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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미치게 친절한 철학(안상헌 지음)

by 미건주 2020. 5. 22.

미치게 친절한 철학 안상헌 지음 (주)행성비 / 2019년 6월 / 530쪽 / 22,000원

저자 안상헌

 

삶의 문제를 탐구하는 인문학자다. 독서와 성찰을 통해 일상에서 부딪히는 다양한 문제의 근원을 탐색하고 지혜로운 삶의 해법을 찾는 글을 쓰고 있다. 현재 인문학을 보급하는 애플인문학당을 운영하고 있으며, ‘아르카디아라는 철학 수업을 진행하는 것은 물론 다양한 기업과 단체에서 강의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인문학 공부법(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ㆍ서울대 영재교육원 인문학 추천도서), 청춘의 인문학, 거인의 말, 생산적 책읽기 50등이 있다. 삶의 중심을 잡는 데 철학만큼 중요한 공부도 없다. 안타깝게도 철학이라 하면 지레 겁을 먹고 고개를 흔드는 경우가 많다. 개념이 어렵고 사상의 흐름을 좇기도 버겁기 때문이다. 미치게 친절한 철학은 고대철학부터 현대철학까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쓰인 철학사다. 주요 철학 개념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흥미롭게 풀이했고 맥락을 정확히 짚어줌으로써 철학의 흐름을 한눈에 보여 준다. 철학책을 읽다 포기한 독자들도 이번만큼은 끝까지 독파할 수 있을 것이다.

 

Short Summary

 

현대 사회에서는 철학이 무력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과학과 기술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정말 철학은 무용한 것일까? 아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해결할 수 없는 삶의 문제는 얼마든지 있다. 오히려 과학이 발달할수록 철학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진다고 봐야 한다. 과학은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 같아서 위험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원자력만 해도 그렇다. 원자력은 인간에게 큰 도움을 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핵전쟁 같은 인류를 끝장낼 수 있는 위험도 동시에 안고 있다. 과학이 원자력을 개발했다면, 철학은 원자력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판단하는 일을 맡아야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철학을 공부하겠다고 결심하고 진지한 마음으로 도전하지만, 대부분 고대 그리스 철학자 몇 사람을 살피다가 그만두곤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 번째는 철학이 너무 추상적이고 현실과는 거리가 멀어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철학의 맥락을 잡지 못해서 공부의 재미를 놓쳐 버렸기 때문이다.

이 책은 철학적 질문이 바뀌는 지점, 즉 사유의 맥락을 중심으로 고대철학부터 현대철학까지 한눈에 꿰뚫어 볼 수 있도록 안내해 준다. 저자는 삶 속에서 의미를 찾고 인생의 문제를 풀려면 철학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철학의 맥락과 개념을 씨줄과 날줄로 삼아, 고대, 중세, 근대철학은 물론 현대철학의 실존주의, 언어철학과 구조주의, 포스트구조주의까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한다.

 

차례

 

프롤로그

 

1부 고대철학

1. 왜 철학을 할까 - 철학의 시작 / 2.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졌을까 - 자연철학

3.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 헤라클레이토스

4. 눈에 보이는 것이 다일까 - 파르메니데스 / 5. 객관적 기준은 있는가 - 프로타고라스

6. 나는 무엇을 아는가 - 소크라테스 / 7. 왜 철학자가 왕이 되어야 하는가 플라톤

8.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 아리스토텔레스 / 9. 그들이 개처럼 살아간 이유는? - 견유학파

10. 왜 의심하는가 - 회의주의 / 11. 진정한 쾌락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 에피쿠로스

12. 우주와 조화로운 삶은 어떤 것일까 스토아학파

 

2부 중세철학

13. 어떻게 신의 존재를 증명할까 중세철학

 

3부 근대철학

14.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 데카르트

15. 삶은 어디에서 오는가 - 로크 / 16. 사회와 국가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 홉스

17. 인간은 세상을 알 수 있는가 - / 18. 왜 선하게 살아야 하는가 - 칸트

19. 역사는 어떻게 발전하는가 헤겔

 

4부 근대철학의 붕괴

20. 어떻게 인간을 자유롭게 할 것인가 - 마르크스

21. 왜 신을 죽였을까 - 니체 / 22. 인간은 의식적인가 무의식적인가 프로이트

 

5부 현상학과 실존주의

23. 의식은 어떻게 대상을 파악할까 - 후설 / 24. 존재란 무엇인가 - 하이데거

25. 자유로운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사르트르

 

6부 프랑크푸르트학파

26. 타노스는 왜 인간을 공격했을까 - 프랑크푸르트학파

27. 이성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을까 하버마스

 

7부 언어철학과 구조주의

28. 말할 수 없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 비트겐슈타인

29. 선물을 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 레비스트로스

30. 권력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작동하는가 - 푸코 / 31. 욕망은 어디에서 오는가 라캉

 

8부 포스트구조주의

32. 다른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 들뢰즈 / 33. 삶은 시간이다 - 알랭 바디우

 

