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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B급 세계사(김상훈 지음)

by 미건주 2020. 8. 1.

B급 세계사 김상훈 지음 행복한작업실 / 2018년 6월 / 352쪽 / 15,800원

▣ 저자 김상훈


동양과 서양의 문명이 조우하기 전 중대한 사건이 동시간대에 발생했다는 사실에 의문과 호기심을 품
고 역사 공부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한국사와 동양사, 서양사를 구분해서 교육하던 때에 통합적 시각
으로 역사를 기술한 『통 세계사』를 펴내 독자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었다. 이후 기자라는 직업
의 특성을 살려 역사의 현장을 취재하는 형식의 청소년 역사서 『통 역사 신문』, 어려운 중학교 역
사 교과서를 친절하게 풀어 설명한 『교과서가 쉬워지는 통 한국사 세계사』를 펴냈다. 이 외에 『꼬
리에 꼬리를 무는 한국사 인물 이야기』, 『역사 아는 십대가 세상을 바꾼다』 등의 저서가 있다.


▣ Short Summary


역사는 지식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정통으로 역사를 배우고 수많은 역사 서적을 탐독하며 연구 결과
를 내놓는 것은 학자들의 몫이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부터 21세기 정치ㆍ경제를 두루 꿰뚫고, 컴퓨터
처럼 술술 역사 지식을 읊는 것도 역사 전문가의 몫이다. 다시 말해서 그런 일들은 ‘A급’의 역할이다.
여러분의 친구와 동료가 A급 역사가인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역사 이야기로 대화를 주도
할 수 있는 것은 역사를 재미와 교양으로 익혔고, 훌륭한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
다. 여러분도 지적 대화를 주도하고 싶은가? 주변을 돌아보라.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여러분은 이
미 ‘수많은 역사’ 속에 살고 있다. 일상 속 사람들의 탄생 스토리만 알고 그 의미만 파악해도 ‘역사
박사’ 소리를 들을 수 있다. A급과 겨룰 필요 없다. 역사를 즐기고 역사로부터 지혜를 얻을 수 있다
면 B급이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방대한 통사를 심도 있게 공부해서 A급에 도전하려면 그렇게 하라. 다만 재미와 교양의 원천이자 의
사소통의 수단으로 역사를 활용하려면 B급으로도 충분하다. 때로는 우리가 즐겨 먹는 돈가스가 왜 생
겨났는지, 당시 세계사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었는지, 그 세계사의 흐름에서 돈가스가 어떤 의미를 갖
는지 이해하는 것이 더 생생한 역사 공부일 수 있다.
필자는 지금까지 넓은 시야를 강조하는 역사책을 주로 써 왔다. 『B급 세계사』는 한두 번쯤 어디선
가 들어 봤음직한 역사적 사건으로 물건 위주로 55편의 이야기를 담았다. 소소하고 소박한 우리의 일
상 속에 역사의 숨 가쁜 현장이 숨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역사에 대한 지식이 없다고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최대한 역사적 배경을 담아 풀어서 썼다. 이 책을 다 읽
고 나면 역사가 고리타분한 것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회식 자리에서 한번 확인해 보시라.


▣ 차례


CHAPTER 1 우연이 만들어낸 필연
홍수 신화 원조 논쟁은 그만! _ 인류 최초의 홍수 신화와 치수(治水)
피라미드의 오해와 진실 _ 고대의 국가사업과 세계의 피라미드
동서양 철학은 동시에 발전했다 _ 철학 탄생의 시대 배경
스파르타와 아테네에 대한 오해 _ 찬란했던 그리스 문명은 어떻게 무너졌나?
강한 척하려면 선글라스를 써라? _ 선글라스와 안경의 역사
최고의 전투 식량이 정크 푸드가 되다 _ 햄버그의 기원과 유래
지중해에서 시작된 프라이드치킨 _ 수천 년의 역사가 버무려진 음식
프랑스 삼색기, 국기의 표본이 되다 _ 삼색기에 담긴 의미
땅이 없다면 국가가 무색해진다 _ 나라 이름에 담긴 의미
미국이 총기의 천국이 된 까닭은? _ 미국 헌법의 함정
카우보이 원조는 중남미 목동 _ 왜곡된 카우보이의 초상


CHAPTER 2 세계를 움직이는 힘, 욕망
치명적 여인들, 중국을 무너뜨리다 _ 중국 고대사 팜므파탈의 계보
교황령은 정치적 거래의 산물이다 _ 바티칸 시국의 탄생 과정
신이 내린 바람, 그런 게 있을 리가 _ 가미카제와 개신교의 신풍
흡연, 그것은 권력과의 싸움? _ 담배와 권력의 관계
발레는 권력을 극대화하는 수단이었다 _ 루이 14세가 무대에 오른 이유
제국주의 야심으로 시작된 돈가스 _ 역사가 만들어낸 음식들
좌우 이념의 뿌리와 허상 _ 좌파와 우파의 탄생
최초의 흑인 공화국이 탄생한 곳은? _ 라이베리아와 아이티, 착취의 역사
세기의 사랑, 그 진실은? _ 윈저 공과 심슨 부인
잔혹과 열정 사이의 이름, 비키니 _ 현대사를 뒤흔든 두 가지 사건
콜럼버스는 더 이상 영웅이 아니다 _ 콜럼버스에 대한 역사의 재평가


