내 독립군을 토벌하려고 했고, 그 중심에 독립군이 대승을 거둔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이 있다.

19206월 독립군 부대가 북간도에서 출발해 함북 강양동에 주둔하던 일본군 헌병 국경 초소를 습격해서 격파한다. 급보를 받은 일본군은 참패를 거듭하면서도 반격을 시도했고 독립군의 유도 작전에 말려 두만강에서 40리 거리에 위치한 봉오동으로 들어온다. 최진동을 사령관으로, 홍범도를 제1연대장으로 한 독립군 부대는 100여 호에 달하는 봉오동 주민을 미리 대피시키고, 일본군이 포위망에 들어오자 3면에서 공격한다. 잠복해 있던 700여 명의 독립군이 협공해 일본군 157명의 전사자와 200여 명의 부상자를 낸 데 비해 독립군은 장교 1, 병사 3명의 전사와 약간의 부상자를 내며 크게 승리한다. 이 전투가 바로 첫 정규전의 쾌거로서 독립군의 사기를 드높인 봉오동전투다.

그동안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의 승리로 승승장구하던 일제는 봉오동전투에서 정규군이 대패하면서 이에 대한 보복을 계획한다. 간도에 직접 토벌군을 침입시켜 항일단체와 독립군을 근본적으로 없애려 는 대규모 작전을 세운 것이다. 일제는 훈춘사건(일제가 중국 마적 두목을 매수해 훈춘 성과 일본 영사관을 공격, 약탈하게 하고 일본인, 중국인, 조선인 등을 살육하게 한 사건)을 출병의 빌미로, 독립군 토벌을 위한 간도 침범을 시작해 중국과의 교섭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조선 내 주둔 부대, 관동 및 연해주 주둔 부대들을 독립군 토벌대 병력으로 만주 지역에 투입시킨다. 이를 중국 측으로부터 통고받은 독립군 부대들은 청산리(중국 길림성 화룡현 이도구~삼도구) 방면으로 이동하게 된다.

그러자 북간도 독립군 부대인 북로군정서는 1010일경 삼도구에 도착, 20일 백운평 계곡에 매복해 있다 공격하여 200여 명의 일본군 전사자를 내는 등의 큰 전과를 거둔다. 일본군 수가 늘어나자 밤새 행군해 160여 킬로미터 떨어진 갑산촌으로 이동했는데, 그동안 홍범도 부대는 이도구에서 일본군 한 부대를 전멸시키고 있었다. 다음 날인 21일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연합부대는 함께 어랑촌에서 전투를 벌여 일본군을 격파했고, 이로부터 26일 새벽까지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 어랑촌, 천수평, 고동하 등 동서로 약 25킬로미터에 달하는 청산리 계곡에서 대소 10여 회 전투를 벌여 승리하고 많은 무기를 노획한다. 이것이 바로 청산리대첩이다.

이 전투에서 1,600여 명의 김좌진 부대와 홍범도 연합부대 1,400여 명의 독립군은 5천여 명의 일본군과 싸워서 전사자 60여 명, 부상자 90여 명, 일본군 전사자 1,200여 명, 부상자 2,100여 명을 내며 승리하였다. 이는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13년 만에 총을 든 우리 군대가 한 사람당 겨우 감자 3개와 한 줌의 쌀로 연명하면서 일제의 정규군을 물리친 독립군 사상 최대의 전과를 거둔 빛나는 승리였다.

 

2장 밤을 뚫고 빛, 돌아오다 1931~1945

 

민족말살통치(1937) - 일상 깊은 곳까지 스며든 정신적 말살의 시작

 

만주사변 이후 중일전쟁(1937)으로 전선이 확대되면서 필요한 노동자나 군인들의 수가 늘어나자 일제에게는 큰 고민이 생겼다. 일본인만으로는 이를 감당할 수 없어 조선인을 노동자로 징용하거나 군인으로 징병하는 정책을 추진해야 했는데, 무기를 쥔 조선인이 누구를 공격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적에게 총을 쥐어주는 상황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무기를 주었을 때 일본인을 공격하지 않고 아무 사심 없이 천황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조선인을 양산해내야 했다. 그를 위해서는 조선인의 조선인 됨을 가능하게 하면서 항일투쟁과 독립운동의 힘이 되는 민족정신을 없애야 했는데, 이것이 1937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민족말살통치 추진의 배경이다.