에필로그 / 참고문헌 / 찾아보기

 

내용요약

 

고대철학

 

왜 철학을 할까 - 철학의 시작

 

기축 시대(axial age):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는 인류 역사에서 중요한 지식과 사상, 철학이 형성되는 시기를 기축(基軸) 시대라고 불렀습니다. 대략 기원전 800년에서 기원전 200년 사이를 가리킵니다. 서양에서는 철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인도에서는 불교가 출현했고,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가 활동한 시대였습니다. 서양 최초의 철학자라고 불리는 탈레스를 비롯해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불교를 창시한 고타마 싯다르타, 페르시아의 차라투스트라, 중국의 노자와 공자 등이 이때 활동을 했습니다. 지금의 많은 생각이 기축 시대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철학이 필요한 이유: 현대 사회에서는 철학이 무력한 것처럼 보입니다. 과학과 기술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예전 철학자들의 주요 이슈였던 인간의 본성에 대한 문제, 물체를 구성하는 근본 단위에 대한 논쟁들이 지금은 유전학이나 양자역학에서 논해지고 있습니다. 그럼 정말 철학은 무용한 것일까요? 아닐 겁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해결할 수 없는 삶의 문제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오히려 과학이 발달할수록 철학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진다고 봐야 합니다. 과학은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 같아서 위험하기 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원자력만 해도 그렇습니다. 원자력은 인간에게 큰 도움을 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핵전쟁 같은 인류를 끝장낼 수 있는 위험도 안고 있습니다. 과학이 원자력을 개발했다면 철학은 원자력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판단하는 일을 맡아야 합니다.

일상생활에서도 철학은 필요합니다. 누구나 걱정, 고민거리가 있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회사 일이 재미가 없고 장래도 불투명해서 괴로운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찾아야 할지 고민 중입니다. 문제는 회사를 그만두면 새로운 일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싫은 일을 계속하자니 괴롭기만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때 인생관이 도움이 됩니다.

인생은 마라톤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힘들고 괴로워도 묵묵히 참으며 회사를 계속 다닐 겁니다. 견디다 보면 목표 지점에 도달할 수 있고 더 좋은 상황을 만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인생은 모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찾아 나설 겁니다. 싫은 일을 계속하는 것보다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여기니까요. 아무튼 이런 고민에 빠진 사람에게 과학은 큰 도움이 못 됩니다. 인생의 문제를 푸는 것은 과학이 아니라 철학입니다. 과학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여전히 철학을 배우고 지혜를 쌓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

 

최고의 선은 행복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목적론이라고 합니다. 모든 사물이 고유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인간 또한 자기 목적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행복입니다. 인간의 존재 이유는 행복이며 이를 위해서 산다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에게 왜 사냐고 물으면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는 대답이 쉽게 나옵니다. 그런 점에서 삶의 목적이 행복이라는 그의 설명은 현대인에게 더욱 설득력이 있습니다.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라지만 그것을 얻기는 쉽지 않습니다. 돈이 많으면 행복할 것 같아서 열심히 돈을 버는데 그 과정이 굉장히 괴롭습니다. 공부를 잘하면 행복할 것 같아 공부를 하는데 고통이 따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해질 수 있는 지성과 성품을 계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사람이 행복하려면 최고의 탁월성 즉 아레테를 실현하기 위해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탁월성은 지성과 성품이라는 두 영역으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성은 지식 혹은 지혜를 의미합니다. 성품은 행동과 태도를 말하죠. 행복해지려면 지혜를 기르고 훌륭한 태도를 갖추어 올바른 행동을 반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행복할 것인가, 중용: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한 것이 중용입니다. 행복해지려면 탁월함이 필요합니다. 이때의 탁월함이란 칭찬받을 만한 품성이나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는 흔히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말을 합니다. 그 상황에서 가장 좋은 선택을 했다는 뜻입니다. 탁월함은 상황에 따라 다른 선택이나 행동을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탁월함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습니다. 때에 맞게 무엇이 가장 바람직한지를 선택하고 행동하는 것, 그것이 탁월함이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중용입니다. 중간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가장 잘 맞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꾸준히 실행할 때 궁극적으로 행복에 이를 수 있습니다.

현실에 토대를 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돈과 같은 물질에 대한 욕망을 인정하는 것으로도 이어집니다. 사람이 행복해지려면 최소한의 물질적 욕구를 충족해야 하고 그럴 때 여유 있는 삶이 가능합니다. 돈이 없다면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그렇다 보면 정작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욕망을 한없이 긍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람은 끝없이 많은 것을 원하기 때문에 욕망을 다스리기 위해 필요한 것이 중용의 삶입니다. 그런 점에서 중용은 지금 우리의 시대에도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 줍니다. 돈과 명예, 승진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세상에서 지혜와 습관을 통해서 어떻게 행복을 추구해야 할지 생각해 보라고 권하기 때문입니다.

