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베스 켐프턴
동양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20년 넘게 동양의 철학과 미학을 탐구해왔다. 19살 학위를 위해 처음 발을 디딘 일본은 오랜 세월 일과 삶의 터전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긍정하는 와비사비 철학을 감성적이면서도 실용적인 언어로 풀어내어 전 세계인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방랑자이자 모험가이고 미를 추구하는 사람이며 초콜릿과 문구류를 강박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다. 현재 영국 남쪽 바닷가 마을에서 느린 삶을 살고 있으며 삼림욕에 푹 빠져 있다.
▣ 역자 박여진
한국에서 독일어를, 호주에서 비즈니스를 공부했다. 기업경영 컨설팅 사업을 하다 번역가가 되었다. 주중에는 파주 번역인 작업실에서 번역을 하고, 주말에는 여행을 다닌다. 지은 책으로 『토닥토닥, 숲길』이 있고, 옮긴 책으로 『내가 알고 있는 걸 당신도 알게 된다면』, 『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산책 2』, 『와비사비 라이프』, 『수납 공부』 등이 있다.
▣ Short Summary
우리는 수많은 정보와 상품 속에서 살아가며,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욕망하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를 하면서 스스로를 옥죈다. 그런데 이는 ‘나는 아직 원하는 기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자책이며,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 때문에 현재의 나를 부정하는 악순환을 만들어낸다.
삶의 어려운 숙제를 풀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중요한 것을 결정할 수 있는 삶의 틀이 필요하다. 그래야 가져도 가져도 끝없이 갈망하는 상태를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좀 더 천천히 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 또 우리 정신을 맑게 해주고 늘 깨어 있게 하는 아름다움에 눈을 떠야 한다. 아울러 이런저런 평가와 완벽을 향한 끝없는 욕심은 이제 그만 내려놓으라고 스스로를 다독여야 한다.
이 책은 와비사비의 기원과 역사는 물론, 그 본질적 측면을 이해하고 일, 생활, 인간관계까지 모든 영역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 등 와비사비에 대한 모든 것을 알려준다. 와비사비란 단순함과 고즈넉함, 받아들임을 추구하는 미학적 개념이며 부족하고 모자란 것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주는 삶의 지혜이기도 한데, 저자는 와비사비 철학을 기초로 우리 삶의 거의 모든 영역까지 확장하여, 어떻게 하면 매일매일의 일상 속에서 와비사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 조목조목 알려준다.
저자는 모자란 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와비사비는 현대인에게 가장 적합한 삶의 방식이라 말한다. 끊임없이 물건을 사고, SNS 속 화려한 삶과 자신을 비교하고, 화장과 시술로 치장하는 것이 아닌, 자연스러움, 덜어내기, 낡음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와비사비는 지친 현대인의 삶에 답을 줄 수 있으며, 남들보다 많이 갖지 않아도, 통장과 지갑이 비었어도, 작은 원룸에서도 그 나름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는 현재의 삶을 긍정하고 지금의 나로도 만족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 차례
서문_ 친애하는 한국 독자들께
들어가며
1장 와비사비란 무엇인가
2장 단순하고 아름답게
3장 자연과 더불어
4장 받아들임, 내려놓음
5장 실패를 마주할 때
6장 조화로운 관계
7장 나의 일, 나의 삶
8장 순간을 소중히
마치며
▣ 차례
와비사비란 무엇인가
일본에서 평생을 보낸다 하더라도 누군가 입 밖으로 와비사비라는 단어를 크게 말하는 것을 듣지 못할 수도 있다. 사전을 펼쳐 봐도 와비사비라는 단어를 찾을 수 없다. ‘와비’라는 단어와 ‘사비’라는 단어에 대한 설명은 길게 나와 있지만, 두 단어를 합한 ‘와비사비’는 없다. 와비사비는 문자가 아니라 사람들의 가슴과 마음에 산다. 그리고 일본인에게 와비사비에 대해 설명해달라고 하면, 아마 대다수는 그 의미를 알아도 정확한 단어로 설명하지 못해 전전긍긍할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그 단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와비사비는 직관적 이해이며 사고방식이자 삶의 태도다. 천편일률적인 기계적 학습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와비사비를 터득한다. 와비사비의 지혜를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우리의 언어에서 진정한 메시지는 말하지 않은 ‘행간’에 있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와비사비는 별개의 두 단어가 합쳐진 것이다. 두 단어 모두 미적인 가치관을 담고 있으며 문학과 문화, 종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와비(侘)는 단순함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자 물질적인 세상에서 떨어져 정신적 풍족함과 고요함을 누리는 것이다. 사비(寂)는 시간의 흐름과 관련이 있다. 모든 것이 자라고 시드는 방식이자, 세월이 흐르면서 그 외형이 변하는 모습이다. 그리고 두 개의 단어가 결합하여 와비사비가 되었을 때 그 의미는 더욱 확장되고 매혹적으로 바뀐다.
