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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나는 감정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존 엘더 로비슨 지음)

by 미건주 2020. 5. 22.

나는 감정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존 엘더 로비슨 지음 동아엠앤비 / 2019년 8월 / 448쪽 / 16,000원

저자 존 엘더 로비슨

 

존 엘더 로비슨은 자폐인의 삶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세상에 전하면서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전문가다. 각종 강연을 통해 소통하는 동시에 현재 윌리엄&메리 대학의 신경다양성 관련 전속 학자로 일하고 있다. 미국 정부의 자폐 스펙트럼 장애 연구의 전략적 계획을 담당하는 정부 부처 자폐협동위원회’, 국립보건원과 질병관리본부, 국제자폐연구학회 등의 기관 위원회에서 일하고 있기도 하다. 기계 애호가이자, 열정적인 사진사이기도 한 로비슨은 현재 가족과 함께 매사추세츠 앰허스트 지역에서 살고 있다. 저서로는 뉴욕타임스 선정 베스트셀러 나를 똑바로 봐남들과 다르다는 것, 커비 키우기가 있다.

 

역자 이현정

 

이화여자대학교를 졸업하고, 뉴욕 주립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전공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언어교육학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나쁜 그녀들의 심리학, 1% 리더의 습관, 천개의 성공을 만든 작은 행동의 힘등이 있다.

 

Short Summary

 

어릴 때부터 남다른 행동으로 괴로움을 겪으며 사회적 아웃사이더로 살던 존 엘더 로비슨은 마흔 살이 되던 해에 아스퍼거 진단을 받는다. 그리고 그 사실에 안도한다. 자신이 왜 그런 혼란을 겪으며 살아왔는지 설명할 만한 해답이 마침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런 자신의 경험을 자서전으로 펴낸 후 세간의 관심을 받게 된 그는 우연히 세계 유수의 뇌 과학자들이 이끄는 실험에 참여하게 된다.

로비슨은 세계적인 록 밴드를 위한 음향 시스템을 디자인하고 운영했고, 밀튼브래들리 사에서 전자 장난감과 게임을 만들었다. 레이저 제조업체에서 동력 시스템을 구축했으며, 최근에는 고급 수입 자동차 수리에 전념했다. 아스퍼거 증후군을 지닌 로비슨에게 이 모든 엔지니어링 기술은 쉬운 작업이지만, 타인의 마음을 읽고 이해하는 일은 너무 어려운 것이었다. 이런 그가 자아 완성에 대한 열망으로 종종 우울증 치료에 쓰였던 TMS 요법을 활용해 뇌 회로를 재정비하는 실험에 참여하게 된다.

실험 후에 로비슨은 상대의 목소리에 웃음이 묻어나는 것을 듣거나, 낯선 이의 눈에 슬픔이 가득한 것을 볼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 급격한 감정적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게 되면서, 자폐로 인한 독특한 능력도 함께 사라질 가능성을 깨달은 것이다.

이 책은 아스퍼거 증후군으로 40년간을 소통, 표현, 감정 그리고 타인이 차단된 어둠 속에서 아웃사이더로 살았던 저자의 삶과 마음을 뒤바꿔놓은 최신 뇌 치료법에 관한 회고록이다. 저자는 아스퍼거는 질병이 아니라 그저 삶의 방식이라고 말한다. 아울러 저자는 뇌과학 연구가 아스퍼거 및 자폐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신경학적으로 다른 뇌를 가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아스퍼거 증상이 완화된다면 어떤 변화를 겪을지, 신경다양성 운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등을 들여다보게 한다.

 

차례

 

작가의 글

책머리에

프롤로그

짜릿한 제안

객관성의 가치, 1978년 무렵

의료용 자기장

왜 변화가 필요할까?

마력

사전 동의

뇌 자극의 역사

뇌를 지도화하기

음악이 살아나던 밤

감정

구급차를 향한 노래

가족 이야기

사람들을 들여다보기

환각과 현실

각성

공상과학이 현실로

제로섬 게임

빛나는 음악

실험의 여파

타고난 엔지니어

언어 능력

좀 더 미묘한 효과

다른 종류의 성공

개인사 다시 쓰기

두려움

새로운 시작

잡음을 걷어내고

독심술사

가족의 죽음

다시 리듬을 타고

P.S. 뇌과학의 미래

덧붙이는 글

연구 결과 및 참고 문헌

감사의 글

 

내용요약

 

짜릿한 제안

 

나는 엘름스 칼리지의 자폐 워크숍에 초청을 받았는데, 그 워크숍의 리더는 누가 봐도 나였다. 내가 대학의 워크숍을 맡다니! 최근까지 내가 맡았던 워크숍이라고 해봤자 내가 일하는 로비슨 자동차 수리소에서였다. 그곳에서는 벤츠나 재규어, 랜드로버 같은 차량을 수리한다. 실은 나는 대학 문턱도 밟지 못했다. 내 생애 첫 직업은 로큰롤 공연의 음향 및 조명 효과 엔지니어였다. 모두 독학으로 터득한 기술을 썼다. 그러다 20년 전에 공연계를 떠나 조그만 사업을 시작했다. 오늘날의 나는 자동차 수리공이자 프리랜서 사진작가다. 그런데 아스퍼거 증후군에 대한 자서전을 출간한 뒤로는, 와서 얘기 좀 해달라는 초청이 늘기 시작했다. 그것도 꽤 놀라운 곳들에서 말이다.

자라면서 나는 내가 남과 다르다는 걸 알았다. 물론 그 이유는 몰랐다. 아스퍼거 증후군은 1990년대 이전에는 별로 큰 주목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40대에 들어선 1997년에야 아스퍼거 판정을 받았다. 내가 왜, 어떻게 남과 다른지를 깨닫자 힘이 불끈 솟고 해방감이 밀려왔다. 내 얘기를 세상과 나누겠다는 강한 의지도 생겼다. 처음 만난 이들은 뉴잉글랜드 지역 아스퍼거 증후군 연합(요즘은 뉴잉글랜드 아스퍼거 자폐 네트워크로 불린다) 사람들이었다. 정말 멋진 모임이었다. 회원들은 매달 두 번씩 만나 서로의 삶의 고충에 귀를 기울였다. 온통 따뜻함이 가득했다.