 

중세철학

 

어떻게 신의 존재를 증명할까 중세철학

 

중세철학의 문제들: 중세는 서로마제국이 멸망하던 476년부터 동로마제국이 멸망하는 1453년까지의 약 천 년 동안을 지칭합니다. 이 시대의 철학은 기독교와 함께 놓고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철학 활동이 신학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중세의 철학은 교부철학 시기와 스콜라철학 시기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교부철학은 3~8세기에, 스콜라철학은 9~14세기까지 큰 힘을 발휘합니다. 교부철학을 대표하는 사람이 아우구스티누스, 스콜라철학을 대표하는 사람이 아퀴나스입니다. 두 사람 모두 기독교에서 성인으로 추앙받는 인물들이죠.

중세철학은 세 가지 주제에 천착했다고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첫째, 신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를 형이상학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다양한 철학적 노력이 이루어집니다. 이 과정에서 악의 존재는 커다란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선한 신이 창조한 세계에 왜 악이 존재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물론이고 아퀴나스 또한 악의 존재를 설명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둘째, 이성 혹은 지식을 통해 신의 섭리를 이해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신과 인간이 몸담고 있는 세계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설명해야 합니다. 이때 이성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셋째, 첫째와 둘째 문제에 대한 연장으로 발생하는 보편자의 존재 여부에 대해 논쟁했습니다. 흔히 보편논쟁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근대철학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통로 역할을 했습니다. 중세철학 특징을 말할 때 흔히 철학은 신학의 시녀란 표현을 씁니다. 캔터베리 대주교인 안셀무스가 남긴 나는 알기 위해 믿는다는 말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그에게는 지식보다 믿음이 먼저였습니다. 확실한 지식이 있은 후에야 믿으려는 지금 우리의 사고방식과는 달라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우리도 지식보다 믿음이 먼저인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믿고 있는 사람이 하는 말이라면 의심하지 않고 옳다고 받아들입니다. 일상에서 접하는 정보들 중에서 내가 믿는 것과 관련된 것들만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특히 종교는 지식보다 믿음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근대철학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데카르트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 중세철학이 신학에 의존적이었다면, 근대철학은 자연과학에 크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신학을 뒷받침하는 도구로 받아들였던 지식이 신학을 밀어내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교회의 권위가 무너지고 과학적 지식의 가능성이 부각되면서 사람들은 지적 자신감에 충만해져 새로운 시도들을 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데카르트는 확고한 지식을 얻기 위한 자기만의 작업에 들어갑니다. 바로 방법적 회의입니다. 기존의 지식이 모두 의심받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지식을 쌓으려면 무엇이 진정 믿을 만한 지식인지 가려내야 합니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기존의 모든 지식을 철저하게 검토한 후에 명확하고 자명한 지식을 발견하려고 시도합니다. 의심하고 또 의심해서 더는 의심할 수 없는 것을 찾아내겠다는 것입니다.

의심의 여지가 있는 것은 배제하고 명확한 지식을 얻기 위해 그가 먼저 의심한 것은 우리의 감각이었습니다. 우리는 크게 감각과 이성, 이 두 가지로 세상을 파악합니다. 감각은 감각기관을 통해 세상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들을 제공해 줍니다. 이성은 논리적 추론으로 얻어 내는 지식들의 기반입니다. 먼저 감각을 고려한 데카르트의 결론은 명확합니다. ‘감각은 변한다. 따라서 불완전하다.’ 얼마 전 맛집에서 스파게티를 먹었는데 너무 맛있었습니다. 그 기억을 잊을 수 없어 다시 찾아갔는데 예전의 맛이 아니어서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예전의 맛있었다는 감각은 믿을 수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가 두 번째로 검토한 것은 이성적 지식이었습니다. 그중에서 수학이나 과학적 지식은 명확하고 완전한 것같이 보였습니다. ‘1+1=2’라는 명제는 언제나 변함없고 확실합니다. 하지만 이 역시 방법적 회의를 피해 가지 못했습니다. 데카르트가 보기에 수학적 명제 또한 우리의 능력보다 뛰어난 어떤 존재에 의해 왜곡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보다 뛰어난 어떤 악령이 있어서 ‘1+1’이 원래 3인데 우리에게 2라고 인식하도록 주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뛰어난 악령이 우리를 속이고 있다면 우리는 속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악령의 가설에 의해 수학적 진리가 진실이라는 보장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악령이 나를 속이려면 어딘가에 내가 있어야만 속일 수 있습니다. 내 머릿속에 거짓된 환상을 심어 줄 수는 있지만 그러려면 내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내가 존재한다는 증거다.’ 이것이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을 남긴 배경입니다. 모든 것을 회의한 결과 결코 부정할 수 없는 하나의 원리를 발견한 것입니다. 데카르트는 이것을 철학의 제1원리로 받아들입니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데카르트가 말하는 존재하는 나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가 말하는 나는 생각하는 나를 말합니다. 악령이 나를 속일 때 속는 것은 생각하는 나이지 내 몸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의 몸이 존재하는지는 확신할 수 없고, 나의 생각이 존재한다는 것은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게 되기는 하지만 어쨌든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나와 나의 몸을 구분합니다.