다도: 와비라는 단어의 기원을 더듬어 올라가다 보면 다도 문화를 만나게 된다. 가루 형태의 녹차인 말차는 1191년이 되어서야 일본의 다도 문화에 등장했는데, 말차는 중국 송나라를 다녀온 일본 승려 에이사이가 들여왔다. 에이사이는 선불교 내 린자이 학파를 창시한 인물이다. 그는 차 씨앗을 교토 근처 우지를 포함한 세 곳에 나눠 뿌렸는데, 훗날 우지는 세계적인 수준의 차 재배지가 되었다.
15세기 승려이자 다도 장인 무라타 슈코는 차를 준비하고 마시는 행위를 통해 선불교의 교리를 성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그는 오늘날까지도 다도 문화에서 중요한 인물로 평가된다. 이후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슈코의 다도를 계승했다. 한편 오카쿠라 가쿠조는 산문집 『차 이야기』에서 다도의 숭배는 “일상에 존재하는 더러운 현실들 가운데 아름다운 것을 숭배하는 …… 미학적 종교”가 되었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이 단순한 미학은 16세기 다케노 조에 의해 한층 더 발전했다. 시인이었던 그는 차의 개념을 시로 표현했고, 차 마시는 공간을 자연의 요소들이 있는 공간으로 바꾸었다. 이는 훗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차 스승이었던 센리큐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와비란 무엇인가?: ‘와비’는 ‘차분한 정취’라는 의미다. 본래 이 말의 뜻은 빈곤함, 불충분함, 쓸쓸함을 의미하는 ‘와비루(한탄하다, 슬퍼하다)’에서 왔다. 형용사는 ‘와비시(쓸쓸한, 고독한, 빈약한)’다. 모두 센리큐 시대 이전에 수백 년 동안 일본 문학에 사용되던 표현이었다. 와비는 단순함에서 발견한 아름다움을 깨달아 생긴 정서라고도 말할 수 있다. 온통 물질적인 세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발견하는 조용한 만족감이다. 궁극적으로 와비는 겸손함과 단순함, 검소함을 이해하고 평온함과 만족감으로 나아가려는 사고방식이자 태도다. 와비의 정서는 지금 우리가 있는 곳에 이미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귀하게 여기고 겸손해하는 사고방식이다.
사비란 무엇인가: ‘사비’는 ‘고색창연함, 오래된 모습, 우아한 단순함’이라는 의미다. 한자는 ‘고요할 적’이다. 사비의 형용사인 사비시는 ‘쓸쓸한, 외로운, 적적한’의 의미다. 사비는 소중하게 정성껏 매만진 사물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이는 인간의 손길이 아닌 시간이 만든 것이다. 사비는 세월이 흐르면서 정제되는 우아한 아름다움이다. 사비는 시간의 흐름이 물리적으로 사물에 배어 있는 방식과 관련이 있지만, 그 의미를 깊이 헤아려보면 우리가 보는 사물의 표면 아래 숨겨진 것을 보는 방식이기도 하다. 사비는 모든 것들이 성장하고 사멸하는 방식을 나타내며, 이러한 생명의 덧없음을 성찰할 때 문득 마음 한구석에 옅은 슬픔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사비의 아름다움은 과거와 연결되어 있는 우리 자신, 순환하는 생명, 죽음 같은 비애감을 느끼게 한다.
와비사비의 탄생: 사비의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것이 와비의 핵심이며, 둘은 수세대에 걸쳐 나란히 사용되었다. 와비사비가 주는 교훈을 더듬어보려면 몇 세기를 거슬러 올라가야 하지만, 두 단어가 합쳐진 와비사비라는 용어가 하나의 개념으로 인식된 것은 불과 100여 년 전이며, 이 단어는 ‘일본인들의 철학의 근간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의 결과’다. 사람들이 항상 알고 있던 그 무엇에 붙여줄 이름이 필요했던 것이다. 와비사비는 어떤 물건 혹은 환경이 지닌 아름다움을 초월하는 것이자, 그 깊은 아름다움에 대한 반응이다. 와비사비는 오직 느낄 뿐, 만질 수 없다. 사람마다 세상을 다르게 경험했기 때문에 한 사람의 와비사비가 다른 사람의 와비사비와 같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진정한 아름다움의 본질을 접할 때 와비사비를 느낀다. 소박한 자연의 아름다움에서 이런 느낌을 많이 받는다.