자폐 아이들의 부모들과도 대화를 나눴다. 그들은 내가 스스로를 부양하는 독립적인 성인으로 자라난 걸 보고 용기를 얻곤 했다. 그들이 놀라는 모습을 보니, 내가 자폐증을 가졌다는 걸 모르고 살아온 게 약이 된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사실 자라면서 한 번도 내가 돈을 벌지 못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굶어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달리 방법이 없지 않은가? 하지만 부모들은 자폐 아이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옷 입고 비디오게임을 하는 것 이상은 할 수 없다고 여긴다. 그런 낮은 기대치는 내게 충격이었다. 요즘의 잦은 자폐 진단에 따른 의도치 않은 부작용은 아닌지 의문이 들 정도다.

나는 첫 책인 나를 똑바로 봐를 출간하기 전에도 강연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책 출간이 강연의 연장선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책 출간 후에 청중이 늘어날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런 열렬한 성원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자폐에 관심 있는 이들로부터 수많은 이메일, 전화, 메시지가 쏟아졌다. 초기에 내게 연락해온 이들 중 하나가 바로 엘름스 칼리지의 총장인 짐 멀런이었다.

엘름스 칼리지의 워크숍 날, “저는 베스 이스라엘 병원의 포닥 연구원이에요.” 린지가 내게 명함을 내밀며 말했다. ‘린지 오버만 박사라고 쓰여 있었다. “저희는 자폐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어요. 연구에 대한 안내 전단지를 좀 두고 가도 될까요? 사실 자폐인의 감성지능 강화 프로젝트에 자원할 성인들을 찾고 있거든요. TMS라고 불리는 새로운 기술을 실험 중이에요. 경두개자기자극술(Transcranical magnetic stimulation)의 약자죠. 전자기장을 이용해 뇌 피질에 신호를 유도해내는 거예요. 자폐인들이 타인의 감정을 읽는 능력을 기르도록 돕는 겁니다.” 마지막 말이 관심을 끌었다. 하마터면 그게 바로 내 문제인데요.” 라고 내뱉을 뻔했다.

잠시 후 그녀는 5분 동안 거울신경, 전자석, 펄스 에너지 등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내 책을 읽었나? 아니면 내가 엔지니어로 일한 이력을 아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에너지를 통해 뇌를 바꾼다니, 그게 가능한 일인가?’ 나는 생각했다. 린지는 나를 설득했다. “매우 과학적인 근거가 있어요. TMS가 전자기 에너지를 뇌 회로에 전달하면 뇌 회로는 새로운 연결성을 갖게 되죠. 그러면 우리가 원하는 뇌의 특정 연결성을 강화시킬 수 있어요.” 나는 생각나는 대로 재빨리 질문들을 쏘아댔다. 린지도 대뇌 피질이며 뇌 가소성 같은 용어를 써가며 적극적으로 답을 했다. 어쨌든 나는 더 알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저보다는 저희 지도교수님이 더 잘 설명하실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그러고는 내게 준 명함의 뒷면에 알바로 파스콸-리온 박사라고 적어주며 다음 주에 찾아가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날 저녁, 나는 린지와 그녀의 지도교수를 검색해보았고, 베스 이스라엘 병원이 하버드 의대의 부속 병원임을 알았다. 파스콸-리온 박사는 의학박사이자 뇌과학자로 현재 베스 이스라엘 병원의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린지는 샌디에이고 주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곧 세계 유수 대학의 교수로 임용될 예정이라고 나와 있었다. 희망이 몽실몽실 솟아올랐다. TMS는 전혀 새로운 세계로 통하는 출입문과도 같았다. 나는 그 문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의료용 자기장

 

뇌를 하나의 전자기 기관이라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그 기관에 소량의 전기를 주입해 밸런스를 맞추려는 겁니다.” 알바로 박사를 처음 만난 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알바로는 내게 TMS가 무엇이며 어떻게 작동하는지, 어떻게 그가 TMS에 관여하게 됐는지 말해주었다. TMS가 타인의 감정적 사인을 읽는 데 어려움을 겪는 나를 어떻게 도울지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사람의 뇌는 하나의 전자기 매트릭스와 같다고 한다. 하나의 뇌세포 및 뉴런이 미세한 선과 세포 결합들로 이루어진 미로를 통해 다른 수만 개의 뉴런과 연결되는 형태인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 때였다. “그래서 그 기술로 나 같은 자폐인을 도울 수 있다는 겁니까?” 알바로가 말했다. “자폐인들은 타인이 표출하는 무언의 사인을 읽는 데 어려움을 겪죠. 통상적으로 이들은 뇌에 그런 기능을 담당할 전선이 없다고 해요. 뇌 속의 연결이 복잡하게 뒤엉켜서 그렇다고 보는 연구자들도 있고요. 또 전선이 없는 데다가 연결도 잘못됐다는 의견도 있죠. 우리는 이렇게 봅니다. 전선은 있는데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을 뿐이라고요. TMS로 감정을 담당하는 선을 작동시키려는 게 우리의 목적이에요. 감정을 되살리는 거죠.” 사실 처음에 이들이 나를 초대한 목적은 내가 강연을 통해 연구를 다른 이들에게 소개해주길 바라서였다. , 실험에 참여할 자원자들을 찾기 위해서다. 하지만 나는 강연에서 실험에 대해 소개하는 건 물론이고, 스스로도 참여하겠노라 마음먹었다.