 

왜 선하게 살아야 하는가 칸트

 

근대철학의 비판적 종합: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순수이성비판칸트 하면 떠오르는 말입니다. 직관이란 감각을 통해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 개념은 구체적인 것들을 일반화해 만들어 낸 지식 혹은 관념을 뜻합니다. 각각 열한 명인 양 편이 공을 차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직관이고, 이런 경기를 축구라고 이름 짓는 것은 개념입니다.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다는 말은 직접적인 관찰이나 경험이 없이 개념만 가지고 있다면 그 개념은 텅 비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축구의 규칙을 아무리 정확하게 안다고 해도 실제로 축구를 해 보지 않았다면 그 개념은 공허할 뿐이죠.

개념 없는 직관이란 지식으로 정돈되지 못한 감각이나 경험들을 말합니다. 우리는 평생 수많은 경험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어떤 개념이나 지식으로 묶이지 못한다면 제대로 이해될 수 없습니다. 비가 내리고, 나뭇잎이 떨어지고, 발로 찬 축구공이 땅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개념적 지식으로 묶은 것이 만유인력의 법칙입니다. 어떤 현상을 분류하고 개념으로 정리하지 않으면 체계화된 지식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제 칸트가 어떤 작업을 해냈는지 이해되실 겁니다. 칸트가 말하는 직관 없는 개념이란 합리론을 말합니다. 당연히 개념 없는 직관이란 경험론을 말하겠지요. 이 둘을 종합해서 제대로 된 철학을 완성하려는 것이 칸트의 시도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지식을 얻으려면 경험이 필요하고, 이성을 통해 이 경험을 정리해야 필연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경험론과 합리론의 종합입니다.

합리론은 이성의 절대성을 신뢰하고 그것으로 세상을 알 수 있다고 믿었으나 그 결과 독단론으로 치닫고 말았습니다. 반면 경험론은 모든 지식이 경험에서 출발한다고 했으나 이성적 지식에 대해 간과하는 바람에 인간은 세상을 알 수 없다는 회의주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합리론과 경험론의 한계를 인식한 칸트는 그만의 방식으로 방법적 회의를 실천합니다. 인간이 세상을 인식할 때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성의 능력 자체를 체계적으로 비판해서 검토하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인간의 인식 능력을 비판적으로 다시 살펴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칸트의 철학을 비판철학이라고 합니다.

 

순수이성비판: 칸트가 철학으로 풀고자 했던 주제는 인간이었습니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이것이 칸트의 주된 관심사였습니다. 고대 이래로 철학자들은 인간은 동물들이 가지지 못한 이성을 가졌다고 믿어 왔습니다. 칸트 또한 그들의 생각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칸트의 탐구 대상은 이성입니다. 인간 이성에 대한 비판적 탐구, 이것이 칸트가 평생 걸었던 길이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물음으로 철학을 밀고 나갑니다. ‘나는 무엇을 인식할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 ‘나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이 세 가지 물음을 3대 비판서인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에서 풀어냈습니다. 칸트가 말하는 순수이성은 감각이나 경험으로부터 독립해서 선천적으로 인식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이성의 세계에 대한 인식 능력 자체를 재검토해 보겠다는 것이 순수이성비판입니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선험적인 판단 형식인 시간과 공간, 범주를 통해 감각적으로 주어지는 경험들을 종합하여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인식은 판단 형식의 한계로 인해 제약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인식할 수 없는 사물 자체는 남겨지게 되고요. 여기서 실천이성의 중요성이 대두됩니다. 인간은 자연에 속하는 존재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연에 구속되어 식물이나 동물처럼 환경의 제약을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의 법칙에 속하면서도 그 법칙을 뛰어넘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래서 순수이성이라는 인식 능력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양심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양심에 따라 행동합니다. 어떤 일을 하고 후회하는 경우도 있고 자랑스러워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취할지를 결정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자유라는 것입니다. 칸트가 말하는 실천이성이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답하는 이성을 말합니다. 자유로운 인간이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돕는 이성이 실천이성입니다.

무엇이 선한 것인지를 알려 주는 것이 실천이성이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선의지(善意志)라고 합니다. 그때 인간은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선의지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면 그것은 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선은 무조건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언명령(定言命令)이라고 합니다. 조건 없이 무조건 행하는 명령이 정언명령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빛을: 인간은 자연법칙을 인식하는 순수이성을 가졌습니다. 도덕법칙을 직관하는 실천이성도 품고 있습니다. 전혀 다른 두 성질의 이성을 칸트는 판단력비판에서 통합합니다. 칸트가 말하는 판단력이란 아름다움을 느끼는, 숭고한 감정을 경험하는 이성을 말합니다. 이때 판단력은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을 연결하고 통일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됩니다.

살다 보면 아름답다거나 숭고하다는 느낌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칸트에 의하면 그것은 세상이 자신의 목적에 맞게 움직이는 순간을 우리가 포착했을 때입니다. 자연의 순환에서 완전한 원리를 발견했을 때, 도덕적으로 훌륭한 행동을 보거나 실천했을 때가 그 예입니다. 이것은 칸트가 세상을 움직이는 어떤 것을 전제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 존재는 당연히 불멸의 신이겠지요.