민족말살통치는 유대인에게 행해진 홀로코스트와 같은 물리적 말살이 아닌 정신적 말살이 목표였다. 그랬기 때문에 내지인(일본인)과 선인(조선인)은 한 몸이라는 내선일체와 한국과 일본의 조상이 같다는 일선동조론이 기본이론이 되었고,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려는 황국신민화정책이 그 내용이 되었다. 이 정책이 시행되면서 한국인은 충성스럽고 선량한 황민이 되기 위해 성인용과 아동용으로 만들어 배포한 황국신민서사를 일상생활 속에서 암송해야 했다. 심지어 결혼식에서도 신랑, 신부, 하객들이 모두 일어서서 이를 암송하는 풍경이 연출되기도 할 정도였다. 또한 마을마다 내선일체라고 쓴 포스터나 푯말이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하루에 한 번 정오에 일본에 있는 왕궁을 향해 절을 하는 궁성요배로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 표시를 하거나 경성의 남산을 비롯한 전국 중요 장소와 학교, 면마다 세워진 신사에서 참배도 해야 했다. 이를 거부하면 무자비한 탄압이 쏟아졌다.

게다가 1938년에는 조선교육령이 개정되면서, 보통학교에서 필수였던 조선어가 선택과목으로 바뀌게 된다. 조선어를 가르치면 탄압을 받는 상황에서 조선어를 선택하는 학교는 있을 리 없었으니, 실제로 조선어는 과목에서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초등국사교과서가 만들어져 황국사관에 입각한 역사교육이 행해진 것도 이 시기다.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도발한(1941) 뒤에는 학생들의 군사능력 배양 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일본어 교육과 군사교련이 강화되었고, 소학교의 명칭이 황국신민을 뜻하는 국민학교로 개칭되기도 했다.

1940, 일제는 조선인 징병제 결정과 함께 조선인에게 조선식 성을 대신해 일본식 씨를 새로 만들고’(창씨), ‘이름도 바꾸는’(개명) 정책을 실시한다. 대일본제국 병영 안에서 조선식 이름이 불리는 것은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중국식 이름은 사대사상에 따라 붙인 것이니 일본식 이름을 가져야 한다고 정당화하면서 각 호주가 6개월 이내(1940.2.11.~ 8.10)에 새로 정한 씨를 신고하라는 자발적 창씨개명 방식을 공포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애국반과 각급 학교를 통해 무자비하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추진한 강제적 자발이었다. 그로 인해 일제는 1941년 말 조선 인구의 81.5%가 창씨개명을 하는 결과를 얻어 낼 수 있었다.

동화 정책에 감춰진 민족 차별을 간파했거나 전통적인 성()에 대한 애착과 양반의식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적극적으로 반대하거나 자살을 택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총독부나 일본인과의 접촉 기회 가 많거나 대규모 사업주, 기술자와 감독 등의 지도층, 지식 계급 등에서는 자발적으로 참여했던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대부분은 신고하지 않으면 불령선인으로 불리면서 학교 입학, 공문서 발급, 우편물 수취, 식량과 물자 배급 등에서 제외되는 일제의 폭력적 조치에 어쩔 수 없이 신고한 힘없는 일반 민중이었다. 그러니 단순히 창씨개명 자체만으로 친일 여부를 판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일제는 친일적 성향을 띠고 있었던 한국인 신문조차도 탄압을 가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두 신문사는 강제 폐간(1940.8.10)되기에 이른다. 1942년부터는 강제로 일본어를 상용해야 했기 때문에 학생들은 학교 안과 밖에서 서로 감시 고발해야 했고, 관공서에서는 업무 시간에 반드시 일본어를 사용해야 했다. 이와 같은 민족말살통치는 이론이나 정책, 일회성의 선전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국민정신총동원 운동 등의 조직화된 행정체계를 통해 한국인의 일상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815광복(1945) - 일제의 패망! 한국의 승리?