 

사전 동의

 

그들과 저녁 식사를 하고 그 주말에 나는 보스턴까지 차를 몰고 갔다. 목적지인 비외과적 뇌 자극을 위한 베런슨-앨런 센터가 모습을 드러냈고, 린지가 두 명의 동료와 함께 환영했다. “이쪽은 셜리 팩토예요. 저처럼 포닥(post doctor) 과정을 밟고 있죠. 그리고 이쪽은 우리 연구실 조수 린이에요.” 린이 내가 쓴 책을 언급했다. 내가 그들의 실험에 참가한 첫 성인 자폐인이자, 자폐의 경험에 대해서 책을 쓴 최초의 인물이라고 했다. 지금까지의 연구는 대부분 자폐 아동 및 청년 대상이었다고 했다.

바로 그때, 알바로가 방으로 들어섰다. “이쪽으로 오세요. 주위를 한번 둘러봅시다.” 방 안에는 편해 보이는 의자와 의료용 전자 기기들이 여러 대 있었다. “이게 바로 TMS 기계입니다.” 알바로는 ‘EEG 시스템이라고 불리는 뇌파를 모니터하는 기계 등 다른 기계들도 소개했다. 방 안에 적응하는 데 약간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 나는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들에 의하면 알바로의 연구 센터에서는 자폐, 취약 X 증후군(다운 증후군 다음으로 가장 흔한 정신지체의 원인), 우울증, 알츠하이머 등 다양한 병에 대한 연구가 진행 중이었다. 2주 뒤에 나는 사전 동의서에 서명했다.

 

뇌를 지도화하기

 

동의서에 서명하고 일주일 후에 실험이 시작됐다. 검사실에서 셜리와 린지는 나를 컴퓨터 옆에 앉히고 말했다. “컴퓨터 모니터에 나타나는 사람이 말하는 걸 지켜보세요. 들리는 말이 상식적이라고 생각하면 앞의 버튼을, 비상식적이라고 생각하면 뒤쪽 버튼을 누르시면 돼요. 한번 시험 삼아 해볼게요.” 화면 속의 사람이 말했다. “하늘은 녹색이다.” 나는 뒤쪽 버튼을 눌렀다. 곧 다음 질문이 이어졌다. “케이크를 드세요.” 이건 말이 되지. “고속도로를 마시세요.” 말이 안 되는걸. “좋아요.” 셜리가 말했다. 그러고 나서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마침내 마지막 질문까지 마쳤다.

이 이상한 질문들의 진짜 목적은 6개월 후에나 알 수 있었다. 비상식적인 질문들은 함정이었다. 연구자들이 정말로 관찰한 건, 내가 질문을 듣고 이를 어떻게 신체에 미러링하는가였다. 이를테면 고양이를 쓰다듬으세요.” 라는 지시는 몸을 앞으로 내미는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내가 재빨리 팔을 내밀어 앞 버튼을 누르리라고 예측한 것이다. 반면 머리를 빗으세요.’와 같은 지시는 손을 뒤로 쓸어내렸다 올리는 행동과 연관이 있다. 연구자들은 내가 손을 뒤로 쓸어내리려는 충동 때문에 팔을 내밀어 앞쪽 버튼을 누르는 데 조금 더 시간이 걸리는지를 관찰한 거다.

그 후, 나는 뇌 자극 실험실로 자리를 옮겼다. “오늘은 TMS에 대한 반응을 체크할 거예요. 사람마다 반응은 조금씩 다르답니다. 아주 낮은 레벨의 진동 하나로 운동 피질에 자극을 줄 거예요. 운동 피질을 택한 이유는 뇌 부위 중 가장 측정이 쉬운 부위이기 때문이죠. 거기를 자극하면 근육이 움직이게 돼요. 일단 검지를 움직이게 하는 부위를 찾고 나면, 손가락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TMS의 레벨을 낮출 거예요. 그리고 이 일련의 반응이 일어나는 배경에 대해 기록하는 거지요.” 그렇게 뇌 자극 실험을 한 후 오후에는 MRI 촬영이 있었는데, 내 뇌를 찍은 이미지는 168장이나 되었다.

 

음악이 살아나던 밤

 

나의 첫 TMS 실험 날이 됐다. 그런데 실망스럽게도, 컴퓨터 앞에서 치러야 할 또 다른 테스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진행은 셜리와 그녀의 조수가 했다. “화면 속에 여러 얼굴이 스치고 지나갈 거예요. 얼굴의 표정을 보고 알맞은 버튼을 눌러 답하시면 돼요.” 그들이 말했다. 왼쪽 버튼은 행복, 오른쪽 버튼을 슬픔을 의미했다. 3의 감정은 가운데 버튼이었다. 간단하게 들렸지만, 너무 빠른 속도로 표정들이 지나가다 보니 내가 보는 게 뭔지도 헷갈렸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또 다른 테스트를 내밀었다. 화면의 물체를 보고 그게 무언지 재빨리 말하는 테스트였다. 자동차핀셋. 모두 익숙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물체들이 나열된 순서가 뭔가 이상했다. 그런 식으로 얼마간 진행됐다. 비로소 나는 테스트의 대상이 보는 것을 또렷하게 말하는 능력임을 깨달았다. TMS로 그런 능력을 강화하는 것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는 걸까.

드디어 대망의 TMS 시간이었다. 셜리가 시작 버튼을 눌렀다. 기계가 소리를 내면서 1초마다 한 개의 진동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안정적인 리듬이 30분 동안 쭉 계속됐다. 내 불안감은 첫 번째 진동이 오는 순간 사라졌다. ! 하는 소리가 내가 옛날에 칸델라 사에서 일했을 때를 떠올리게 했는데, 그때 나는 레이저를 쏘는 일을 했었다. ! ! ! 매 진동마다 머리가 움찔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불편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어쩐지자유로운 기분이었다. 그렇게 30분이 금방 지나갔다. 마지막으로 퐁! 하는 소리가 나더니 실험이 끝났다. 잠시 후 셜리가 말했다. “좋아요, 그럼 처음에 했던 테스트를 다시 해보죠!”