인간은 본디 이성에 충실하기 어려운 존재입니다. 게으르고 용기 없고 쉽게 좌절합니다. 그럴수록 이성적 판단을 통해서 결단을 내리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을 성실히 수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칸트가 보기에 당시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성의 눈을 뜨지 못한 사람들에게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는 빛을 심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계몽주의(啓蒙主義)입니다. 계몽주의는 17~18세기에 전개된 사회운동으로, 전근대적인 권위와 인습, 편견과 미신 등을 몰아내고 이성적인 사회를 꿈꾸었습니다. 칸트는 계몽주의를 정점에 올려놓은 철학자였습니다.

 

현상학과 실존주의

 

의식은 어떻게 대상을 파악할까 후설

 

근대의 그림자: 두 번의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인류는 그동안 어떤 일을 저질러 왔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이성과 계몽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일들이 약탈과 전쟁, 홀로코스트라는 반인간적인 모습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런 성찰은 근대성에 대한 반성과 비판으로 이어졌습니다. 인간이 이룩해 놓은 과학과 문명이라는 빛에 가려진 어두운 그림자에 주목합니다. 그래서 현대과학은 성찰과 반성으로 시작됩니다.

 

철학의 위기와 현상학: 현대철학의 흐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후설입니다. 후설은 현상학을 통해 철학의 위기를 극복하려 했던 철학자입니다. 그를 현대철학자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지만 그의 제자였던 하이데거에 의해 본격적으로 현대적 사유가 시작된다는 점에서 후설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후설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가 살았던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분위기부터 알아봐야 합니다. 형이상학이라는 말을 들으면 뭐가 떠오르십니까? ‘머리 아픈 것’, ‘막연한 것’,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우주의 본질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이런 질문들이 형이상학적 탐구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논의가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경우가 많아, 자연스럽게 대중에게 철학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학문으로 치부되곤 합니다. 이런 경향은 과학이 발달하고 산업이 성장하면서 더욱 두드러집니다. 한마디로 철학이 위기를 맞은 것입니다. 이것이 19세기 후반 후설이 활동하던 시대의 전반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럼 형이상학을 밀어내고 등장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실증주의(Positivism)였습니다. 실증주의는 형이상학적인 논리를 거부하고 사실을 근거로 과학적 탐구를 통해 진리를 추구하려는 경향입니다. 실험과 관찰을 통한 증명을 중요시했지요. 실증주의를 대표하는 사람이 콩트입니다. 그는 인간의 인식이 신화적 단계에서 형이상학적 단계로 발전하고 마침내 실증적 단계로 성장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증주의의 침투는 심리학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실험심리학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심리학을 사람의 마음을 탐구하는 인문적 성향이 강한 학문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그 기반은 실험심리학이었습니다. 과학에 기초한 실험으로 정신을 탐구하려는 시도가 심리학의 뿌리였던 셈입니다. 20세기를 전후 시점에서 심리학은 학문의 중심으로 여겨졌고 시대의 한가운데에 우뚝 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렇게 철학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당당히 등장한 것이 후설이었습니다. 그는 철학자이기 이전에 수학자였고 또한 심리학자였습니다. 그리고 또 그는 오랜 학문적 탐험 끝에 모든 학문의 기초가 철학이라고 확신하게 됩니다. 학문이 시작되는 기초는 인간의 의식인데, 그 의식을 철저하게 다룰 수 있는 학문은 철학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입니다.

 

철학의 참된 소명: 그동안 철학자들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다양한 관점에서 세상을 탐구해 왔습니다. 후설이 보기에 그들의 탐구는 기본에 충실하지 못한,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작업이었습니다. 인간의 탐구 활동은 의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지금까지의 철학자들은 의식에 대해 충분히 탐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배고플 때 만두가게를 지나면 맛있겠다는 생각이 들고 침도 삼키게 됩니다. 같은 가게인데도 배가 부를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게 되죠. 배가 고프니까 만두가 맛있어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후설은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왜 배가 부를 때와 고플 때 다른 생각이 들 수 있는지를 명확하게 밝히고자 했습니다.