CHAPTER 3 도전과 응전의 하모니
University 명칭은 길드에서 유래했다 _ 초기 대학의 모습
인류 유산을 지켜낸 아랍 문명 _ 중세 시대 아랍의 찬란한 문화
필리핀 세부섬의 지혜로운 역사 대처법 _ 세계 일주와 민족 저항의 현장
통조림은 전투 식량으로 출발했다 _ 필요와 발명의 역사
32년 만에 완공한 작품, 쾰른 대성당 _ 중세와 근대가 결합된 건축물
골드러시(Gold Rush)의 명암 _ 서부 개척 시대와 청바지의 역사
자유의 여신상과 에펠탑은 한 사람의 작품이다 _ 에펠이 세운 두 개의 건축물
전쟁 중에 일어난 크리스마스의 기적 _ 크리스마스 정전에 관한 이야기
대공황과 전쟁이 만든 섬유 혁명 _ 합성 섬유의 탄생
환타가 한때 나치를 상징한 음료라고? _ 코카콜라의 빈자리를 채운 음료
우주 전쟁에 얽힌 이야기들 _ 미국과 소련의 우주 전쟁과 아폴로 눈병


CHAPTER 4 일탈, 폭주 그리고 시대의 광기
광기가 부른 비극, 소년 십자군 _ 십자군 전쟁을 둘러싼 몇 가지 사건들
흑인 슬럼가의 기원은 게토? _ 유대인 차별의 역사
독재자에 대한 조롱, 견공(犬公) _ 삐뚤어진 사랑, 고통 받는 백성들
기요틴과 전기의자 그리고 죽음의 품위 _ 처형의 역사
쓰레기 언론(?)을 위한 변명 _ 프랑스 일간지 <모니퇴르>의 처신
중국과 세계 역사를 바꿔놓은, 단 9표 _ 영국 의회와 아편 전쟁
돈 줄 테니 땅 내놓아라! _ 멕시코-미국 전쟁의 전모
보이콧 그리고 테러 _ 북아일랜드는 왜 독립을 주장하는가
전쟁과 세계사를 바꾸어놓은 한 통의 전보 _ 미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이유
보복의 악순환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_ 히틀러라는 괴물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마지노선은 허세 덩어리? _ 40조 달러짜리 관광 자원


CHAPTER 5 원조와 뿌리를 찾아서
유럽의 정신적 고향, 신화 _ 각 대륙 명칭의 유래
샌드위치에 정치적 음모가 숨어 있다? _ 샌드위치에 관한 재미있는 사건들
먹을 수 있는 고기, 먹지 못하는 고기 _ 왜 이슬람교도는 돼지고기를 멀리할까?
복권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_ 복권의 역사
만둣국에 소주 한잔! _ 만두와 소주의 유래
쓴 죽이 달콤한 초콜릿으로 변신하다 _ 초콜릿의 역사
노란 리본에 담긴 뜻은? _ 동지애, 염원, 기다림 그리고 리본
뉴욕의 원래 이름은 뉴 암스테르담 _ 북아메리카 개척의 역사
서머타임, 육체 혹사일까, 또 다른 기회일까? _ 고대 로마에서부터 시작된 서머타임 제도
소년 병사에서 출발한 보이스카우트 _ 청소년 단체 스카우트의 역사
육지의 섬’ 베를린 _ 베를린 미스터리