이번에는 처음보다 나열된 물체의 종류가 적었다. 따라서 본 것을 말하기도 식은 죽 먹기였다. 하지만 곧 문제에 대한 답이 여러 개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동물? 셰퍼드? 답이 하나일까 아니면 여러 가지일까?’ 어쨌든 나는 노력했다. 하지만 첫 테스트보다 잘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뭔가 조금씩 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생각에 미치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정신은 말짱했지만 생각을 해내는 데 많은 주의가 필요했다. 말이나 문장을 내뱉는 데도 신중해야 했다. 연구원들도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듯했다. “기분은 괜찮으세요?” 셜리의 질문에 나는 깜짝 놀랐다. 실험의 즉각적인 효과가 약 15분간 지속될 것이고 그 시간 동안 나를 유심히 관찰하겠노라고, 그녀는 했던 말을 반복했다. ‘왜 그래야 하지?’ 나는 알 수 없었다. 15분 동안 나는 얼이 빠져 있었다.

실험 후 30분이 지나자 모든 게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제 신경과 전문의와 마무리 테스트를 할 차례였다. 다시 밖으로 나갈 준비가 됐는지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매 실험마다 하는 의례라고 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죠?” 의사가 되물었다. “월요일요.” 그런데 답에 약간 문제가 있었다. 사실 그때는 화요일 저녁이었다. 의사는 잠시 후 내게 그 사실을 알렸다. 의사는 이내 내게 날짜를 물었다. “8일인가요?” 내가 물었다. “우리가 지금 어디 있죠?” “여기가 무슨 나라인가요?” “여기는 몇 층인가요?” “지금이 무슨 계절이죠?” 의사는 질문들을 재빨리 쏟아냈다. 질의응답을 마치고, 나는 앞선 얼굴 표정 인식 테스트보다는 훨씬 잘해냈다고 확신했다. 물론 날짜와 요일은 조금 틀렸지만 말이다.

의사는 내가 혼자 집에 가기에 충분한 상태라고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차를 타고 병원 주차장을 뱅뱅 돌아 나왔다. 집까지는 긴 여정이었다. 먼저 전화를 건 사람은 의사인 친구 데이브였는데, 그도 경과가 어떤지 궁금해 하고 있었다. 나는 별로 해줄 말이 없었다. 나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몰랐으니까. 그런데 그와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 문득 깨달은 게 있었다. 바로 내 말투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비록 정확히 어디가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나는 대화를 하면서 계속 그 미스터리를 풀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그게 가능할까?’ 바로 내 목소리에 어딘가 모르게 감정이 좀 더 실려 있었다. 문장 끝마다 목소리 톤이 더 올라가거나 내려가거나 했다.

나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전화를 끊자마자 혼자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물론 연구원들은 내 목소리 변화를 언급하지 않았다. 아니, 전혀 눈치 채지도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팟의 전원을 켰을 때, 운율 문제 따위는 저 멀리 사라졌다. 익숙한 노래가 흐르자 제대로 한방 얻어맞은 듯했다. 마치 환각 증상에 빠진 느낌이랄까. 터배리스 브라더스의 20여 년 전 라이브 무대 음악을 들으며, 나는 난생처음 그런 기분을 느꼈다. 지금 차 안에 흐르는 노래는 정식 앨범 수록곡은 아니었다. 작은 무대에서의 라이브 음악을 직접 짜깁기한 앨범이라 레코드사에서 내놓은 음반만큼 음질이 좋지는 않았다.

차 안에 흐르는 터배리스 브라더스의 노래는 천 번은 들은 곡이었다. 늘 그저 그런 비공식 음원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이번엔 모든 게 달랐다. 한 음 한 음의 뉘앙스가 의미 있게 들렸다. 마치 소리를 이해하는 폭이 천 배는 넓어진 것 같았다. 뇌 자극을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나의 음악을 듣는 방식에 새로운 물꼬가 터진 듯했다. 요전 날, 나는 분명히 같은 곡에서 이상한 쉭쉭 소리를 어렴풋이 들었었다. 하지만 별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그건 바로 커비가 무대 위에서 마이크를 질질 끌고 다녀서 낸 소리임을 깨달았다. 터배리스 브라더스는 한 명씩 번갈아 가며 노래를 불렀다. 그들의 목소리가 아름다운 대조를 이루며 완벽한 하모니를 자아냈다. 아무리 어려운 음에서도 완벽한 소리였다.

그걸 듣는 내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30년 전에 나는 보수를 받고 노래를 들었다. 모든 이들이 정확한 음정을 내는지 날카롭게 주시했다. 물론 요즘엔 그저 노래를 듣고 추억에 잠기는 걸 즐긴다. 그날 밤에 나는 뭔가가 크게 달라졌음을 감지했다. 음악을 더 자세히 들었을 뿐 아니라 훨씬 깊은 감정을 느꼈다. 그렇게 오래 음악계에서 일했으면서도 나는 단 한 번도 가수의 감정에 내 감정을 이입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TMS 덕분에 그럴 수 있게 됐다. ‘자폐가 없는 사람들은 항상 이런 식으로 음악을 경험할까?’ 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건 정말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터배리스의 노래가 끝나고 다음 곡이 시작됐다. 또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주 오래전에 잊어버린 기억이 마치 영화를 보듯 재생되기 시작했다. 가수 에디 홀먼이 거기 외로운 소녀여를 부르는 소리도 들렸다. 요즘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는 에디의 모습이 떠올랐다. 공연이 끝날 때 그가 주여, 감사합니다!”라고 기쁨에 찬 소리를 지른 것도 생각났다. 노래 중간에는 밴드 구성원들이 말하는 소리도 흘러나왔다. 나는 그 순간 친구들을 떠올렸다.

보비 하츠필드와 시브리즈는 블루스 음악가인 타지마할의 형제들이었다. 그들은 내 가게 앞에서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를 세워두고 서 있곤 했다. 어쨌든 그들의 목소리가 녹음된 걸 들으니, 한 명 한 명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의 기분까지도 느껴졌다. 그들의 목소리는 굵고 멋졌으며, 따스함이 녹아 있었다. 늘 듣던 목소리지만, 이제야 그 목소리를 느낄 수있었다. 자폐라는, 나를 감정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던 필터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녹음된 목소리에서 웃음이 느껴졌다. 마치 얼굴을 직접 보는 것 같이 말이다. 이런 감정을 느끼는 동안, 차 안에는 계속 아름다운 음악이 흘렀다.