우리의 일상은 대상(對象)을 경험하는 과정입니다. 매 순간 만나는 대상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는 느낌을 갖게 되죠. 그것이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우리의 의식(意識)입니다. 우리의 의식 앞에 세상은 대상으로 주어지고 그에 대해 우리는 이런저런 판단을 하는데 그것을 주관하는 곳이 의식인 것이죠. 후설의 문제의식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대상이 의식에게 어떻게 주어지는가? 우리는 대상을 어떻게 의미 있는 것으로 파악하게 되는가? 이것이 현상학(Phenomenology)이 다루는 주제입니다. 사물과 세상은 우리에게 어떤 현상으로 주어집니다. 그 현상이 우리의 의식과 만나서 의미 있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후설이 왜 자신의 연구를 현상학이라고 불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현상학이 중요한 이유는 모든 앎의 기초가 사물과의 첫 만남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인지하고 그것에 대해 판단하는 동안 그것의 의미를 해석합니다. 그렇게 다양한 현상에 대한 해석들이 모여 지식이 형성되죠. 눈앞에 강아지 두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강아지를 보고 특성을 분석하려 합니다. 강아지를 생물학의 대상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2를 떠올리며 수학의 대상으로 봅니다. 강아지를 안으면 마음이 편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심리학과 관련지어 현상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강아지라는 현상을 생물학, 수학, 심리학 등으로 다양하게 이해합니다. 어느 쪽으로 파악하는가에 따라서 현상의 의미는 달라지고 그 달라진 의미는 각각의 학문적 기초가 됩니다. 그래서 어떤 대상을 보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의식 활동이야말로 모든 학문의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후설은 현상학이야말로 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학문으로서의 철학을 해야 하며, 그럴 수 있을 때 철학은 소명을 다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자유로운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사르트르

 

후설의 현상학의 영향력은 하이데거에 이어 20세기에 행동하는 지성으로 불린 사르트르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실존주의의 대표자로 알려진 사르트르의 대표 저서 존재와 무의 부제가 현상학적 존재론에 관한 시론입니다. 사르트르도 하이데거처럼 현상학을 통해 존재에 접근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사르트르는 자신에게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 하이데거라고 직접 밝힌 적이 있습니다. 후설과 하이데거, 사르트르로 이어지는 현상학이 실존주의로 완성되는 길은 극적이었습니다.

 

즉자와 대자: 사르트르는 후설의 현상학과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자신의 방식으로 재구성합니다. 먼저 그는 의식은 대상을 가진다는 후설의 지향성 개념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후설을 비판적으로 계승하여 이 세상의 존재들을 즉자(卽自)와 대자(對自)로 구분합니다. 즉자는 의식이 없는 존재입니다. 반면 대자는 의식을 가집니다. 대자는 의식을 가졌기 때문에 세계 혹은 자신과 대면하는 존재입니다. 사르트르는 이 구분을 통해 즉자와 대자가 세계와 맺는 관계를 현상학적으로 살펴보고자 했습니다. 즉자는 의식을 가지지 못한 존재입니다. 사물과 동물들이 여기에 해당되죠. 대자는 의식을 가지고 사유 활동을 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독특한 존재 양식을 대변합니다. 인간은 의식을 통해서 세계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재구성하여 관계를 맺는 존재입니다. 문제는 이로 인해 파생되는 사유들입니다.

 

결핍, 가능성 그리고 자유: 대자의 존재 방식은 채울 수 없는 결핍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 삶의 가능성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로 고정되어 있다면 다른 존재가 될 가능성은 없어집니다. 의식이 대상을 포착해서 영원히 품고 있게 된다면 다른 대상을 포착하는 것은 불가능해지죠. 즉자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자 존재는 무이기 때문에 새로운 대상을 끊임없이 포착해 나갑니다. 여기서 자신을 다른 것으로 채울 수 있는 가능성이 생깁니다. 가능성이 생긴다는 것은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다른 것으로 채워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자유가 인간입니다.

아이들은 꿈이 다양합니다. 야구 경기장에 다녀온 아이는 야구선수가 되고 싶어 합니다. TV를 보다가 재미있는 장면을 보면 개그맨이 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아이는 무엇인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은 수시로 변합니다. 하나로 고정된 꿈이 아닌 다양한 꿈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의식이 지향성을 통해 외부의 대상들을 자유롭게 포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겨냥하고 포착할 것인지는 자유입니다. 야구 경기장으로 갈지, TV를 볼지 결정하는 것 또한 자유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사르트르에게 인간은 자유입니다.

인간은 정체성이 고정되지 않은 대자 존재입니다. 내가 누구인지가 결정되지 않았다는 것은 인간의 본질 또한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정체성이나 본질이 정해지지 않은 존재라는 의미에서 인간은 무입니다. 이것을 사르트르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입니다. 태어나는 이유, 존재하는 목적을 가지지 않고 이 세상에 와 있습니다. 목적보다 존재가 먼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 ‘왜 존재하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게 됩니다. 목적이나 본질이 정해져 있다면 이런 고민은 할 필요가 없겠죠.

 

기투(企投), 앙가주망, 주체성: 실존이 본질에 앞서기에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아 미래를 향해 기투합니다. 기투는 미래를 향해 자신을 던져 존재의 가능성을 확보하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에게 미래는 이루지 못한 꿈 혹은 목표의 상태로 존재합니다. 미래를 향해 기투하고 자신의 삶을 만들어 나가는 존재 양식을 사르트르는 실존이라고 부릅니다. 대자 존재인 인간은 실존을 통해 자신에게 결여된 본질을 찾아 나가는 운명을 짊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했던 것입니다.