삶 속에 와비사비를: 삶의 어려운 숙제를 풀기 위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을 결정할 수 있는 삶의 틀이 필요하다. 좀 더 천천히 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삶도 우리 곁을 황급하게 스쳐 지나가지 않는다. 우리 정신을 맑게 해주고 늘 깨어 있게 하는 아름다움에 눈을 떠야 한다. 이런저런 평가와 완벽을 향한 끝없는 욕심은 이제 그만 내려놓으라고 스스로를 다독여야 한다. 자기 자신과 상대방을 바라보면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서 완벽하게 불완전한(Perfectly Imperfect) 보물을 응시해야 한다.
우리에게 간절히 필요한 이 모든 것들이 와비사비 철학에 담겨 있다. 와비사비 철학은 단순히 문제를 피상적으로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다. 삶을 바라보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준다. 와비사비는 우리에게 모자라도 만족하는 법을 알려준다. 와비사비는 고요함, 조화, 아름다움, 불완전함 등 귀중한 지혜의 보고다. 불완전함을 수용한다고 해서 삶의 수준이 낮아지거나 질이 떨어지게 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완벽하게 불완전한, 독창적인 존재다. 간단히 말하면, 와비사비는 나 자신을 인정하는 것이다. 와비사비는 최선을 다하라고 용기를 준다. 하지만 성취할 수 없는 완벽한 목표를 추구하느라 몸과 마음을 아프게 하지는 않는다. 반드시 해야 한다고 여겼던 것들을 내려놓는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와비사비는 편하고 느긋하게 삶을 즐길 수 있도록 부드럽게 우리를 다독인다. 아름다움은 가장 있을 법하지 않은 곳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며, 일상을 기쁘게 해주는 문턱을 만들어준다.
단순하고 아름답게
일본은 국토의 80%가 산과 숲, 들판, 농경지다. 따라서 도심에 사람들이 몰리는 것도 당연하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작은 건축물과 디자인을 만드는 데 통달했다. 하지만 대다수 일본인이 물건 하나 없는 집에서 살고 있을 거라는 착각은 버리길 바란다. 그렇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이 좋은 것도 아니다. 미니멀리즘이 많은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는 있지만, 미니멀리즘 또한 또 다른 형태의 완벽함이 될 수 있다. 자신을 자책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요소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어쩌면 여러분도 나와 같은 사람인지 모른다. 미니멀리즘을 좋아하고 완벽하게 깔끔한 집을 꿈꾸지만 미니멀리즘의 엄격한 규율은 어쩐지 잘 맞지 않는다. 여러 이유들이 있을지 모른다. 아이들, 반려 동물들, 바쁜 라이프스타일, 앤티크 주전자에 대한 집착, 어지간한 동네 도서관보다 많은 책들……. 어쩌면 세를 살고 있어서 생활공간을 바꾸는 데 제약이 있을 수도 있다. 혹은 아늑한 집을 꾸미기에는 예산이 너무 빠듯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중 여러분 생각과 비슷하다고 느끼는 점이 있다면, ‘마음이 담긴 단순함’이 답이다. 나에게 ‘마음이 담긴 단순함’이란 집을 강박적으로 미니멀하게 꾸미거나 물건을 비우기 위해 피곤할 정도로 노력하지 않고도 잡동사니를 정리해서 사랑스러운 공간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공간을 정돈하고 자신을 위한 곳으로 만드는 일이며, 집을 아늑하고 아름다우면서도 여전히 사람 사는 느낌을 물씬 주는 곳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사는 곳은 살아가는 방식과 같다: ‘마음이 담긴 단순함’의 미덕은 집의 크기나 예산에 상관없이 어떤 주거지도 아름다운 공간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집은 생활하는 공간이다. 생활은 완벽하게 깨끗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좋은 소식은 혼돈의 생활을 아주 약간만 수정하면 꽤 많은 변화를 줄 수 있다는 점이다. 많은 이들이 이미 이런 방식으로 아늑한 공간을 만들고 있다. 약간의 시간과 노력만 있으면 우리 집도 정말 중요한 것만 남겨둔 안식처가 될 수 있다. 차를 마시는 전통적 공간, 다실은 와비사비의 전형이다. 다실에서 우리는 깨끗하고 단순하며 불필요한 것이 없는 공간을 상상할 수 있다.