 

한국인들은 일제강점기 내내 독립을 쟁취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왔다. 태평양전쟁 말기 해외에는 김구의 대한민국 임정, 김두봉의 조선독립동맹, 김일성의 빨치산 그룹, 이승만의 주미외교위원부 등 독립운동 조직이 있었다. 이들은 연합국의 후원 속에 국내 진공을 계획 중이었고, 국내에서는 여운형의 조선건국동맹이 이들과의 긴밀한 연계를 모색하고 있었다. 일반 국민들에게 광복은 갑작스럽게 닥친 일이었지만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1945813일 일본은 포츠담선언의 수락과 무조건 항복에 동의하면서 15일 패망하고 한국은 해방되었다. 광복을 맞은 것이다. 하지만 정작 815일의 서울은 고요했다. 히로시마에서 폭사한 의친왕의 아들 이우의 장례식이 이날 오후 평온하게 거행되었다. 서울 시민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와 광복의 감격을 노래한 것은 서대문형무소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이 풀려나 행진함으로써 광복을 확인시킨 16일부터였다. 16일 오후 휘문중학교에 운집한 5천여 명의 한국인들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위) 위원장 여운형의 연설을 들으며 광복을 실감했다. 경축대회를 열던 한국인들은 소련군이 진주한다는 소식을 듣고 경성역으로 달려 나갔고, 건준 부위원장 안재홍은 패전한 일본인에게 관용을 당부했다. 평양과 서북에서는 관공서 방화나 친일파 공격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상대적으로 남한은 평온했다.

안재홍이 지방마다 건국을 준비하기 위한 건준 지부를 결성하라고 방송한 이후 17~18일에 걸쳐 전국에서 광복 축하 집회가 열렸고, 19458월 말에 이르면 남한 내 145개 시ㆍ군에 건준위 지부가 결성되었다. 건준위는 조선총독부와의 타협 속에 여운형을 위원장, 안재홍을 부위원장으로 1945815일 출범한 조직이다. 중심인물들은 조선건국동맹원들과 여운형의 인맥들이었다. 치안 유지, 식량 확보 등을 위해 조선총독부는 건준위가 필요로 하는 재정적 지원과 협력을 제공했다. 건준위의 임무가 치안유지 협조에 국한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건준위 말 그대로 건국을 준비하는 조직이라고 생각했고 실천에 옮긴다. 이에 따라 지방에서 건준 지부들이 치안대, 보안대 등으로 불리던 지방의 자치적 조직들로부터 재편되고, 실질적 행정권을 행사하자 이에 경악한 총독부는 일본군 헌병대 등을 동원해 강제 해산을 시도했지만 이미 그 힘은 총독부 통제 범위를 넘어서고 있었다. 결정적 시기에 기회를 얻은 한국인들은 현명하게 자주적 건국의 길로 달려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건준의 가장 큰 역할은 광복 후 한국인들이 정치사회 조직을 자유롭게 결성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을 마련해주었다는 점이다. 광복 후 불과 1개월 만에 50여 개의 정당과 사회단체가 조직될 정도였다. 하지만 건준이 당시 정국을 주도하는 정치적 중심으로 부각되면서 좌우익 갈등이 빚어지기 시작했다. 여러 차례에 걸친 간부진 교체 과정에서 좌익의 영향력이 강해지자 우익들의 불만은 커졌고,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로 대표되는 안재홍이 부위원장직을 사퇴하게 된다. 또한 이들이 9월 초에 급하게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정권으로 전환한 것은 이후 많은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한편 광복과 함께 해외에서 활동하던 한국인 지도자들이 속속 입국하기 시작한다. 남한의 경우 미국에서 활동하던 이승만(1945.10.16), 중국에서 활동하던 김구 등 임정 요인(1945.11~12)들이 귀국했고, 북한에는 소련에서 훈련받은 김일성 등 빨치산 그룹(1945.9), 중국 공산당의 후원으로 활동했던 김두봉, 무정 등 조선독립동맹 그룹(1945.12) 등이 귀국했다. 그리고 독립운동가들이 감옥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고 그동안 징용, 징병, 학병, 위안부 등으로 중국, 만주, 일본, 남태평양 등에 강제 동원됐던 한국인들이 1946년 중반까지 대거 귀환한다. 죽음을 넘어섰던 이들의 귀환, 거기에 전통적 영웅담을 통해 존경과 신망을 얻은 민족 독립운동가들의 귀환은 광복 이후 한국 정치에 힘을 불어넣었다.