집에 와서는 옛날에 녹음한 음원들을 밤늦게까지 틀어놓았다. 키스의 리드싱어인 폴 스탠리가 신곡이던 크게 소리 질러요를 부르는가 하면, 여가수 멜리사 멘체스터가 그 옛날 케이프코드 해안가 콘서트장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을 불렀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미소 지었다. 노래들이 불러오는 감정이 마치 따뜻한 여름비처럼 나를 적셔댔다. 그런데 밤이 깊을수록, 그 마법 같은 느낌이 점점 희미해졌다. “효과는 일시적이에요.”라고 그들이 경고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나는 이 강력한 감정이 남아 있어주길 바랐다. 새벽 5시가 되자, 모든 마법이 사라졌다. 나는 잠이 들었다. 이런 사정을 모르고 가족들은 곤히 잠든 듯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청각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 같았다.

나는 린지와 알바로, 셜리에게 이메일로 내 경험에 대해 알렸다. 그들은 별 반응이 없었다. 알바로는 흥미롭군요. 그리고 예기치 못한 일이군요.”라고 답했을 뿐이다. 나는 그에게 좀 더 질문을 했다. 그러자 그는 TMS가 음악을 보는능력을 어떻게 일깨웠는지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게 실험 목표는 아니었다면서 말이다. 그날 밤, 나는 정말로 모든 효과가 사라졌음을 느꼈다. 어쩐지 슬픈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후 몇 주 동안, 나는 그 판단이 시기상조였음을 깨달았다. 그 효과가 어딘가 모르게 남아 있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청각이 더 깊어졌으며, 감정도 풍부해졌다.

나는 알바로에게 내 생각을 전했다. 그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TMS 실험이 선생님에게 미친 영향을 봅시다.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소리를 보는 능력이 원래 아예 사라진 게 아니었다고 말이죠. 젊었을 때 그런 능력이 마음 한구석에 만들어졌겠죠. 그런데 다른 일을 하다 보니, 이제 그 능력이 아예 없는 것처럼 느낀 거예요. 하지만 그 능력은 항상 존재했어요. 그리고 TMS가 그 능력을 되살린 것뿐이고요. 아마 TMS 때문에 잠시 동안 극대화되었는지도 모르죠. 사람의 마음이란 참 복잡하거든요.” “그럼 음악의 힘이 다시 돌아올까요?” 그는 잘 모르겠네요.” 하고 답할 뿐이었다.

그 후로 며칠 동안 나는 알바로와 나눈 대화를 숙고했다. 그리고 내 기분이 어떤지 살폈다. 처음에 나는 음악을 보는 능력이 되살아난 경험 자체를 소중히 여겼다. 하지만 점차 그 이상의 의미가 있음을 깨달았다. 옛 능력이 회복되면서 감정에 대한 이해가 한 폭 더 넓어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음악을 투명하게 보는 능력이 사라지고 나서 오랜 뒤까지도 줄곧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됐다.

 

구급차를 향한 노래

 

일주일 후, 나는 두 번의 뇌 자극 실험을 위해 아내인 마사와 함께 연구소를 찾았다. 셜리가 내게 설명했다. “첫 번째 실험에서는 상승 작용이 일어나길 바랐거든요. 이번에는 좀 가라앉히는 게 목표예요.” 정확히 뭐가 상승하는지, 그게 내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내가 들은 것은 상승과 가라앉힘, 뇌의 새로운 연결고리 형성, 억제된 타깃 부위의 새로운 개시 등에 대해서였다. 물론 이 모두가 복잡한 과학 이론을 쉽게 전하기 위한 비유일 터였다.

이번 실험에서는 다른 타깃 부위를 자극한다고 했다. 오른쪽 눈과 귀 사이였다. 시간이 멈추는 느낌과 비슷한 살짝 멍한 상태는 오늘도 여지없이 반복됐다. 실험을 마치고 나서 마사는 전선이 퐁! 소리를 낼 때마다 내 얼굴에 경련이 일어나더라고 했다. 하지만 가장 신경 쓰였던 건 이상한 내 얼굴 표정이었다고 했다. “우리는 모르는 무슨 농담을 듣고 실실 웃는 것처럼 보였다니까요.” 그녀가 말했다. 나는 놀랐다. 전혀 그런 느낌을 자각하지 못했으니까. 마사의 말을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녀는 나를 포함한 주변 인물들을 관찰하는 데 뛰어났다. 내가 자폐라는 사실을 알자, 그녀는 내 감정적인 눈과 귀가 되길 자청했다. 나도 그녀에게 많이 의존했고 말이다. 그런데 내가 기억도 못 하는 얼굴 표정을 얘기하다니. 실험실에서 걸어 나오자 신경이 온통 곤두서고 온몸이 떨려왔다.

이번 실험에서는 아무런 장기 효과도 나타나지 않는 듯했다. 가슴 졸이며 기다렸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뇌 자극이 너무 약해서 나타나지 않는지, 아니면 나중에 나타날지 의아했다. 실험 전에 연구원이 어떤 부분은 자극해도 효과가 없을 수 있어요.” 라고 일러주긴 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감정적인 민감성도 점점 사라져갔다. 아직도 읽고 듣는 것에서 별의별 감정을 다 느끼긴 했다. 커비와 마사는 내 목소리가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여겼지만 나는 아니길 바랐다.