이런 공간을 만들려면 무엇을 남길지, 무엇을 버릴지, 무엇을 보여줄지, 무엇을 보관할지, 무엇을 고칠지, 무엇을 소중히 간직할지를 정해야 한다. 완벽한 시간이 올 때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 집을 단장할 돈이 생기기를, 자녀가 집을 떠날 시기가 오기를, 혹은 서랍과 그릇 수납장을 정리할 시간이 생기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그저 오늘, 지금 당장, 바로 눈앞에 있는 공간에서 시작하면 된다. 무슨 규칙을 만들자는 것이 아니다. 자신만의 방식대로 공간을 정리하기 위한 생각과 질문을 해보면 된다.
와비사비 정서가 깃든 집: 나는 삶의 중요한 변화를 바라는 이들에게 늘 물건 정리를 우선순위에 두라고 조언한다. 그들은 물건을 많이 비울수록 부정적인 사고방식, 불안한 감정, 정신없이 바쁜 생활, 과거 자신이 했던 일에 대한 집착, 진정한 자신의 모습과 관계없는 삶에 대한 열망 등이 비워지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바로 이 공간에 와비사비가 머문다.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이 완벽하게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자신의 이미지를 과대 포장하기 위한 ‘물건’도 덜 필요하게 된다.
궁극적으로, 단순하게 충만한 집은 나 자신과 가족, 친구들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한 집이다. 이를 위해서는 내가 사랑하는 공간, 미적인 영감을 주는 공간으로 집을 바꾸면 된다. 나의 판단을 한쪽으로 치워두고, 이미 가진 것으로 할 수 있는 것에만 오롯이 집중해보자. 마음이 담긴 단순함은 충만함을 느끼게 해준다. 와비사비에 영감을 받은 집은 손님을 따뜻하게 맞아주고 가족의 삶을 잘 가꿔주는 편안한 공간이다. 충동적으로 구매한 새 물건들이 아니라 애정과 추억이 스민 소중한 것들이 있는 공간이다. 옳고 그름은 없다. 완벽하게 불완전한 방식으로, 꾸미지 않고도 꾸미는 공간이다.
자연과 더불어
와비사비, 그리고 자연: 와비사비는 인간을 자연에서 분리하지 않고 자연의 일부로 보는 관점과 맥락을 함께한다. 그런데 와비사비와 자연은 너무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서 이 두 단어의 연관성을 찾으려고 애쓰다 보면 오히려 둘 사이의 관계가 흐릿하고 모호하게 보인다. 따라서 자연과 와비사비의 관계를 좀 더 명확하게 보려면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초점과 우리의 시야를 다시 조정해야 한다.
본질적으로 와비사비를 경험한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진정한 자연의 아름다움에 직관적으로 반응한다는 의미다. 모든 것이 덧없고, 불완전하고, 미완의 상태임을 일깨워주는 그런 아름다움이다. 종종 자연에 있을 때 와비사비를 느끼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자연에서 보내는 시간에는 강력한 힘이 있다. 자연에 있노라면 우리가 기적의 일부가 된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처리해야 할 업무들, 집안일, 어깨를 짓누르는 책임들에서 잠시 벗어나 와비사비를 거울처럼 비춰주는 생명의 장엄함을 바라보노라면, 그 거울 속에서 설핏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된다.
자연은 내 머리 모양이 어떤지 신경 쓰지 않는다. 산은 내 직책이 무언지에 관심 없다. 강물은 내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가 몇 명인지, 월급이 얼마인지, 내가 얼마나 인기 있는 사람인지에 대해 아무 관심 없이 그저 무심히 흐른다. 실수를 저질렀건 말건 꽃은 활짝 핀다. 자연은 그렇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준다. 와비사비를 경험하는 능력은 이러한 진실의 순간들에 맞닿게 해준다.