당시는 일제에 대한 증오심과 잔재 청산 요구, 새 시대에 대한 소망, 아직은 보이지 않지만 거대한 미국과 소련의 영향력, 이 모든 것들이 그동안 민족의 독립을 위해 앞장섰고 조국을 위해 아픔을 겪었던 많은 이들과 함께 한반도의 상황을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기대와 불안이 뒤섞인 시대로 끌고 나가고 있었다. 815광복 당시 우리 민족에게 분할 점령이나 군정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전범 국가이자 패전국이었던 일본에서 실시되었어야 할 일이었다. 선거로 구성된 의회가 내각을 구성해 주권을 행사했고 군국주의 전쟁 기구들은 폐지, 전범은 추방되었으며 민주적 개혁이 실시되었다. 그 대신 일본을 위해 준비되었던 군사 점령, 군정 실시 정책은 한국에서 시행되었다. 예상보다 빨랐던 일본의 항복, 38선을 기준으로 소련과 미국의 분할 점령은 우리 현대사 비극의 씨앗이었다.

 

3장 세계가 그은 선 국경이 되어 1945~1961

 

한국전쟁(1950625~1953727) - 한반도, 가장 아픈 상처를 얻다

 

1950625일 일요일 새벽, 조선인민군은 선전포고 없이 38선을 넘어 남침했다. 당일 12시에 포천을, 다음 날 의정부를 점령했고 불과 3일만인 28일에는 서울을 점령한다. 이처럼 초반에 북한이 파죽지세로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은 북한이 남한에 비해 군사력이 우세했던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국 정부가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던 이유도 크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최초 전황을 보고 받고 필요한 조치를 강구했지만, 상황 파악이 미처 안 돼 계엄령이나 전시체제로 전환하지 않았다. 심지어 북한군의 공격을 받은 한국군 전방 사단들은 사단장들이 며칠 전 단행된 인사이동으로 자리를 비우고 있어 전황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정부는 이미 1949년부터 북진통일을 주장하고 있었고 530선거 기간 동안에도 정황상 북의 침공 가능성을 높게 보았으면서도 충분히 대비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전쟁 초기 민심의 동요를 막는 것만을 중요하게 생각해 비상 철수 계획을 수립하지 못한 것도 부적절한 대응이었다. 정부 지도자와 관료들은 우왕좌왕했고 서울 시민을 포함한 피란민은 보따리를 매다 풀다를 반복하며 초조한 시간을 보냈다. 무질서로 일어날 불상사를 최대한 막기 위해 전쟁 발발 당일 시민들에게 군경을 신뢰해 동요하지 말라는 포고문을 발표했지만, 그런 속에서 대통령과 국무위원들, 정부기관과 요원들의 철수는 진행되었다. 그리고 철수과정에서 북한군의 진군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28일 새벽 230분 한강 인도교를 폭파시키면서 다수의 사상자를 발생시키고 서울 시민들의 피란도 함께 막았다.

부산으로 피란한 한국정부는 714, 미군으로부터 지휘권을 인수받은 지 1년여 만에 미 극동군 사령관이자 유엔군 사령관인 맥아더에게 한국 작전권을 양도한다. 이는 유엔군이 사령관의 단일 지휘 하에 한국 지원을 위한 공동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이에 한국군은 법적으로는 유엔군이 아니지만 실질적으로는 유엔군의 일원처럼 전쟁을 수행했고 이때부터 전쟁은 북한군 대 남한군의 싸움에서 북한군 대 유엔군의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미국은 이미 625일 군대 투입을 결정, 26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북의 행위를 침략 행위로 규정한 뒤 27일부터 한강 북쪽을 폭격하기 시작해 7월 초와 중순경에 제공권과 제해권을 장악했다. 74일 한국군과 미군이 최초로 연합전선을 형성한 이후, 한강 방어선에서부터 8월 낙동강 방어선으로 물러나기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 공간을 양보하는 지연전을 수행하는 동안 유엔군은 증원되었다.