한편 사르트르는 행동하는 지성이라고 불렸습니다. 철학자를 넘어 실천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가는 실존에 충실하기 위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레지스탕스로 활동했고, 프랑스의 알제리 점령을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으며, 베트남전쟁에 맞서는 평화운동에 몸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상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려 했고 자신에게 주어진 짐을 끝까지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미래를 만들어 가는 기투를 몸으로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타자와 시선: 실존주의는 20세기 중반을 관통한 커다란 철학적 흐름이었습니다. 사르트르가 현대철학에 미친 중요한 영향력 중 하나가 타자에 대한 것입니다. 사르트르는 존재를 대자와 즉자로 구분하고, 다시 대자 존재인 인간을 나와 타자로 구분합니다. 일반적으로 타자는 나 외의 다른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타자를 나를 바라보는 자로 이해합니다. 나를 바라보며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파악하는 시선을 가진 존재가 바로 타자입니다. 사르트르가 타자의 문제를 이렇게 중요시한 이유는 그것이 인간 존재의 근거를 밝히는 데 중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 사르트르의 철학을 주체의 철학이라고도 합니다. 자기 삶의 주체가 될 것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미래를 향해서 자신을 기투하는 존재입니다. 기투는 어떤 역사적 상황 내에서 이루어집니다. 하이데거가 인간을 세계--존재라고 했듯이 사르트르 또한 그 개념을 받아들입니다. 인간은 특정한 구체적 환경에서 존재합니다. 살다 보면 인생의 걸림돌이나 장애물을 만납니다. 그럴 때마다 이런 것들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직장인들은 돈을 벌기 위해 직장 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직장에서 일을 너무 많이 시킵니다. 자기를 계발할 시간도 없고 가족을 보살필 여유도 없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회사와 환경을 비난하게 됩니다. 환경이 삶을 제약한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과연 환경은 우리의 자유를 제약하는 것일까요? 사르트르의 생각은 다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 혹은 환경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자유롭게 선택한 결과입니다. 내가 회사를 선택했고 그 회사에 입사해서 돈을 벌고 일을 하는 과정에서 장애물을 만난다면 그 장애물들은 내가 선택한 것의 부산물에 해당됩니다. 주어진 상황이 선택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결국 나로 인한 것이니 모두 내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태도를 사르트르는 앙가주망(engagement)’이라고 합니다. 앙가주망은 참여혹은 구속을 뜻하는 말입니다. 앙가주망은 자신이 아는 대로 행동할 것을 강조하는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을 내용으로 합니다. 인간은 기투하는 존재이고 그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행동하는, 즉 자기 스스로를 구속하는 상태가 앙가주망입니다. 그런 점에서 앙가주망은 주체성을 강조하는 사르트르 철학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포스트구조주의

 

다른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들뢰즈

 

인간을 보는 두 시선: 실존주의가 현상에 집중했다면 구조주의는 본질에 무게를 두었습니다. 본질은 일종의 구조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세상에 던져집니다. 문제는 그 세상에 어떤 구조, 체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에 태어난 이상 대한민국의 구조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한국말을 배우고, 풍습을 배우고, 가치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실존주의는 결단을 강조하지만 결단이라는 것도 구조가 알려 주고 규정한 한계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실존주의가 개인의 자유와 결단을 무리해서 강조했다면, 구조주의는 개인의 주체성을 지나치게 축소시켰습니다. 실존주의는 집단의 제약과 사회적 관계의 힘에 무관심했고, 구조주의는 개인의 역동성과 가능성을 무시했습니다. 실존주의가 개인에게 관심을 가졌다면, 구조주의는 보편적 인간에게 집중했습니다. 인간을 보는 관점이 달랐던 것입니다. 실존주의와 구조주의를 탐구하면서 얻은 결론 중 하나는 실존의 문제를 고민할 때 구조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인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고 그것을 토대로 사유를 밀어붙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준과 중심은 없다: 현대적 사유를 대표하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차이, 해체, 관계, 생성 같은 말입니다. 단어의 의미만 생각해 봐도 근대적 사유에 대한 반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을 획일적으로 이해하려는 생각, 절대적 진리를 우선시하는 시도를 해체시키고 다양한 관계 속에서 새롭게 생성되는 가치들을 긍정하려는 시도가 현대철학의 배경에 깔려 있습니다.

이런 시도들을 잘 보여 주는 사람이 들뢰즈입니다. 사람들은 들뢰즈를 차이의 철학자’, ‘노마드의 철학자라고 부릅니다. 차이와 반복이라는 그의 책 제목처럼 그는 세상을 다채로운 것으로 이해했던 현대철학자입니다. 그의 철학은 기본적으로 니체의 사상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것을 해체시키고 생성하는 삶을 긍정하는 니체의 사유를 현대적으로 구체화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철학은 세상에 고정된 것, 진리라 불리는 것, 기준이나 중심이 되는 것에 회의를 품습니다. 현대 사회의 문제들이 기준과 중심을 강조하는 근대적 사유에서 비롯되었기에 획일적인 기준을 거부하려는 모습은 자연스럽습니다. 권력을 고정된 것으로 보지 않고 중심이나 거점이 없이 변화하는 것으로 파악하려는 푸코의 시도가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이처럼 하나의 중심이나 기준을 두려는 사고를 넘어서려는 시도를 우리는 포스트구조주의라고 합니다. 구조주의가 선험적 구조를 우선시하고 그 구조를 통해 인간과 세계를 설명하려 했다면, 포스트 구조주의는 구조주의의 확실성에 대해 의문을 품고 하나의 기준이나 경계를 넘어서서 세상을 파악하려 합니다. 그들 자신이 인정하지는 않지만 푸코, 들뢰즈, 데리다, 장 보드리야르 같은 사람들을 포스트구조주의로 분류하곤 합니다.