계절의 순환을 따라: 인공 빛으로 낮을 늘리고, 전자 장치에서 나오는 청색광이 신체의 바이오리듬을 방해하고, 오늘은 그저 또 다른 평일이라는 생각으로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자신을 힘겹게 밀어붙이는 현대의 삶은 자연의 징표들을 늘 가로막는다. 몸이 이제는 쉬어야 할 때라고 혹은 나가서 여름날의 햇볕을 쬐어야 할 때라고 아무리 신호를 보내도, 신경 쓰지 않고 무리하게 일을 한다. 그러고는 왜 몸이 이렇게 아픈지 의아해한다. 계절은 우리에게 그렇게 힘겹게 밀어붙이지 않아도 된다고 규칙적으로 상기시켜주곤 한다. 힘을 들일 때가 있으면 쉴 때도 있어야 한다. 집중해야 할 시간도 필요하고 꿈을 꿀 시간도 필요하다. 밀물이 있으면 썰물도 있다. 피기도 하고 시들기도 한다. 자연은 이렇듯 대비를 이룬다. 와비사비는 우리를 자연의 주기에 맞춰준다. 계절의 순환에, 올해 찾아온 지금 이 계절에, 오늘 하루 중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게 해준다.
받아들임, 내려놓음
모든 것은 변한다: 우리의 삶, 인간관계, 일, 건강, 재정, 태도, 관심, 기회 등은 늘 변한다. 때론 그 변화가 돌풍이 불어 닥치듯 강렬하고 빠르게 지나가기도 하고, 태양을 향해 고개를 드는 수선화처럼 조용하고 느리게 찾아오기도 한다. 그럴 때면 아주 가까이 그 변화를 관찰해야 한다. 영원히 변치 않고 머무는 것은 없다. 인간도 그렇다. 와비사비는 우리에게 덧없고 무상한 것이 모든 자연의 본질임을 일깨워준다. 변화는 피할 수 없으며, 과거나 현재를 붙잡으려 애쓰는 행위는 부질없고 괴롭다.
나는 친구의 집에서 붉은 쌀과 니모노(연한 육수에 채소를 조려서 만드는 일본 음식)를 먹으며 세월의 무상함을 이야기했다. 친구는 정원에 조성된 작은 대나무 숲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에서도 변화는 보여. 대나무는 늘 조금씩 자라고 있어. 환경의 변화에도 아주 민감하지. 대나무는 단단하게 뿌리내리고 있지만 유연해. 바람이 불면 버티지 않거든. 그냥 바람이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면서 바람에 따라 움직여. 그 와중에도 숲은 계속 자라고. 이렇게 지진이 잦은 땅에 있는 건물들을 생각해봐. 지진에 살아남은 건물들은 땅이 요동칠 때 그 흐름을 따라 같이 움직인 건물들이야.”
모든 것은 변한다. 정리해고, 상실, 뜻밖의 사건, 질병 등을 겪게 되면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이런 상황에서 단단하게 버티는 태도는 오히려 우리를 약하게 만든다. 상황에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을 때 갑작스러운 일들이 닥치면 쓰러질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일어나는 상황을 받아들인다면 (혹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현실적으로 인식한다면) 넘어지더라도 완전히 쓰러지지 않고 금방 회복할 수 있다. 유연할수록 강하다. 바람에 따라 움직이는 대나무처럼.
불완전함에 감사하기: 어느 저녁, 히다다카야마에 살던 나는 집 모퉁이를 돌아 유토피아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곳은 단돈 420엔(약 4,300원)이면 오롯이 나만의 시간에 푹 빠질 수 있는 대중목욕탕이었다. 목욕탕 내부는 습기가 자욱했고 양 옆으로 몸을 씻을 수 있는 공간이 나란히 있었다. 이곳에서 나는 아주 작은 의자에 웅크리고 앉아 플라스틱 대야에 물을 받아 몸을 씻는다.
머리를 감는 동안에는 보려 하지 않아도 목욕탕 안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나를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들 몸매나 나이, 기타 남의 눈을 의식할 만한 요소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조용한 자신감을 드러내며 목욕탕을 걸어 다닌다. 따뜻한 욕탕에서 쑤시는 관절을 푸는 노인도 있다. 수다를 떠는 두 친구도 있다. 어린 딸을 데리고 온 어머니도 있다. 이 공공장소에서 목욕을 하며 자라온 저 어린 소녀들의 자신감은 어디에서 비롯된 건지 문득 궁금해졌다.
오랫동안 서양의 소녀들은 천편일률적인 ‘완벽한’ 모습으로 소비되어왔다. 다행히도 변화가 시작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이 그런 모습을 소비한다. 인간은 부모나 어른들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 말하는 방식, 결정을 내리는 법 등을 보고 배운다. 문득 나는 옷을 걸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아주 편안하게 느껴졌다. 보수적인 영국 여성에게는 지극히 드문 경험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나의 ‘흠’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나 역시 그렇게 된다. 그날 저녁 목욕탕에서 나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나의 불완전함에 대한 감사는 내 딸에게 주는 선물이자 내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사실을.