▣ 내용요약

CHAPTER 1 우연이 만들어낸 필연


피라미드의 오해와 진실_ 고대의 국가사업과 세계의 피라미드


고대 이집트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가 적지 않다. 그런 영화에 등장하는 단골 장면. 병사들이 노예들
을 잔인하게 채찍질한다, 노예들은 신음하며 거대한 돌덩이를 운반하다가 쓰러진다…….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장면이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기원전 484~기원전 424)는 “노예들을 강제 동원
해 피라미드를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영화의 장면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때로는 상식에 치명적인 왜곡이 개입한다. 이 헤로도토스의 주장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 바
로 그렇다. 이집트 피라미드가 정말로 노예들의 강제 노동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최근 학계에서 이
주장이 틀렸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피라미드는 노예가 아니라, 합당한 급료를 받는 건설 노
동자들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서 남서쪽으로 13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기자란 도시가 있다. 바로 이 기자
의 사막 지대에 여러 개의 피라미드가 있다. 그중 이집트 제4왕조의 2대 파라오인 쿠푸(기원전
2589~기원전 2566 재위)의 피라미드가 단연 돋보인다. 147미터(현재는 137미터 내외) 높이로 만들
어졌고, 밑변의 가로와 세로가 각각 230미터다. 2.5톤의 돌덩이 230만 개가 소요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피라미드다.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 유일하게 현존하는 건축물이다.
이 쿠푸 피라미드를 만드는 데 20여 년이 걸렸다. 최소한 10만 명의 노예가 동원되었을 거라는 추측
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최근 반론이 커지고 있다. 쿠푸 피라미드와 가까운 곳에서 인부들의 마을이
발굴되었다. 그 마을에서 1,000개가 넘는 유골이 발견되었다. 어쩌면 피라미드 건축에 동원된 노예들
의 집단 수용소일 수도 있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유골에서 치료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노예라면 정
성껏 치료할 리가 없잖은가. 영화 장면을 떠올려보라. 노예가 쓰러지면 죽을 때까지 채찍질했다! 아이
들의 유골이 발굴된 점이나 성인 남자와 여자의 유골 비율이 거의 비슷한 점도 흥미롭다.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는 석판도 발견되었다. 그 석판에는 어느 날에 잔치를 열었고 장례식을 열었
으며, 인부가 무슨 이유로 노역장에 나오지 못했는지 등이 기록되어 있다. 쉽게 말해 출결 상황판이
다. 심지어 숙취가 심해 출근하지 못했다는 내용도 적혀 있다. 평범한 건설 노동자의 삶과 다를 바
없다. 노예라면 이런 상황판이 필요할 리가 없고 이런 내용이 담겨 있을 이유도 없다.
최근에는 “모든 피라미드가 왕의 무덤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당시 나일강은
7~10월에 범람했다. 이 기간에 농민들은 생업인 농사에 주력할 수 없었다, 그러니 생계를 꾸리기조
차 힘들었다. 당장 굶어 죽을 판이었다. 고대 이집트의 정치인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고민하다
묘안을 짜냈다. “피라미드를 더 만들자!” 쉽게 말하면 국가가 서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피
라미드 축조 사업을 벌였다는 것이다. 황당한가? 이 또한 근거가 있다.
미국의 한 연구소가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후원을 받아 이집트를 인공위성에서 적외선으로 촬영했
다. 그 결과 땅 속에 묻혀 있는 17개의 피라미드를 찾아냈다. 당시 연구진은 “더 많은 피라미드가 아
직도 세상의 빛을 못 보고 있을 확률이 크다.”라고 했다. 현재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80여 개가 조금
넘는다. 사실 피라미드에 대한 오해가 더 있다. 피라미드는 이집트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전 세계에
서 피라미드가 발견되고 있다. 피라미드가 모두 지배자의 무덤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잘못된 상식이
다. 멕시코의 피라미드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신전이었다. 최대 혹은 최초의 기록은 언제든 깨질
수 있다. 그럴 때마다 인류의 역사는 진실에 한 걸음 더 다가선다.