915, 맥아더 사령관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면서 전세는 역전된다. 928일 서울을 수복한 유엔군과 한국군이 38선에 도착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명령을 하달하며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유엔군도 이에 동의했다. 반면 중국은 유엔군이 북진하면 전쟁에 개입하겠다고 경고했고, 소련은 즉각적인 휴전 및 외국군의 철수를 제안한다. 그럼에도 유엔군과 한국군은 38선을 넘어, 1020일 평양을 장악하고 청천강을 넘어 압록강을 눈앞에 두었다. 결국 중국군이 11월 전면적인 개입에 나서자 이제 전쟁은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맞붙은 세계 최초의 전쟁이 되었다. 중국군에게 패배하면서 서부전선의 미 8군은 평양에서 38선 부근까지 철수했고 동부전선의 미 10군단과 한국군 1군단은 중국군에게 퇴로가 차단되어 흥남 부두에서 부산으로 해상 철수를 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맥아더는 원자폭탄의 사용을 포함한 화학 무기 사용을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3차 세계대전으로의 확산을 우려한 영국 등 여러 나라의 반대와 압력으로 실행되지 못했고 트루먼은 확전론자인 맥아더를 해임시키고 리지웨이로 교체했다.

중국군의 남진은 리지웨이 장군이 이끈 유엔군의 반격으로 평택-제천 선에서 저지되었으며 이후 유엔군은 반격을 거듭해 서울을 재탈환(1951.3.15)하고 3월 하순에는 문산-임진강 선까지 진출한다. 이후 휴전이 될 때까지 2년여 동안 현재의 휴전선 근처에서 전선은 교착되었고 일진일퇴하는 소모전은 계속되었다. 4개월에 걸친 휴전 협정 끝에 휴전선의 위치가 결정되자 다음에는 포로송환 문제가 18개월간 휴전을 지연시켰다. 그러다 19531월 미국 아이젠하워 신임 대통령이 휴전하도록 압박했고 3월 휴전을 반대하던 스탈린이 사망하자 회담은 급진전된다. 그동안 휴전을 반대해온 이승만 대통령은 617일 반공 포로 2만 명을 석방시켜 휴전회담을 저지하고자 했다. 하지만 결국 1953727일 휴전협정은 체결되었고 한국 대표가 빠진 채 미군, 중국군, 북측 대표가 이에 서명을 한다. 한국정부는 휴전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해 대표를 참석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은 전쟁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인명피해와 물적 피해를 입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아픈 상처라 할 수 있다. 유엔군을 포함한 한국군 119만 명이 전사, 전상 또는 실종되었고, 북측에서는 중국군을 포함한 북한군 약 204만 명의 손실을 입었다.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전쟁의 참화를 당했고 가족 구성원 중 최소한 한 명 이상은 전쟁 피해를 입었다. 부산 교두보를 제외한 전 국토가 전쟁터가 되었으며 37선과 38선 사이의 지역에서는 피탈과 탈환이 반복되면서 그 피해가 엄청났다. 남한의 공업시설은 전쟁 직전의 42%가 파괴되었고, 포격의 피해가 컸던 북한은 60% 이상 파괴되었다고 한다. 한국전쟁은 그 피해가 전쟁 자체로 끝나지 않은 데 더 큰 비극이 있다. 전쟁이 종전이 아닌 휴전으로 끝나면서 이후 남북한 모두 냉전 대결과 유지 분단의 고착에 많은 비용을 들여야 했다. 여기에 더해 전쟁 중 발생한 부역자 문제로 인한 대립, 이산가족 문제, 보도연맹원 대학살이나 국민방위군 사건과 같은 문제들은 국민들 사이에 씻지 못할 상처를 남겼고, 이 모든 것은 지금까지도 한국 역사가 해결해야 할 큰 짐이 되었다.