실패를 마주할 때
‘칠전팔기’라는 말이 있다.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난다’는 뜻이다. 포기하지 않는 정신을 나타내는 속담이기도 하지만, 나는 그보다 넘어진 상태로 시작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속담에서는 일곱 번 넘어져도 일곱 번 일어선다고 말하지 않는다. 일곱 번 넘어진 다음, 여덟 번째로 일어난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일단 실패에서 기회를 얻으려면 먼저 그 상황에 부딪혀야 하고, 그다음 다시 일어날 기회를 얻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말이다.
실패 이후 나의 선택: 많은 사람들이 처음 시작하는 일 앞에서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압도된다. 하지만 이를 핑계로 혹시 저지를지 모르는 실수가 미래를 망칠까 봐 끔찍한 현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창의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은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 실패도 앞으로 나아가는 길 중에 만나는 과정이라는 사실이다. 즉, 실패를 하면서 발전한다. 매번 실패할 때마다 지혜가 쌓인다. 그렇게 쌓은 지혜는 다음에 꺼내 쓸 수 있다. ‘실패’가 결말일 필요는 없다. 다음 장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 다만,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나 자신에게 공감과 연민을 보여주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선택했을 때만 그 시작이 가능하다.
교토의 어느 사찰에서 작은 방석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나는 도통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원래 명상을 하려 했지만 머릿속을 지배하는 건 저릿저릿한 다리의 통증뿐이었다. 조금이라도 편하게 앉으려고 뒤척일 때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이렇게 산만하게 구는 나를 못마땅하게 여길 것만 같아 주눅 들고 신경 쓰였다. 슬며시 눈을 떠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물론 나를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내가 뭘 하고 있는지 혹은 ‘제대로’ 하고 있는지에 신경 쓰지 않았다. 모두들 저마다의 일에 깊이 몰두하고 있었다. 오직 나만이 나를 판단하고, 오직 나만이 명상에 ‘성공’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하기도 전에 실패했다고 느끼고 있었다. 나 자신에 대한 판단을 내려놓고 나니 그제야 은은한 종소리, 돗자리에서 나는 풀냄새, 정원을 손질하는 이가 능숙하게 손을 놀리며 초목을 다듬는 순간에 오롯이 머물 수 있었다. 내가 이곳에서 명상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오늘 이 순간을 선택해 여기에 왔다는 사실도 천천히 느껴졌다.
조화로운 관계
느긋하게 생각하기: 남편 K는 행주를 주방 한편에 그대로 두는 습관이 있다. 나는 그의 그런 습관 때문에 머리가 돌 지경이었다. 도대체 왜 행주를 건조대에 걸어두지 않는 걸까? 수없이 젖은 행주를 건조대에 걸어놓을 때마다 마음속에서는 또 다른 분노의 씨앗이 자랐다. 이 문제를 K에게 몇 번 이야기 했지만 그때뿐, 한동안 잘 걸어두는가 싶더니 이내 잊어버리고는 다시 그냥 두었다. 이 문제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다른 집 남편들도 다 이럴까? 나는 이 집에서 남편이 어질러놓은 것을 뒤치다꺼리하는 사람인가?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K가 행주를 주방 한편에 그냥 두는 것은, 주방 설거지를 다 마치고, 식기들을 말리고, 제자리에 두고 난 직후구나. 저녁을 만들고, 딸들에게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를 안아주며 오늘 하루 어땠는지를 물어본 후구나. 문득 K가 고맙다는 생각과 내가 행주에 너무 집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K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지금은 젖은 행주를 건조대에 걸어두는 나의 행동이 내 남편에 대한 감사함의 표시라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누구도 완벽하지 않다. 눈과 생각으로 상대를 보고 판단하지 말고 마음으로 상대를 본다면 어떻게 달라질까? 상대를 변화시키려고 애쓰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판단과 분노는 흘러가게 내버려두면 어떨까? 지금 무언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음에는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있으니 좋은 정보를 얻은 셈이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인다면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지고 무엇이 진정으로 중요한지를 깨닫게 된다. 와비사비 관점으로 세상을 보면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여유가 생긴다.