CHAPTER 2 세계를 움직이는 힘, 욕망


제국주의 야심으로 시작된 돈가스_ 욕망이 만들어낸 음식들


포크커틀릿(pork cutlet). 돈가스의 영어식 표현이다. 미국에 여행 가서 식당을 들렀다 치자. 그 식당
에서 “Don-gas, please.”라고 하면 종업원은 알아듣지 못한다. 혹시 다른 식당에선 돈가스를 팔까?
이런 생각을 하며 돌아다니지 말라. 발만 아플 뿐이다. 애초에 서양에는 돈가스가 없다. 돈가스는 일
본에서 비롯된 음식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즐겨먹는 카레라이스도 비슷하다. 인도의 ‘먹자골목’을 이
잡듯이 뒤져도 우리가 원하는 형태의 카레라이스를 찾을 수 없다. 혹시나 일본식 요리를 파는 곳에
가면 우리에게 익숙한 카레라이스를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돈가스, 카레라이스, 고로케를 일본의 3대 양식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고로케 대신 스키야키를
3대 양식으로 넣기도 한다. 이 요리들은 서양 음식을 바탕으로 하되 일본만의 독특한 조리법으로 재
탄생했다. 그러니 고로케가 크로켓이란 서양 음식과 다르고, 돈가스 역시 포크커틀릿이 아닌 것이다.
1185년 일본에서는 가마쿠라 막부가 출범했다. 일본 최초의 무사 정권이다. 가마쿠라 막부에 이어 무
로마치 막부, 에도 막부(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섰다. 약 700년 동안 일본의 왕(천황)은 왕 구실을 하
지 못했다. 권력은 막부의 일인자인 쇼군이 장악했다. 19세기 들어 에도 막부는 미국의 압력에 굴복
해 문호를 개방했다. 일단 문이 열리자 다른 열강들이 너도나도 일본으로 진출했다. 서양의 문물이
쏟아졌다. 일본 민중의 삶은 고달파졌다. 에도 막부로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결국 막부가 무너졌
다. 권력은 다시 왕에게 넘어갔다. 이 왕이 메이지다. 그래서 메이지 정부라 부른다.
1868년 메이지 정부가 출범했다. 메이지 정부는 서양 열강을 따라잡기 위한 개혁에 돌입했다. 이를
메이지 유신이라 한다. 학교와 공장을 세웠다. 서양식 군대를 양성했다. 리트머스 용지처럼 서양 문화
를 쭉쭉 빨아들였다. 일본은 열강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제도만 개혁한다고 해서 서양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서양인과 비교하면 일본인의 체격은 왜소했다. 정치인들은 일본
이 진정한 열강이 되려면 서양인과 비슷한 수준까지 덩치를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서양 사
람들은 뭘 먹기에 저렇게 덩치가 좋은 것일까……? 메이지 정부는 서양 음식을 면밀히 검토했다. 곧
나름의 답을 찾았다. “오호라! 서양 사람들은 소고기와 돼지고기 같은 육류를 많이 먹는구나.”
쇠뿔도 단김에 빼라 했다. 메이지 왕은 즉각 “앞으로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먹도록 하라!”라는 조서를
내렸다. 없어서 못 먹지, 주기만 하면 득달같이 달려드는 게 고기다. 그러니 ‘왕의 조서를 모두 환영
했겠지’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일본 국민은 이 조서를 반기지 않았다. 의외로 많은 국민이 이 정책
에 반기를 들었다. 왜 그랬을까? 사실 일본 국민은 그 전까지 소고기를 먹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 뿐
만 아니라 육류 자체를 별로 즐기지 않았다. 이유가 있다. 7세기의 일본 40대 천황 덴무는 독실한 불
교 신도였다. 그는 살생을 금했다. 이때부터 일본인들은 육류를 잘 먹지 않았다. 어느덧 1,00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 긴 기간 동안 육류를 즐기지 않는 정서가 일본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 그런
데 갑자기 고기를 먹으라니! 반발이 생기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 극단주의자들은 “고기는 불결하고
영혼을 더럽힌다.”며 저항했다.
메이지 정부는 소고기를 먹일 방법을 연구해야 했다. 의외로 쉽게 풀렸다. 군대의 병사들부터 소고기
를 먹였다. 군대는 상명하복의 질서가 명확한 곳이다. 그러니 병사들은 거절하지 못하고 고기를 먹었
다. 뜻밖의 상황이 나타났다. 막상 먹어보니 맛이 기가 막혔다. 병사들은 제대한 후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소고기 예찬론을 폈다. 서양 문물을 많이 수입하다 보니 이미 많은 서양 요리가 소개되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지배층의 일부만 이 서양 요리를 즐겼다. 이 요리를 일본 사람들이 좋아하도
록 개선할 방법이 없을까? 요리사들은 고민을 시작했다. 물론 정부의 지침이나 명령이 있었을 터다.
일본인은 우리처럼 쌀로 만든 밥을 늘 먹는다. 고기 위주의 식사는 부담스러워한다. 그렇다면 서양과
일본의 식습관을 절묘하게 섞어 쌀밥과 고기를 같이 먹게 하자. 이런 생각에 따라 서양 요리를 바탕
으로 한 일본만의 독특한 음식이 여럿 탄생했다. 대표적인 것이 돈가스, 쇠고기 전골, 카레라이스, 고
로케였다. 소고기 섭취 운동의 결과는 어땠을까? 다들 짐작한 대로 별 효과가 없었다. 물론 영양 상
태가 좋아지면 체격과 체력이 좋아진다. 요즘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체격이 10~20년 전보다 월등히
좋아진 걸 보면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단기간에 그렇게 될 수 있겠는가? 언감생심이다.