 

4장 한국, 앞만 보고 전진 또 전진 1961~1987

 

516군사정변과 군정(1961~1963) - 18년간 이어진 독재시대의 개막

 

1961516일 새벽, 한국군 일부가 한강을 건너 서울로 진입했다. 무방비 상태였던 서울 시내로 진격한 이들은 한강 다리에서의 약간의 총격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저지 없이 중앙청과 육군본부, 방송국을 장악했다. 한국군 전체의 5%에도 못 미치는 34백 명의 정변은 그렇게 성공했고, 그 중심에는 육군소장 박정희와 육군사관학교 5, 8기 졸업생들이 있었다. 박정희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사관학교를 졸업한 일본군 장교 출신이다. 광복 후 현역 대한민국 육군 장교로 남로당 비밀 당원인 것이 적발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가까스로 면하기도 했다. 그런 인물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군사정변이었으니 미국을 비롯한 곳곳에서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정변으로 의혹을 받은 것이 당연했다. 북한은 516군사정변에 축전까지 보낼 준비도 했다고 한다. 한국군의 작전권을 장악하고 있던 유엔군 사령관과 주한미국대사관 관계자들은 정변 직후 이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헌법에 따라 수립된 민주당 정부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한 뒤 진압할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당시 장면을 중심으로 한 민주당 내의 신파 세력에 대해 불만을 가졌던 구파의 대표 윤보선 대통령은 정변 진압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고 민주당 정부의 각료들이 모두 사라진 상태였기에 유엔군 사령관은 진압명령을 내릴 수 없었다.

이런 분위기였기 때문에 군부세력이 정변 직후 6개 항목으로 이루어진 혁명공약을 발표할 때 반공을 국시로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견고히 할 것을 우선적으로 선포 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또한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하고 국토통일을 위해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의 배양에 집중하는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겠다라고 선포한다. 정권을 안정시킨 후 자신들은 다시 군대로 돌아가겠다고 한 것이 지만, 또한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이 없다면 정권을 이양하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군사정변 세력은 516군사정변을 위해 만든 군사혁명위원회를 518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하였고 그 의장에 박정희가 취임한다. 이는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을 모두 장악한 최고 권력 기관으로 군정에서 매우 중요한 기구가 되었다. 그리고 비정상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만큼 정권 유지를 위해선 정보 수집이 필수였기 때문에 이를 위한 기구로 중앙정보부를 설치한 뒤 초대 부장에 김종필을 앉힌다. 19625차 개헌을 통해 다시 대통령제로 환원한 박정희는 자신을 지지할 당인 민주공화당(공화 당)을 창당(1963.2)한다. 마치 이승만이 대통령에 재선되기 위해 자유당을 창당한 것과 같았다. 박정희는 별 두 개 소장으로 군사정변을 일으킨 후 어깨 위에 별을 두 개 더 달아 대장이 되었는데, 19638월 군복을 벗고 민간인이 된 다음 날 공화당의 총재가 되었다. 그리고 196310월 우여곡절 끝에 치러진 5대 대선을 통해 군정이 끝나고 민정이 시작된다.

정통적 의미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군의 혁명이 그 얼마나 불행한 것이며, 또 그 혁명의 악순환이 종국적으로 국가를 쇠망으로 이끌 것이라고 하면서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인이 없도록하자며 군인 박정희가 민간인 박정희에게 정권을 이양했으니 군정을 민정으로 이양하겠다는 군사정변 세력의 약속은 지켜진 샘이었다. 그러나 이는 결국 419혁명이 미완의 혁명으로 끝난 것을 의미했다. 마치 프랑스혁명이 제1제정의 황제가 되는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막을 내린 것처럼, 419혁명으로 분출되었던 국민들의 수많은 민주화 요구가 수면 밑으로 가라앉을 수밖에 없는 군인 출신들이 중심이 된 3공화국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리고 이는 한국사의 시대 평가에서 논쟁의 중심을 차지하는 18년의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것이었다.

 

6월 민주항쟁(19876) - 호헌철폐! 독재타도!

 