공기를 읽다: 이 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인터뷰를 요청했던 사람들 대부분이 선뜻 인터뷰에 응해주었다. 무료로 화상통화를 할 수 있는 이 시대에 비행기를 타고 지구 반 바퀴를 날아와 대화한다는 것이 지나치게 보일 수도 있지만 내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순간의 아름다움에서 와비사비를 느끼는 정서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사람들은 말과 말 사이, 즉 꺼내지 않은 말들 사이에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모두들 진심을 전하려면 얼굴을 직접 보고 대화를 나누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임을 잘 알고 있다.
‘공기를 읽는다’라는 일본 속담이 있다. 분위기를 파악해 적절히 행동한다는 의미다. 상대의 몸짓이나 표정 혹은 단순히 감정에서 단서를 얻을 수도 있다. 분위기 파악을 잘하면 어디서나 잘 어울릴 수 있다. 굳이 상대방이 필요한 것을 말하지 않아도 헤아릴 수 있고, 말을 해야 할 때와 귀 기울여야 할 때를 구분할 수 있다. 직관과 감성 지능, 공감 능력을 조화시킨다면 누구든 그렇게 할 수 있다. 이런 능력은 선뜻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나, 불편한 이야기를 꺼내야 할 때 매우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 단순히 눈으로 보고 귀로 듣기만 할 것이 아니라, 직접 얼굴을 보고 상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눠보자. 그리고 무엇이 달라지는지 지켜보자.
나의 일, 나의 삶
와비사비와 직업을 연관시켜 말하는 것이 어색할 수도 있다. 직업이라는 말은 전투적이고, 경쟁적이며, 억압적이고, 특정 목표를 향해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반면 와비사비는 정반대 이미지다. 하지만 와비사비의 렌즈로 직업을 들여다보면 깨달을 점이 많다. 나는 와비사비의 핵심 철학, 즉 모든 것은 덧없고 불완전하며, 미완이라는 가르침이 마치 직업 세계를 마음껏 탐구하고 경험하라고 권하는, 관대한 허락처럼 느껴진다. 흔히들 직업을 1차원적으로 하나의 선에 놓고 생각하지만, 와비사비는 삶이란 원처럼 순환하며, 일생에 하나 이상의 직업을 가져도 좋다고 일깨워준다.
와비사비 방식 적용하기: 직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집중하기란 어렵고 경쟁과 비교를 피해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물론 경쟁이나 비교는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들을 열망하게 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자칫 이런 것들 때문에 경로를 이탈했다면 더 큰 상처가 된다. 하지만 누군가의 성공이 나의 성취에 방해가 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각자의 길을 걸을 것이다. 나는 나의 길을 걸으면 된다. 어디를 가든, 내가 가고 싶은 길을 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은 내게 달려 있다. 매사에 진심으로 임한다면 어느 직장에서나 당신을 만난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만약 그들이 당신의 진가를 몰라준다면 혹시 다른 변화를 주어야 할 때가 아닌지 살펴보라.
나만의 길: 한자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글자는 ‘도(道)’다. ‘길, 경로’라는 의미다. 이 글자는 주로 다른 글자와 함께 쓰여 ‘방법’이라는 의미로도 자주 사용된다. ‘다도’에도 이 한자가 쓰인다. 차를 마시는 법이라는 의미다. 무사도는 무사의 길이라는 의미이며 서도는 서예의 방법이라는 의미다. 직업에도 여러 길이 있다. 멀리 걸어간 다음 뒤를 돌아보면, 길이 그저 구불구불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완만하게 굽이친 길이 있는가 하면 가파르게 휘도는 길도 있다. 지금 있는 곳에 오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음에 도착할 지점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도 중요하지 않다. 사실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성취한 결과가 아니라 그 결과를 성취하는 과정이다.
예술가 사라 카바리티는 30여 년간 일본 무술을 연마하고 있는데, 그는 무술을 익힌 경험이 삶의 여러 단계에서 많은 교훈을 준다고 말한다. “간단히 말하면, 배우는 법을 배웠습니다. 규율과 고된 훈련, 끈기의 중요성도 배웠고 모든 일을 열정과 즐거운 마음을 가지고 임하는 법도 배웠습니다. 자세를 잡고 체력을 기르기 위해 무수히 많은 시간을 연습했습니다.”
일본의 가치 체계에서는 무언가를 행해서 얻은 것보다 행하는 과정에 더 비중을 둔다고 한다. 뭔가를 배우기 위해 노력하는 것 자체가 공부이며, 노력을 많이 기울일수록 더욱 가치 있는 지식과 기술을 얻는다고 믿는다. 뭔가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 과정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손으로 만든 물건이건 삶의 태도이건 마찬가지다. 도예가 마키코 헤이스팅스는 절대로 무결점의 완벽함을 추구하지 않는다. 다만 더 나은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뿐이다. 마키코는 불완전함이 사물의 본질임을 잘 알고 있기에 최대한 본질에 가까운 모습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며, 완벽한 지점에 도달하게 되리라는 헛된 기대도 품지 않는다.