 

사람들을 들여다보기

 

음악이 살아나던 날 밤은 내게 초월적인 경험이었다. 그다음 날 아침, 뇌 속의 모든 TMS 에너지가 사라졌음에도 그 여파는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그것도 아주 강렬하게. TMS의 힘에 대한 의심은 그날 밤 눈 녹듯 없어졌다. TMS는 영영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음악을 깊게 들여다보는능력을 다시 살려내 주었다. 게다가 이전에는 결코 몰랐던 감정적인 이해의 폭도 더해졌다. 그 결과로 나는 평범한 얘기에도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정의 폭발을 겪게 됐다. 동시에 처음으로 예술과 음악의 아름다움도 경험하게 됐다. 연구원들은 음악을 보는능력은 내 안에 쭉 있어왔다고 주장했다. TMS가 그 능력을 자유롭게 풀어놓았다. 물론 연구원들은 왜 그런 현상이 생겼는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에 대한 답은 하지 못했다. 아마 나보다도 그들이 더 놀랐는지도 모르겠다.

 

실험의 여파

 

마사가 이젠 내가 필요 없겠군요.” 라고 말했을 때가 428TMS 실험 직후였다. 그런 반응은 내게 충격이었고,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마사에 대한 내 애정이 TMS로 인해 변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사이의 역학 관계는 확실히 바뀌었다. 그동안 나는 언제나 마사에게 그녀야말로 나를 세상 속 다른 이들과 통하게 하는 안내자라고 말해왔다. 말하자면 그녀는 내가 타인의 감정에 대해 도통 감을 잡지 못할 때, 이를 해석해주는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랐다. 대화의 비언어적 신호를 나 스스로 읽어낼 수 있었으니까. 연습에 의한 건 아니었다. TMS 덕에 갑작스러운 변화를 경험한 거다. 그 결과 나는 사람들과 한결 더 많이 말을 섞게 됐고, 성공적으로 대화를 마치고는 했다. 마사는 베스 이스라엘 병원에서 내가 뭘 하는지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저 무섭고 불안해서 그랬던 듯하다. 나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래서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뒤돌아보면, 그건 최악의 선택이었다. 두려움에 기반을 둔 마사의 무관심에 관계에 대한 내 당황스러움이 더해지니, 끝없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나는 마사가 대화를 거부할 때마다 점점 말상대를 해줄 다른 이들을 찾았다. 그것 또한 실수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걸 알지 못했다. TMS로 얻은 새로운 능력에 대해 의논할 새 친구들에게 현혹돼 있던 탓이다.

그동안 마사는 우울증으로 고통 받고 있었고, 치료를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마사가 시도한 약은 모두 잠시 동안만 만성 우울증의 장막을 걷어내 줄 뿐이었다. TMS 실험 전의 나는 마사의 우울증을 그럭저럭 견딜 수 있었다. 그녀는 항상 내게 친절했고, 우리 둘이 함께 노력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느꼈으니까. TMS가 내 감정의 문을 열어주기 전까지는 그랬다. 마사와 나는 수리소의 비즈니스 파트너이기도 했다. 거의 매일 함께 출근했다. 전에도 물론 마사가 우울해하지 않길 바랐지만, 그녀의 기분이 나까지 침울하게 만들지는 않았었다. 그저 오늘은 같이 출근을 못 하겠군.’ 하고 끝이었다. 내가 자폐라는 자각이 없었을 땐, 그저 세상과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제는 자폐 때문에 우리가 함께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변화들에 대해 궁리하는 동안 2008년 여름이 되었고, 초기 TMS 자폐 연구가 마무리되었다. 거의 눈치도 채지 못하는 사이에 실험의 효과는 사라져버렸다. 사람들의 감정을 읽는 일도 점점 없어졌다. 정말 우스운 일이었다. 평생을 사람들의 감정 따위는 개의치 않았던 내가 아닌가. 그런데 그 감각을 잠깐 맛보고 나더니 감정을 읽는능력이 사라진 데 엄청난 상실감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가끔씩은 두려움이 스치기도 했다. 알바로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내가 겪은 변화가 희망했지만, 예상치는 못했던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이제 앞으로 어찌될지 또한 예측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나는 상실감에 맞서는 게 최선책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래서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나는 그 사람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들의 감정선을 읽고 느껴보기 위해서다. 즉 이성의 힘으로 감정을 부추긴 셈이다. 그러나 그게 통할 리가 없었다. 마치 감정적인 ESP 같던 능력이 모두 증발해 버렸다. 그런데 여름이 깊어갈수록, 뭔가 새롭고 좀 더 미묘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타인의 마음을 읽고 타인과 융화하는 능력이 어딘가 더 깊어졌다. 내 안에서 천천히, 그렇지만 확연하게 그 능력이 쌓여가고 있었다. 내 주변 사람들과 좀 더 원초적인 연결성을 갖게 된 느낌이랄까. 내게는 아주 낯설지만 완벽히 자연스러운 느낌이었다. 글을 읽거나 영화나 TV 쇼를 볼 때도 새로운 감정적 기류가 맴돌기 시작했다. 일터의 직원들도 내가 감정이 풍부해졌다고 지적했다. “고객들까지도 눈치 챌 정도라니까요!” 그들은 말했다.

언젠가 나는 알바로에게 내가 이런 경험을 하는 게 무슨 뜻인지 물었더니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TMS가 선생님께 새로운 문을 열어준 건 아닐까요. 그리고 선생님의 마음이 그 문을 통과하는 중이고요. TMS 에너지야 사라졌지만, 새로운 문을 통해 TMS 에너지가 지나던 길을 쓰는 중인지도 모르죠. 길이 아주 조금 열려 있을지도요. 시간이 지나면 어떨지 두고 봅시다.” 그 후에도 사람들의 눈을 불편함 없이 바라보는 능력은 훨씬 더 오래, 6개월 동안이나 지속됐다. 그리고 그렇게 영원히 바뀌어버린 듯했다. 오늘날에는 TMS 실험을 받은 직후보다는 그 강도가 덜하지만, 요즘도 사람들의 눈을 곧잘 쳐다본다. 지금이 실험 후 6년째이니, 변화가 영구적이라고 자신할 수 있다. 또 영구적으로 변한 부분은 낯선 이들과 대화를 하는 능력이다. 누군가를 새로 만났을 때, 이제는 그들과의 대화를 전보다 훨씬 더 능숙하게 받아들이고 따라갈 수 있다. TMS 실험이 끝난 그해 여름에 변한 건 내 감정적인 각성뿐만이 아니었다. 확실히 전반적으로 내 상태가 크게 좋아지고 있었다. 평생 그랬던 것처럼 소소한 것에 불안해하고 걱정하는 일도 줄어들었다.