1987114일 서울대 언어학과 학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 연행되어 수배 중인 선배의 소재를 추궁받는다. 그 과정에서 박종철은 사망했고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책상을 하고 치니 하고 죽었다라고 발표했다. 시체를 부검한 의사가 박종철이 물고문에 의해 숨진 사실을 발표하자 경찰은 관련자 2명을 구속하며 사건을 마무리 짓고자 했다. 하지만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이 이를 축소ㆍ조작하려는 경찰들의 음모를 추가로 폭로하면서, 그동안 국가 공안기관이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는 과정 중 광범위하게 고문을 자행한 것이 드러났다. 이에 따라 분노한 학생과 시민들이 개최한 진상 규명과 관련자 처벌을 촉구하는 추모집회와 시위는 한국 민주화의 새로운 역사를 쓰는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1987413일 전두환은 야당과 개헌안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현행 헌법을 고수할 것이며 모든 개헌 논의를 중단하겠다고 선언한다. 타협의 여지조차도 완전히 봉쇄하는 ‘413호헌조치였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서 제기한 가장 큰 정치적 쟁점은 대통령 선거였다. 대통령선거인단에 의해 선출되는 대통령 선거 방식은 실질적으로 여당 후보의 집권을 보장하는 제도였고, 이에 야당과 민주화 운동 세력은 헌법을 개정해 유신체제 이후 중단된 대통령 직선제를 부활시킬 것을 요구해왔던 것이다. 교수, 종교인, 변호사, 영화인 등 각계각층에서 413호헌조치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며 직선제 개헌운동은 탄력을 받았고 야당과 민주화 운동 세력은 연대를 이루어낸다.

그러던 중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198769일에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 최루탄 파편에 맞아 의식 불명 상태에 빠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런 와중에도 여당인 민정당은 610일 기존 헌법 하에서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전당대회를 열고 노태우를 차기 대통령 후보로 추대한다. 이날 서울을 비롯한 전국 22개 도시에서 박종철 고문살인 조장,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시민대회가 개최되어 총 24만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집회 및 시위를 벌였다. 거리에서는 지나가는 차량들의 동조하는 경적 소리와 시민들의 박수 소리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구호가 울려 퍼졌다. 경찰은 전국에서 220명을 구속하며 집회와 시위를 진압하고자 했고, 이러한 탄압에 맞서 서울 집회에 참여했던 학생과 시민 600여 명은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농성을 시작한다. 학생들은 기말고사 기간이었음에도 연일 가두로 진출하여 시위를 벌였다. ‘넥타이 부대라고 불렸던 사무직 노동자들도 거리 시위에 참여했고, 건물의 사무실에서는 동조의 표시로 두루마리 휴지를 풀어 던졌다.

610일에 전국적으로 시작된 시위는 계속 확산되었으며, 특히 19일 부산 지역의 시위 규모는 정부로 하여금 군 투입을 고려하게 할 정도였다. 하지만 내부의 반발이 있었고 특히 미국은 광주 민주화 운동 때와 달리 군 투입에 명확히 반대 의사를 표시하며 정치 지도자들 간의 타협을 촉구했다. 이에 624일 전두환과 야당 당수 김영삼은 회담을 벌였고, 25일에 김대중의 가택연금이 해제된다. 결국 1987629, 전국적으로 시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민정당 대표위원이자 차기 대통령 후보로 추대된 노태우는 ‘629선언을 발표하게 된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김대중 사면 복권 등 민주화 조치를 약속한 것이다. 급진적인 민주화 운동 세력은 이를 기회로 전반적인 사회 개혁까지 추진하고자 했지만, 정치적 목적을 달성한 야당에게는 더 이상의 시위를 이어갈 이유가 없어졌고 이로 인해 추진력을 잃은 민주항쟁은 끝나게 된다.

6월 민주항쟁의 결과, 헌법은 대통령 직선제와 5년 단임제를 골자로 하는 내용으로 개정된다. 학생과 시민들의 목숨을 건 항쟁으로 정권이 바뀔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지만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야당 세력은 분열되었다. 김영삼, 김대중 두 야당 지도자는 후보 단일화 논의에서 합의점을 찾지 못했고, 198710월 김대중은 대통령 출마 의사를 공식화하면서 통일민주당을 탈당해 평화민주당을 창당한다. 13대 대통령 선거 결과, 여당 후보 노태우는 전체 투표수 중 36.6%를 득표하며 김영삼(28%), 김대중(27.1%), 김종필(8.1%)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된다. 비록 정권 교체 실패로 귀결된 항쟁이었지만 이후 노태우 정권 출범 2개월 후에 치른 총선으로 빚어진 여소야대 국회는, 한국의 민주화가 혁명이 아닌 점진적인 방법으로 방향을 전환하며 한 걸음 더 전진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5장 아픈 만큼 하나 되어, 세계로 미래로 1988~2019

 

BTS 현상(2018) - Love Yourself!