순간을 소중히
시간이 만들어낸 아름다움: 공항에서 도쿄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나는 양손에 값비싼 화장품을 들고 저울질하고 있었다. 하나를 사면 하나를 공짜로 더 준다는 말에 혹해 어떤 화장품을 살지 고르던 중이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불완전한 아름다움을 공부하러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주름을 없애준다고 유혹하는 이 반짝이는 물건에 사로잡혀 있구나.’ 아이러니한 상황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나는 화장품을 원래 있던 곳에 내려놓고 40파운드를 절약했다. ‘안티에이징’ 크림에 돈을 지불하려는 의지는 내 육체가 자연스럽게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저항이다. 안티에이징 시장은 세계적으로 연간 3,000억 달러에 달한다. 이는 말라리아 퇴치와 예방에 전 세계가 지출하는 비용의 100배에 달하는 액수다.
우리는 자신에게 존재하는 ‘사비’의 아름다움을 보는 법은 잊어버린 채 젊은 시절로 돌아가려고 안간힘을 쓴다. 흔히 나이 들어가는 과정을 피하고 두려워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와비사비 관점으로 보면 늙음도 포용해야 한다. 인간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무르익는다. 나이가 들면 인품과 지혜가 더 깊어진다. 경험이 풍성해지고 세상에 내어놓을 것도 많아진다. 존경하는 사람을 떠올려보라. 아마 그 사람은 지금 여러분보다 나이가 더 많은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에게서 늙음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다. 젊어 보이기 위해 시간과 돈을 투자하지만 늙음의 아름다움과 지혜는 경시한다.
누구나 늙음을 두려워한다. 죽음을 두려워한다. 젊음을 붙잡고 싶어 하며 최대한 오랫동안 존재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와비사비는 우리에게 나이 들어감을 즐기라고 말한다.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뿐이니 마음을 느긋하게 가지라고 말한다. 늙는 것도 괜찮다. 누구나 늙는다. 우리가 이곳에 더 이상 머물지 않게 된다는 사실을 알면 좋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소중히 여기고 삶의 의미를 찾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와비사비는 자연의 섭리를 받아들여 평온하고 만족스러운 길을 선택하라고 말해준다. 이 책에서 소개한 방법들을 활용하면 스트레스와 소란스러운 상황을 멀리하고, 조급하게 서두르며 생기는 공격적인 에너지를 내려놓고, 순리에 따르는 에너지를 기를 수 있다.
삶의 새로운 단계로 이동하는 일은 힘들고 어렵다. 특히 우리의 몸과 마음, 감정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을 때는 더욱 그렇다. 때때로 우린 괴롭고, 혼란스럽고, 두렵기까지 한 변화의 시기를 겪곤 한다. 하지만 그런 시기에서도 크나큰 성장과 발전을 할 수 있다. 혹은 삶에서 벌어진 큰일이 우리를 삶의 다른 단계로 밀어버릴 때까지 기다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 필요 없다. 흘러가는 것을 붙잡으려고 집착하지 않고 변화에 마음을 연다면, 다음 단계에서는 더 깊은 지혜를 깨닫고 자연스럽게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길 수 있게 된다. 준비가 되어 있건 그렇지 않건 상관없다. 와비사비는 이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오는 삶의 모든 단계를 받아들이고, 지혜를 기르고, 자기 자신을 보살피라고 말한다.
저마다 자신에게 맞는 삶의 속도를 선택하고,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해야 할 모든 일을 받아들인다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 삶의 모든 단계는 성장의 시간이다. 그 시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건 그렇지 않건 매 순간 우리는 배우고 변화한다. 살면서 일이 잘 풀리는 때 혹은 잘 풀리지 않을 때 다음 질문들을 해보자. ‘여기서 나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지금 나는 어떻게 성장하고 있는가? 나의 내면과 외면에서 어떤 변화를 보거나 느낄 수 있는가? 삶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내가 내려놓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의 나를 더 잘 보살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질문들은 지금 진행 중인 삶에 집중하고 다음 단계로 편하게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나이와 상관없이 삶의 모든 단계를 온전히 포용할 때 우리 내면의 아름다움도 반짝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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