 

좀 더 미묘한 효과

 

연구는 끝이 났지만, 나는 계속해서 연구소를 방문했다. 대화를 나누고 더 배우기 위해서였다. 그 시간을 돌이켜보면 놀랍기 그지없다. 겨우 30분짜리 실험에 열두 번 참여했을 뿐인데 완전히 TMS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으니까. 실험 시작 전까지 나는 내 지능과 감각이 불변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실험이 진행될수록 내 생각이 얼마나 짧았는지 깨달았다. TMS를 경험하고 나니, 뭐든 가능하다고 믿게 된 거다. 실험을 시행하는 의사가 전선을 어디에 갖다 대는지에 달렸을 뿐이라고. 연구원들은 벌써부터 후속 연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 내 의견을 조금 보탤 수 있어서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내가 잠깐이나마 경험했던 그 놀라운 통찰력을 다시 한 번 재현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나는 알바로, 린지와 함께 2008년 여름 동안 이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눴다.

첫 연구에서 나는 수동적인 피험자의 역할을 맡았을 뿐이다. 연구원들이 미리 계획한 뇌 부위 자극에 나를 내맡겼다. 하지만 이제는 뭔가 내가 주도하려 했다. 알고 보니, 과학자들은 이미 첫 연구가 간과한 효과들을 측정하려는 후속 연구를 구상 중이었다. 알바로는 이 과정을 신속히 진행해서 내게 실험을 하겠노라고 동의했다. 의사들이 TMS같이 FDA의 승인을 받지 않은 기계를 사용하는 경우, 이를 허가 초과(off-label)’라고 불렀다. 그렇게 후속 연구에서의 내 임무도 정해졌다. 나는 베스 이스라엘 병원의 첫 허가 초과’ TMS 자폐 치료 대상자였다.

나는 연구원들과 함께 TMS 실험실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고는 의자에 앉았다. 린지는 여느 때처럼 전선을 내 머리에 댄 다음 기계의 버튼을 눌렀다. 내 전두엽이 다시 한 번 자극을 받고 있었다. 내 오른쪽 귀의 앞부분이었다. 진동이 내 머리통에 닿는 걸 느끼면서, 나는 무심코 천장을 쳐다봤다. 특별히 뭘 집중해서 본 건 아니었다. 익숙하고도 몽롱한 TMS 자극의 기운이 느껴졌다. 자극을 받는 동안, 나는 평온하게 앉아 있었다. 실험이 끝나자 나는 연구원들에게로 돌아갔다. 연구원들은 이제 내게 새로운 테스트 용지를 건네줬다. 첨부된 눈 사진들을 보고 표정을 읽어내는 시험이었다.

테스트가 다 끝나고 린지, 셜리와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 도중에 나는 그들의 눈을 들여다보는 게 훨씬 쉽고 자연스러워진 걸 깨달았다. 둘 다 내가 그들을 더 똑바로 쳐다본다는 데 동의했다. 평소 같으면 나는 본능적으로 직접적인 눈 맞춤은 피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러지 않았다. 꽤나 놀라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초기 연구에서는 그 효과가 그렇게 빨리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나는 주차장으로 가서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집으로 향했다.

누군가 대화 상대가 있으면 좋을 텐데, 마사는 침대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게다가 TMS가 우리 사이에 골을 만들어서인지, 그녀는 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기분에 대해 대화를 원치 않았다. 대체 이 상태로 어떻게 관계를 유지할까 걱정이 됐다. 하는 수 없이 침실로 돌아간 나는 헤드폰을 끼고 노래를 듣기로 했다. 그런데 노래를 듣는 순간, 지난 4월에 경험한 청각적 투명함이 되돌아왔다. 이번에도 환각은 아니었다. 뭔가 새로운 느낌이었다. 그때 음악이 살아나는경험에서는 노래 가사와 멜로디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함 때문에 그만 울음을 터트리지 않았는가. 정말로 놀라운 감정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같은 일이 반복돼도 울음이 나지는 않았다. 좀 더 차분하고 덜 극적이며, 뭔가 기쁨과 슬픔이 골고루 섞인 총체적인 기분이었다. 게다가 음악과의 새로운 연결성도 느껴졌다.

 

두려움

 

알바로는 TMS의 효과가 언제나 긍정적이지는 않을 수 있다고 경고했었다. 그런데 나는 대체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하고 있었다. 새롭게 떠오르는 문제점들도 확실히 있었다. 우선 삐걱거리는 내 결혼 생활이었다. 그리고 또 내가 한계에 부닥치게 된 건 경제 위기 때문이었다. 그해 여름 내내 경제는 최악이었다. 우리 수리소의 수익도 25퍼센트나 감소했다. 나는 점차 희망을 잃어갔다. 가을이 되어도 상황은 역시 나아지지 않았지만 다행히 더 나빠지지도 않았다. 겨울이 끝나갈 무렵, 나는 삶에 변화가 필요함을 직시했다. 더 이상 마사와 결혼 생활을 이어갈 수 없을 듯했다.