 

차이와 반복: 들뢰즈는 동일성, 영토화, 코드화, 유기체화, 기표화, 주체화 등 이른바 고착화되는 것을 경계합니다. 고착화가 차이의 가치를 부정하고 새로운 생성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차이는 존재의 본래 모습입니다. 인간은 그것을 일정한 틀로 절단하고 흐르게 하여 유용성을 만들어냅니다. 그 결과 차이는 소외됩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들뢰즈가 제시한 것이 수목(樹木)과 리좀(Rhizome)입니다. 수목은 나무입니다. 뿌리는 땅 아래에 있고 가지와 잎은 땅 위에 있습니다. 뿌리에서 시작되어 줄기가 나오고 가지가 펼쳐지면서 잎이 돋아납니다. 일종의 위계질서를 가졌습니다. 수목의 핵심이자 근본적인 것이 뿌리입니다. 모든 것에 근원이 있고 본질이 있다고 믿으며 진리를 중요시했던 기존의 철학은 수목적 사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리좀은 수목과는 다릅니다. 리좀은 땅속에서 옆으로 줄기를 뻗어나가 새로운 개체를 생성합니다. 잔디밭에서 잔디를 뽑아 보면 땅속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디가 시작인지 어디가 근본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고구마나 감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위계 없이 수평적으로 연결되어 서로 공존하는 리좀적 관계의 모습입니다.

소쉬르의 언어학과 구조주의는 사물의 의미가 관계에 의해 규정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관계에는 어떤 근본이나 중심이 없습니다. 관계마다 의미가 달라질 뿐 하나의 고정된 의미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들뢰즈도 관계의 사유를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그들과 다르지 않은데, 그것을 설명하는 개념이 리좀입니다. 고착되지 않고 새롭게 변이해 나가는 리좀적인 것에 중심은 없습니다. 접속과 재배치를 통해서 차이를 생성해 나가는 끝없는 반복이 있을 뿐입니다.

 

탈주를 꿈꿀 것: 포스트구조주의는 하나의 기준이나 중심을 경계하면서 기존의 사유를 해체하고 새로운 사유로 세계를 들여다보려 합니다. 포스트구조주의의 중심에 선 들뢰즈와 가타리 또한 중심을 해체하고 세계의 카오스적인 모습을 회복하려 합니다. 그들의 사유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기준과 중심의 사유에서 벗어나자> 들뢰즈와 가타리는 기관화, 유기체화, 영토화, 코드화, 지층화된 세계에서 벗어나자고 합니다. 이를 위해 기관 없는 신체, 탈주, 노마디즘을 강조합니다. 고착된 세계는 폭력과 억압으로 차이를 부정하고 삶의 다양성을 파괴합니다.

<욕망을 긍정하자> 프로이트와 라캉은 욕망을 결여, 결핍으로 파악합니다. 그런데 이런 관점은 욕망의 억압을 통한 사회화를 긍정하게 합니다. 들뢰즈는 욕망을 생산으로 보면서 프로이트적 욕망을 극복하려 합니다. 이것은 니체의 힘에의 의지, 스피노자의 코나투스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욕망은 세계를 생산하고 움직이는 근원이며 힘입니다.

<노마디즘을 구현하자> 영토화되고 코드화된 삶에서 벗어나려면 탈주를 감행해야 합니다. 이때 필요한 정신이 유목민적 삶의 방식, 기관 없는 신체를 확보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노마디즘은 욕망이 그런 것처럼 가능성과 함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리좀적 접속은 영웅을 탄생시키기도 하지만 괴물을 낳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그렇듯 삶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들뢰즈의 사유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철학이 삶의 선택지를 넓혀 준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우리는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기준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돈을 잘 벌 수 있는 직업을 얻기 위해 공부하고 노력하는 길 외에 다른 방법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들뢰즈의 사유는 탈주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가능성을 열어 주고 용기를 불어넣어 줍니다. 차이 자체를 긍정하고 새로운 접속을 꿈꾸며 탈주를 통해 새로운 삶에 이를 수 있다고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늘 그렇듯 문제는 들뢰즈의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에 있는 듯합니다. 이미 영토화되고 고착화되어 버린 우리 마음속에 탈주를 위한 여유와 힘이 남아 있느냐, 이것이 노마디즘의 가능성을 결정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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