CHAPTER 3 도전과 응전의 하모니


골드러시(Gold Rush)의 명암_ 서부 개척 시대와 청바지의 역사


1848년 1월의 어느 날 아침이었다. 목수 제임스 마셜(1810~1885)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제재소의
수차를 점검했다. 수차 밑바닥에서 눈부시게 반짝이는 물질들이 발견되었다. 혹시 금? 마셸은 여러
방법을 동원해 물질의 정체를 탐색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 금이 확실하다! 그것도 순도가 아주 높은
최고급 품질의 금이었다. 이 소식은 제재소의 주인이자 농장주인 존 서터의 귀에 들어갔다. 서터는
기뻐했을까? 사실 난감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이 부나비처럼 몰려올 테
니까 말이다.
서터는 스위스 출신의 이주민이었다. 그가 미국에 정착한 1834년에는 캘리포니아가 멕시코 영토였다.
서터는 멕시코 정부로부터 새크라멘토의 일부 지역을 불하받았다. 서터는 요새처럼 공고한 정착촌을
건설했다. 그 안에서 황제처럼 떵떵거리며 살았다. 그 부귀영화를 잃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쉬쉬한다
고 해서 금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감출 수는 없다. 곧 세상 모두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금이 발견될 무렵 미국과 멕시코는 과달루페-이달고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 따라 캘리포니아는
미국의 영토가 되었다. 가장 먼저 동부의 미국인이 서부로 달려왔다.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이 그 뒤를
이었다. 유럽에서 건너온 사람도 있었고, 심지어 중국에서 넘어온 사람도 있었다. 골드러시다. 1849
년, 인구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이해에만 8만 명 이상이 캘리포니아에 정착했다. 이동 중에 목숨을
잃은 사람도 허다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대이동에 참여했는지 알 수 없다. 미국에서
는 이 사람들을 ‘포티나이너스(49ers)’라고 불렀다. ‘49년도의 사람들’이란 뜻이다.
1860년까지 약 10년 동안 무려 5억 달러 가치가 넘는 금이 채굴되었다, 캘리포니아 인구가 순식간에
급증했다. 1850년대에는 약 1만 4,000여 명이었다. 1860년대에는 38만 명이 되었다. 인구가 늘어나
니 도로가 깔렸고, 각종 시설이 들어섰다. 상인이 늘어났고, 곳곳에 대도시가 생겨났다. 서부 개척 시
대가 화려하게 개막한 것이다. 하지만 서터와 마셜의 운명은 얄궂게 되었다. 서터의 정착촌은 그야말
로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금을 찾아온 사람들은 강가 주변에 진을 치고 망나니처럼 행동했다. 닥치는
대로 땅을 파헤쳤다. 서터는 죽을 맛이었다.
만약 금이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마셜은 제재소에서 평범하게 목수와 농부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하
지만 금이 발견되는 바람에 일터를 잃었다. 마셜은 이곳저곳을 떠돌다 골드러시 열기가 주춤해진
1850년대 후반에 돌아왔다. 다시 농사를 지었지만 성과는 좋지 않았다. 뒤늦게 마셜도 금맥을 찾기
시작했다. 허사였다. 완전히 파산했다. 서터 또한 비슷한 길을 밟았다. 금이 발견되기 전 번창하던 사
업은 망해버렸다. 땅은 누더기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미국 연방 대법원은 서터가 멕시코 정부로부터
받은 토지 문서를 인정하지 않았다. 졸지에 농장을 잃었다. 서터는 죽을 때까지 농장에 대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 금맥은 그의 삶을 불운하게 만들었다.
반면 골드러시 인파에 끼어 서부로 달려온 리바이 스트라우스(1829~1902)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는 금을 캐서 부자가 되지 않았다. 인부들의 작업 바지를 만들어 큰돈을 벌었다. 청바지를 최초로 만
든 인물이 바로 스트라우스다. 스트라우스는 독일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다.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
되기 한 해 전인 1847년, 18세의 나이에 미국으로 이주했다. 모두가 금에 열광할 때 스트라우스는
금에 냉정했다. 그 대신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찾았다. 1850년대 캘리포니아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일확천금을 노리고 이곳에 온 사람들이 묵을 곳이 있었을까? 아니, 설령 있다 한들 그 가난뱅이들이
숙박비를 댈 여유까지는 없었다. 그들은 천막을 세우고, 그곳에서 먹고 자면서 금을 채굴했다. 스트라
우스는 그 인부들이 묵을 천막을 팔았다. 사업이 좀 안정되자 1853년에는 샌프란시스코에 ‘리바이 스
트라우스 & 컴퍼니’를 세웠다. 의류와 관련된 제품을 팔았다. 이를테면 옷에 다는 단추나 버튼, 캔버
스 천 같은 것이었다.
어느 날 스트라우스는 선술집에서 인부들의 작업 바지가 많이 닳아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더 튼튼
하고 질긴 바지가 있다면……. 퍼뜩 새로운 사업 아이템이 떠올랐다. 만약 천막 재료인 캔버스 천으
로 바지를 만든다면? 마침 캔버스 천이 많이 남아돌던 타이밍이었다. 그의 사업 감각은 탁월했다. 이
캔버스 바지가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바지는 재봉사 제이코브 데이비스(1834~1908)가 제작했
다. 인부들은 데이비스에게 “뒷주머니가 헐거워 물건이 자꾸 빠져나간다.”라고 푸념했다. 1872년 데
이비스는 뒷주머니 모서리에 리벳을 박아 넣었다. 청바지 상징처럼 여겨지던 리벳의 첫 등장이다.
스트라우스는 나중에 인디고페라라는 나뭇잎에서 추출한 염료로 옷을 파랗게 염색했다. 또 옷감 소재
를 캔버스에서 더 두껍고 질긴 데님으로 바꾸었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의 청바지가 탄생했다. 1928년
이 회사는 청바지 상표 하나를 등록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까지 청바지의 대명사로 꼽히는 ‘리바이
스’다. 하나의 사건이 이렇게 서로 다른 운명을 만들었다. 현재가 풍족하다고 해도 미래까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끝없는 자기 혁신이 필요한 이유다.