결국 나는 마사에게 집을 나가겠다고 선언하고 말았다. 그해 크리스마스이브 날에 나는 코네티컷 강의 보트 선착장에 차를 몰고 갔다. 그러고는 검은 강물을 바라보면서 차 안에서 한 시간가량 앉아 있었다. 이대로 차를 몰고 강으로 들어가 모든 것을 끝내야 할까? TMS에 그렇게 맹목적으로 뛰어든 건, 나 자신을 개선하려는 이기적인 희망 때문이었다. 결국 그로부터 얻은 진짜 효과는 마사의 우울증을 온 몸으로 느끼게 됐다는 것, 그리고 더 이상 결혼생활을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깨달음이었다. 게다가 경기 침체로 인해 내 사업은 부도 직전이었다. 이전에 권총을 앞에 두고 망설였듯이 이번에도 역시 나는 망설였다. 그저 아픔을 느끼면서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그렇게 하염없이 강물을 바라본 지 몇 시간이 지났다. 강물은 작은 소용돌이와 잔물결을 만들며 흘러갔다. 나는 마침내 차를 후진해 방향을 돌린 다음 선착장을 뒤로했다. 그러고는 어느 작은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나는 쓸쓸히 혼자만의 저녁을 들었다. 식사를 마친 후, 나는 스프링필드로 가서 셰러턴 호텔에 체크인을 했다. 나는 다시 시작해보기로 굳게 다짐했지만 정확히 뭘 해야 하는지는 잘 몰랐다.

그 뒤 마사와 나는 조정이혼을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수리소 사업은 계속 함께 하기로 했다. 이 합의가 잘 지켜지기를 나는 바랐다. 지금까지는 문제없이 잘 진행되고 있다. 이제 나는 스스로가 달라졌다고 믿었다. 내가 어렸을 때 나를 밀어냈던 사회적인 사람들이 이젠 나를 포용해줄 거라고 상상했다. ‘사회성 있는 사람과 재혼할지도 모르는 일이지.’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모든 데이트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상당히 괴로운 일이었다. 이제는 한층 감각이 풍부해졌다지만, 누가 진실한 친구로서 믿을 만하며 나를 도와줄지, 아니면 그 반대일지는 여전히 분간하기 힘들었다.

 

새로운 시작

 

가을이 왔다. 나는 수리소에서 고객이었던 마리팻과 다시 마주쳤다. 마지막으로 그녀와 얘기를 나눈 뒤로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전부 털어놨다. 집에서 나온 것, 이혼 신청을 한 것, 또 셰러턴 호텔에 묵고 있다는 것도. 그리고 이혼 조정이 끝나면 집으로 다시 돌아갈 거라고 말이다. 놀랍게도 마리팻은 자신 역시 남자친구와 막 헤어졌다고 했다. 수리소에 차를 맡기러 올 때마다 그녀는 늘 남자친구와 함께였던 터라, 나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내게 시내까지 차로 태워다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차를 타고 가는 도중에 나는 갑자기 용기를 내서 말했다. “우리는 동갑 아닙니까. 그리고 아직 건강한 편이고. 언제 데이트라도 하면 어때요?”

며칠 뒤, 우리는 한 중식당에서 저녁을 함께했다. 그리고 저녁 내내 즐겁게 대화를 나눴다. 그녀와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공통점이 많았다. 우리 둘 사이는 희망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우리 나이의 커플들은 항상 아이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시험대에 올라 있지 않은가. 마리팻은 자녀가 셋이었다. 다행히 아이들은 우리 관계에 꽤나 긍정적이었다. 내 아들 커비조차 말이다. 마리팻은 틈만 나면 늘 커비와 나 사이의 골을 메워보고자 애쓰기까지 했다. 또 내 어머니와의 관계까지 신경 썼다. 난 그게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다. 마리팻과 나는 그다음 해 여름에 마침내 결혼식을 올렸다.

마리팻의 아이들도 자신들의 삶에 나를 받아들였다. 마리팻의 아들 줄리안은 매일 집에서 나를 도와줬다. 그 애의 형 조도 집에 올 때마다 나를 도왔다. 뉴욕에 혼자 사는 딸 린지는 항상 나를 반겨줬다. 이런 상황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나는 잘 알았다. 재혼 가정 내에서 서로가 반목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봤기 때문이다. 마리팻이 우리 새 가정을 하나로 모아주는 광경은 정말로 놀라웠다. 마리팻과 삶을 함께하고 경기도 서서히 회복돼가자 내 정신도 평온을 되찾아갔다. 2009년의 사건들로 인해 큰 상처를 받았지만, 모든 상황이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수리소 사업도 경기 침체를 극복해냈다. 나는 다시 글쓰기를 시작했다. 또 자폐 관련 과학을 더 깊이 파기 시작했다.

이를 위한 발판은 TMS 연구 직후에 국립보건원의 자폐 연구 제안 검토를 하기로 동의했을 때 마련된 셈이다. 이제 나는 여러 연구 검토 위원회의 일원이다. 그 시작은 자폐 연구원들의 전문 협회인 국제자폐연구학회(INSAR)’를 통해서였다. 이곳에서는 두 위원회에 내 이름을 등재했다. 그 후, 나는 여러 대학에서 자폐에 대한 강의를 하기 시작했다. 여러 학회와 학교들에서도 마찬가지로 자폐 아동으로 성장한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런 일련의 일들은 TMS 연구를 시작하면서 내게 일어났다.

그리고 정말 멋진 일도 있었다. 마리팻은 어느 날 내 강의를 참관하더니, 나와 함께 강의 여행길에 올랐다. 여행 친구로서가 아니라 신경다양성을 지닌 이들과 그 가족들에게 손길을 내미는 파트너로서 말이다. 자폐인으로서의 삶에 대한 공동 워크숍을 열자, 마리팻의 관점을 궁금해 하는 이들이 그녀 주변에 금세 몰려들었다. 마리팻의 첫 발표는 기립박수를 받았다. 그녀는 정말 달변가였다. 청중들이 듣기 원하는 내용을 능숙하게 전달했다. 내가 주로 과학적인 얘기를 했다면, 그녀는 감정적인 부분을 다뤘다. 내 논리적 사고에 그녀의 시각이 더해져 멋진 조화를 만들어냈다. 우리는 둘이 되면서 혼자일 때보다 훨씬 더 큰 힘이 생겼다. 내게는 정말 큰 사건이다. 그리고 지금도 현재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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