 

국내 누적 음반 판매량 천만 장 최단 기록 돌파’, ‘한국 가수 최초 빌보드 200 1(2연속)’, ‘빌보드 최장 소셜아티스트’, ‘세계 3대 음악시상식(빌보드. AMA, 그래미) 노미네이트 및 2곳 수상’.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방탄소년단 (BTS)2018년 경이적인 결과물이다. 방탄소년단은 국내 대형기획사가 아닌 중소기획사 HIT엔터테인먼트 출신으로 아이돌계의 흙수저라고 불리며 시작했지만, 차근차근 한 계단씩 올라 2018년 세계 최고의 자리에 선 7인조 보이그룹이다. 미국과 유럽 등 한국 이외에서 팬층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졌고, ARMY라 불리는 팬들이 자발적으로 소셜미디어를 활용해 전파하면서 방탄소년단을 세계 최고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이다.

한국개발연구원은 방탄소년단 데뷔 후 10년 동안의 경제효과를 분석해 56조 원에 이른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이는 평창 동계올림픽 유발 효과인 416천억 원을 상회하는 것이다. 그들로 인해 연평균 796천 명의 외국인 관광객이 국내에 유입되었는데, 이는 관광 목적으로 국내를 방문한 외국인 입국인 수인 1,0416천 명의 약 7.5%에 달하는 규모다. 연평균 생산유발 효과는 41,400억 원으로 2016년 기준 중견기업 평균 매출액인 1,591억 원의 26, 연평균 부가가치 유발효과는 14,200억 원이라고 한다. 한국개발연구원은 방탄소년단의 인기 상승이 국내 경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판단된다면서 문화산업의 선진화와 한류의 수출을 연계하고, 국내 관광자원을 발굴해 외국인 관광 수요를 더욱 확대시켜서 문화산업 전반으로 한류가 확산되도록 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한국 경제에서 방탄소년단이 유발하고 있는 효과만큼 중요한 것이 있다. 해외 공연을 할 때마다 몇 분이 채 안 돼 전 공연장 좌석을 매진시키고, 스탠딩 구역을 차지하기 위해 공연 며칠 전부터 노숙을 감수할 만큼 그들에 빠지게 된 방탄소년단의 팬들이 자연스럽게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들의 관심이 확산됨에 따라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에서 유학 또는 생활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방탄소년단의 노래와 한국의 전통을 주제로 한 퍼포먼스를 보며 남들과 비교하면서 최고가 되고 싶어 했었지만 결국엔 최고가 아닌 위로와 감동이 되고 팬들의 슬픔과 아픔을 거둬가고 싶다고 하는 방탄소년단의 노래 속 고백을 들으며, 또 방탄소년단 자체의 팬들에 대한 사랑과 친절을 통해 그 속에서 치유를 받고 기쁨을 얻는다는 사람들의 마음이 한국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리더 RMUN에서 ‘Love Yourself, Speak Yourself’를 주제로 세계 젊은이들을 향해 한 연설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곡마다 담고 있는 메시지는 세계 청소년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특히 이들의 스스로를 사랑하라는 메시지는 그들의 노래 가사처럼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팔과 다리, 심장, 소중한 영혼을, 조금 부족해도 아름다운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라는 메시지는 많은 청소년들에게 긍정적인 변화를 주고 있다. 거기에 그 팬클럽인 ARMY는 멤버들의 생일에 그의 이름으로 기부를 하는 등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이들의 행보에 동참하는 것을 기꺼이 즐기고 행복해한다.

이처럼 방탄소년단은 지금까지 걸어오고 있는 길에서 여태까지 K-POP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던 대형 기획사의 마케팅이나 기계적인 훈련이 아닌 스스로 만들어가는 그들만의 이야기와 공연을 위한 피나 는 노력, 팬들과의 소통 그리고 갖추어진 인성을 통해 많은 사람들과 K-POP 시장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모습에 열광하는 청소년의 모습 속에서 젊은 한국의 희망을 볼 수 있기 때문에 10대 청소년층만이 아닌 3~40대들에게도 그들의 노력과 최선은 위로와 감동이 되고 있다. 그렇기에 이들의 아름다운 행보가 계속 이어지길, 현재의 이들과 같은 한국 청년들이 많이 자라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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