대공황과 전쟁이 만든 섬유 혁명_ 합성 섬유의 탄생


1929년 10월 24일,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모든 주식이 폭락했다. 이날은 목요일이었다. 그래서 사람
들은 이날을 ‘암흑의 목요일’이라 불렀다. 경제가 폭삭 주저앉았다. 정부도 더 이상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 은행과 기업이 도산했고 실업자가 속출했다. 농촌 경제도 무너졌다. 그렇게 미국 공황이 시작
되었다. 미국 공황의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컸다. 전 세계가 몸살을 앓다가 드러눕기 시작
했다. 유럽에서도 공황이 나타났고 아시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 세계적으로 대공황이 시작된 것이
다.
대공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미국은 뉴딜 정책을 시행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식민지를 한데 묶어 블록
경제를 추진했다. 두 나라는 식민지를 착취해 대공황의 위기를 넘으려 했다. 식민지가 상대적으로 적
었던 독일, 일본, 이탈리아는 전체주의의 길로 나아갔다. 특히, 일본은 1930년대를 전후해 아시아-태
평양 일대에서 노골적으로 침략 정책을 드러냈다. 미국은 그런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청산하기 시
작했다. 이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미국에서 실크 부족 사태가 발생했다. 그 전까지 주로 일본에서 실
크를 수입했기 때문이다. 실크 수입량이 크게 줄면서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어올랐다. ‘없으면 그만이
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여성들의 블라우스와 스타킹 같은 생활용
품을 만들려면 실크가 꼭 필요했다. 낙하산, 텐트와 같은 군용 장비를 만들 때도 실크가 필요했다.
게다가 당시 미국 기업들에게는 대공황의 터널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큰 숙제가 있었다. 기업들은 대
공황의 혼란 속에서 기회를 찾고 있었다. 마침 실크를 대체할 섬유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그런 섬유
를 개발한다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돈방석에 앉으면서 완전히 대공황의 터널을 빠
져나갈 수도 있었다. 그러니 이에 대한 연구가 자연 활발해졌다. 화학 제조업체인 듀폰이 뛰어들었다.
이미 듀폰은 내로라하는 화학자들을 영입해 여러 실험을 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인 하버드 대학
교의 화학과 교수였던 월리스 흄 캐러더스(1896~1937)였다. 캐러더스 연구팀은 곧 놀라운 실적을 만
들어냈다. 1935년 캐러더스 연구팀이 마침내 공기, 석탄, 물의 화학적 실험을 통해 새로운 합성 섬유
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합성 실은 양털보다 가볍고 거미줄보다 가늘었다. 하지만 천연 섬유보다 강
했고 탄력성도 좋았다.
듀폰은 1937년에 이 합성 섬유에 대한 특허를 취득했다. 1938년에는 이 합성 섬유의 브랜드를 ‘나일
론(Nylon)’으로 정하고 대량 생산 준비에 돌입했다. 1939년 뉴욕 만국 박람회에서 나일론이 대중에
첫선을 보였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나일론은 전쟁터에서 진면목을 드러냈다. 태평양 전쟁 때는 나
일론이 실크를 대체해 낙하산에 사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텐트, 밧줄, 타이어 등 쓰이지 않는 분야가
없을 정도였다. 나일론은 군수 용품으로도 대박을 쳤다. 그리고 나일론으로 만든 블라우스는 곧 실크
블라우스를 대체하는 명품으로 떠올랐다. 사람들은 “나일론으로부터 섬유 혁명이 시작되었다.”라며 극
찬했다. 만약 대공황이 없었더라면, 그래서 기업들이 뭘 만들어도 다 잘 팔리는 상황이었더라면, 그랬
다면 아마 나일론은 발명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위기를 도전으로 맞설 때 새로운 기회가 찾아온다.
우리 일상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위기를 피하고 있는가, 아니면 적극 맞서고 있는가.


CHAPTER 4 일탈, 폭주 그리고 시대의 광기


중국과 세계 역사를 바꿔놓은, 단 9표_ 영국 의회와 아편 전쟁


1839년 10월, 영국 정부(내각)가 중국과 전쟁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의회의 승인만 떨어지면 당장 중
국으로 함대를 보낼 기세였다. 하지만 의회에선 섣불리 결정을 내지 못했다. 이 전쟁이 온당한 것이
냐는 비판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전쟁은 중국 정부가 영국 상인의 아편을 모두 폐기 처분한
데서 비롯되었다. 중국 정부는 배상할 의지도, 그래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당연한 조치를 취했으니까 말이다. 사실 책임은 영국 측에 있었다.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하는 아
편을 인도에서 구입한 뒤 중국으로 가서 판 것은 분명 비인간적인 처사였다. 당시 영국은 중국과의
무역에서 큰 폭의 적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흑자를 내기 위해 궁리하다 변칙적이며 불법적인 아편 무
역을 자행했다. 하지만 영국은 근본 원인과 책임이 자기네에게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해가 바뀌고 1840년 3월이 되었다. 드디어 의회에서 중국과의 전쟁 여부를 놓고 토론이 시작되었다.
대체로 전쟁을 찬성하는 의견이 많았다. 아시아의 미개한 중국 따위가 감히 세계 최고의 제국에 도전
한 게 거슬렸던 모양이다. 주전파 의원들은 중국을 묵사발을 만들어주자며 흥분했다. 하지만 토론이
길어지면서 반대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4월 10일, 의회 표결이 실시되었다. 표결에 앞서 31세의
초선 의원 윌리엄 글래드스턴(1809~1898)이 연설에 나섰다.
“중국 영토에 있으면서 중국의 법을 따르지 않는 외국인을 처벌한 것이 왜 중국의 죄가 됩니까? 전쟁
을 치른다면 이는 여태껏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부정한 전쟁이며 영국을 불명예로 빠뜨릴 전쟁이 될
것입니다. 이 전쟁에서 우리는 승리할 것이고 이득도 얻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영제국의 명예와 위엄,
존엄성은 크게 추락할 것입니다.”
연설은 감동적이었다. 똑 부러진다. 부끄러운 제국주의에 대한 질타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전쟁
찬성이 271표, 반대가 262표였다. 딱 9표 차이로 중국과의 전쟁이 승인되었다. 바로 다음 달, 영국은
함대를 보내 중국을 공격했다. 예상했던 대로 영국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이 전쟁이 바로 제1차 아편
전쟁(1840~1842)이다. 아편 전쟁에서 패한 중국은 큰 충격을 받았다. 천하의 중심이라 자부했는데
서양 오랑캐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후 유럽 열강의 아시아 침략은 더욱 노
골적으로 변했다. 9표가 아시아 역사, 나아가 세계사를 바꿔놓은 셈이다. 표결 결과에 대해 글래드스
턴의 반응이 흥미롭다. “영국의 양심, 그 무게가 고작 262표였단 말인가!” 그는 자신의 일기에도 이
렇게 적었다고 한다. ‘중국에 저지른 국가적 범죄, 그것에 대한 신의 심판이 두렵다.’
글래드스턴은 자유주의적이면서 양심적인 정치를 하려 노력했다. 그는 이후 정치인으로 크게 성공한
다. 자유당을 이끌며 여러 개혁을 단행했고, 총리 자리에까지 올랐다. 윈스턴 처칠에 버금가는 총리라
는 평가도 받고 있다. 덕분에 ‘위대한 평민’이란 별명을 얻었다. 이 9표는 제국주의가 승리한 부끄러
운 사례다. 내 한 표가 역사를 바꿀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전쟁과 세계사를 바꾸어놓은 한 통의 전보_ 미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이유


제1차 세계 대전은 1910년대 이전까지 인류가 경험한 모든 전쟁 중에서 가장 참혹했다. 적게는 900
만 명에서 많게는 1,00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전 세계의 국가는 59개였다. 이 중 33개
국가가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참전한 인원도 상상을 초월했다. 전쟁터에서 싸운 병사 외에 후
방에서 지원하기 위해 공장에서 일한 노동자까지 포함하면 당시 세계 인구의 50퍼센트 이상이 참전했
다. 그런 제1차 세계 대전은 인류가 단 한 번도 목격하지 못했던 전 세계의 총력전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규모 면에서만 신기록을 세운 게 아니다. 잠수함, 탱크, 전투기, 독가스 등 첨단
살상무기들이 모두 제1차 세계 대전 때 등장했다. 사람을 죽이는 도구를 최대한으로 업그레이드한 전
쟁이었다. 특히, 전쟁을 일으킨 독일의 잠수함 U보트가 맹활약했다. U보트는 독일 해상 전략을 대표
했고, 연합군 함대를 크게 위협했다. U보트는 대서양을 오가는 선박을 닥치는 대로 공격했다. 사실
먼저 해상을 봉쇄한 쪽은 영국이었다. 독일의 전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영국은 독일로 향하는 해상을
봉쇄했다. 물자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려는 작전이었다. 독일은 U보트로 맞불 작전에 나섰다. 독일
의 이 작전을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라 불렀다.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졌을 때 미국은 중립을 선언했다. 대서양 건너 유럽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굳이
휘말리고 싶지 않아서다. 미국의 외교 정책 또한 다른 대륙의 문제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먼로 독트린
이 기본 원칙이었다. 연합군은 미국에 구애의 손짓을 보냈지만 미국은 고개를 돌렸다. 미국이 연합군
의 편에 서지 않은 것은 독일에게 큰 행운이었다. 미국은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런 미국
이 연합군의 편에 서면 골치가 꽤나 아프다. 독일은 미국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조심, 또 조심
했다. 독일로서는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미적거리는 미국을 도발해서는
안 된다. 이 금과옥조를 독일이 깼다. 독일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미국을 향해 ‘뻥’
발을 내지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1917년 1월, 멕시코의 독일 주재 하인리히 폰 에카르트에게 본국으로부터 비밀 전보가 날아왔다. 발
신인은 독일 외무 장관인 아르투르 치머만이었다. 비밀 전보이니 민감한 내용이 들어 있을 터. 영국
정보 당국이 2월에 비밀 전보를 해독했다. 영국 정부는 “만세~”를 부르고 싶었을 것이다. 이 전보를
미국이 보게 된다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떤 내용이었을까?
이 전보를 발신인의 이름을 따서 ‘치머만 전보’라고 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멕시코를 설득해 미국에게 선전 포고를 하게 하라. 그러면 멕시코가 1848년 미국에게 빼앗긴 영토,
즉 텍사스와 뉴멕시코, 애리조나를 되찾을 수 있도록 독일이 돕겠다고 하라.’
영국 정부는 이 비밀 전보를 런던 주재 미국 대사에게 전달했다. 미국 대사는 지체하지 않고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전문을 보냈다. 윌슨 대통령은 경악했다. 사실 윌슨은 웬만하면 먼로 독트린을
끝까지 지키면서 참전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치머만 전보’를 확인한 이상 더는 침묵할 수 없게 되
었다. 미국 정부는 전보 내용을 국민에 공개했다. 이어 1917년 4월 6일 독일에 대한 선전 포고를 의
회가 승인했다. 이렇게 미국은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고, 제 무덤을 판 독일은 스스로 무너지고
말았다. 이 전보를 접한 멕시코 정부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일단 멕시코 정부는 공개적으로 “현실
가능성이 없고, 멕시코가 옛 땅을 돌려받는다 해도 또 다른 문제가 생길 것이다.”라며 제안을 거절했
다. 하지만 멕시코도 꿀꺽 침을 삼키면서 고민했을지 모른다. 제안을 거절한 날짜가 미국의 참전 선
언 후인 4월 14일이었기 때문이다. 쉬쉬하려다 들킨 모양새라는 ‘합리적 의심’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대서양 건너 유럽 대륙에서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고, 바다에선 선박이 격침되어도 꿈쩍 않던 미국이
었다. 자국민이 U보트에 희생되었을 때도 ‘울컥’하기는 했지만 곧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런 미국을 움
직인 게 바로 이 전보 한 통이었다. 미국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제1차 세계 대전의 결과가 달라졌을지
도 모른다. 이 전보 한 통이 세계 역사를 바꿔놓은 셈이다.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낼 때 늘 신중하
자. 특히, 비난과 비판의 메시지라면 더욱 조심하자. 그 메시지가 앞으로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


CHAPTER 5 원조와 뿌리를 찾아서

먹을 수 있는 고기, 먹지 못하는 고기_ 왜 이슬람교도는 돼지고기를 멀리할까?


이슬람교도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이 또한 종교적인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이슬람교 경전인
쿠란에는 돼지가 불경스러운 동물로 묘사되어 있다. “생각하지도, 먹지도, 기르지도 말라.”라고 했다.
돼지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감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경제와 정치가 숨어 있다.
이슬람교가 태동한 아라비아반도는 날씨가 덥고 건조하다. 돼지를 키우기에는 환경이 좋지 않다. 사
람이 먹을 식량도 부족한데, 돼지에게 먹일 여유 식량이 어디 있겠는가? 중동에는 사막 지대가 많다.
물이 심각하게 부족하다. 돼지에게 물을 넉넉히 줄 수 없다. 돼지를 키우기에 이보다 환경이 나쁠 수
없다. 그래도 돼지를 키운다고? 부작용만 나타난다. 비위생적인 환경은 인간의 삶에도 영향을 미친
다. 돼지에서 비롯된 병이 인간에게로 옮아갈 수도 있다. 게다가 날씨까지 더우니 돼지를 도축한 뒤
바로 먹지 않으면 변질될 가능성도 크다. 이러니 돼지고기를 못 먹게 한 것이다. 실제로 쿠란을 보면
돼지고기만 못 먹게 한 것이 아니다. 죽은 고기도 못 먹게 했다. 아무래도 위생과 건강을 염두에 둔
것 같다. 쿠란에서는 닭이나 염소처럼 잡아서 바로 먹을 수 있는 가축만 식용하도록 했다.
바로 이런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이슬람교에서 돼지를 기피하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많다. 이게 진실
일 가능성이 높다. 그 점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이슬람교와 날카롭게 대립하는 유대교에서도 돼
지를 기피한다는 점이다. 구약 성서에도 돼지는 불결한 동물로 묘사되어 있다. 그렇다면 종교를 떠나
중동이란 지역적 특성 때문에 돼지를 기피했을 것이란 분석이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사실 아주 오래
전에는 이 지역에서도 돼지고기를 먹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중동이 건조하고 더운 지역이 아니었으니
까 말이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할랄이 뜨고 있다. 할랄은 이슬람교도가 먹는 음식과 사용하는 제품을 가리키는
용어로, 아랍어로 ‘허용된 것’이란 뜻이다. 이슬람교도들은 먹는 것, 입는 것, 바르는 것에 모두 까다
롭다. 음식의 예를 들자면, 돼지고기가 들어가서는 안 된다. 죽어 있는 고기 혹은 잔인하게 도살된 고
기도 금지! 술과 마약류 성분도 불허한다. 이런 음식들은 하람이라고 하는데, 금지된 음식이란 뜻이
다. 주로 닭고기와 염소고기, 쇠고기가 허용된다. 이런 식용 가축을 도축할 때도 알라에게 기도를 해
야 한다. 또 단칼에 죽이는 이슬람 율법을 따라야 한다.
종교가 다르고 문화가 다른 것이 비난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전 세계의 이슬람 인구가 18억 명이
다. 2020년이 되면 전 세계 인구의 20퍼센트 이상이 이슬람교도가 될 것이란 보고서도 나왔다. 놀랍
다. 아직도 이슬람교의 세력은 팽창하고 있다. 그러니 색안경을 쓰고 봐서는 안 된다. 현실적인 논리
로 생각하자. 그들은 대상으로 식품 사업을 하겠다면 그들이 먹지 못하는 고기가 아니라 먹을 수 있
는 고기로 공략하는 것이 옳다. 혹시 아는가? 그게 우리 경제를 되살리고 활황으로 이어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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