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정소담
칼럼니스트. 매거진 《맥심》에 꾸준히 기고하고 있다. 케이블 방송사 아나운서로 사회생활을 시작했
다. 이후 주간지 기자를 거쳐 뮤지컬, 카레이싱, 장사 등에 도전했으나 소질이 없거나 재미가 없거나
수입이 없거나 셋 다 없거나 하여 대부분 중도에 때려치웠다. 유일하게 그만두지 않은 일이 술 마시
기와 글쓰기인데, 결국 이 두 가지가 삶의 중심이 되었다. 이름이 ‘꿍꿍이’인 리트리버와 같이 살며
꿍꿍이를 키워나가고 있다.
▣ Short Summary
우리 주위엔 눈치 없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 밝은 눈치와 밝은 마음을 가지고 꿋꿋이 오늘을 살아
가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네 인생은 왜 그리 가시밭길”이냐며 힘든 이를 진심으로 위로할 줄도 알
고, 둥근 마음씨로 모난 세상을 품은 채 살아가기도 하고, 주기적으로 연탄 봉사를 기획하거나 국제
커플의 결혼식 사회를 맡았다는 이유만으로 일본어를 열심히 공부하기도 한다. 이들이 있어서 그래도
세상이 아직 그럭저럭 살 만하고, 우리가 곳곳에서 따뜻한 온기를 접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 책에는 눈치와 관련한 63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누구나 알아야 하지만 누구도 쉽게 알려주지
않는 눈치와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를 저자 특유의 거침없는 문체로 흥미롭게 풀어내고 있다. 이 63개
비 성냥이 누군가의 눈치를 밝히고,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하기를 기대해본다.
▣ 차례
1장 왜 그렇게 눈치가 없어요
2장 눈치 수업 직장인반
3장 당신에게 눈치를 선물하고 싶습니다
4장 ‘밝은 눈치’로 세상 비추기
▣ 내용요약
왜 그렇게 눈치가 없어요
윗사람에게 사는 밥
부자, 선배, 윗사람의 공통점은? 바로 꼭 그들이 밥을 사야 한다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돈을
상대적인 개념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재산이 100만 원인 사람의 1만 원은 재산이
1000만 원인 사람의 10만 원과 같은 가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보다 돈이 열 배쯤 많은
사람을 보면 무의식적으로 ‘축의금으로 내가 1만 원 낼 때 너는 10만 원 내야 나랑 똑같은 거지’, ‘내
가 밥을 한 번 살 때 너는 열 번 사야 공평한 거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때가 있다. 돈이 많아서
펑펑 쓰고 사는 사람을 보면 희한하게 그런 착각이 들기도 한다. 저렇게 펑펑 쓰는 사람이니까 나한
테 밥 좀 사줘도 되겠지?
나보다 돈이 열 배쯤 많다는 것. 그 돈을 벌기 위해 나보다 열 배 고생했다는 의미일 순 있어도 나보
다 돈을 열 배씩 써야 한다는 의미일 순 없다. 만 원은 누구에게나 만 원이고 십만 원은 누구에게나
십만 원이다. 헛돈 나가는 게 아깝지 않은 사람, 밥을 사기만 하는 것이 즐거운 사람, 돈이 더 많으니
밥은 언제나 내가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다. 그러니 윗사람에
게 밥을 사야 한다.
그런 한편, 아래 사람이나 후배에게는 여전히 내가 밥을 다 살 필요가 있다. 그래야 두세 번에 한 번
씩은 자기도 밥을 사려고 하는 사람, 상대가 언제나 밥을 사는 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사람
이 누구인지 가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 밥 살 돈이 없는 것은 무죄지만, ‘밥 살 눈치가 없는 것’은 유
죄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넌 포청천이 아니야
- 제주도로 휴가 다녀오려고요.
“왜 제주도에 가. 은근히 볼 것도 없고 물가 비싸서 외국 나가는 거보다 돈도 더 들어. 차라리 그 돈
으로 일본에나 다녀오지.”
- 방콕 가려고요.
“방콕에 왜 가, 차라리 보라카이에 가지.”
- 홍콩 가려고요.
“홍콩에 왜 가, 차라리 대만에 가지.”
그놈의 차라리, 차라리, 차라리. 내가 가겠다는데 말이다. 제주도에 갈까요, 오키나와에 갈까요? 이렇
게 물을 땐 그렇게 말해도 된다. “제주도보다는 오키나와가 낫지.” 방콕이 나을까요, 보라카이가 나을
까요? 이럴 땐 의견을 보태주어도 된다. “보라카이 가는 게 낫지 않겠어?”
어렸을 때 신나게 본 <판관 포청천>의 후유증일까? 시도 때도 없이 평가를 하고 판단을 하고 자기
의견을 펼치는 인간들이 세상엔 너무 많다. 판관 노릇은 맡겼을 때나 해야 하는 것이건만, 왜 눈치도
없이 아무 데서나 개작두를 꺼내는 걸까?
동조까진 바라지도 않으니, 제발 묻지도 않은 판결을 내게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봐라, 저기 눈
치 없는 자들이 있으니 개작두를 대령하라!” 이 한 문장을 마구 외치고 싶어지는 때가 정말이지 너
무 잦은 세상이다.
남에게 전화해도 되는 시간
종종 새벽녘에 전화가 걸려온다. 보통은 술 마신 친구로부터인데, 나 역시 잠 못 들던 날 수차례에
걸쳐 그들에게 새벽 빚을 진 일이 있으니, 그들로부터 걸려오는 불쾌한 전화는 언제든 좋다. 우리 사
이에 전화 걸면 안 되는 시간 같은 건 따로 있지도 않다. 잠들기 전 핸드폰 벨소리를 굳이 무음으로
해두지 않는 것도 그 때문.
문제는 왕왕 찾아오는 불청객들인데, 자고 있던 중이 아니더라도 자정을 넘긴 시간에 친하지 않은 이
로부터 연락이 오면 매번 참 어리둥절하다. 야밤의 카톡 메시지, SNS 메시지, 내일 있을 행사 초대문
자, 심지어 새벽녘에 울리는 전화벨까지. 우리가 ‘남’에게 연락해도 되는 시간은 하루 중에서 몇 시까
지일까?
이 기준은 각자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정을 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상대방이 자든 말든 그건 중요치 않다. 거리가 있는 사이에 자기 용건 얘기하겠다고 자정 넘어 메시
지를 보내는 이들을 보고 있으면 구남친의 “자니?”는 차라리 무죄라고 해야 할까.
그게 싫으면 알람을 꺼두면 된다고들 하지만 최소한의 기본도 지키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내가 먼저
피신하는 게 답이 되어버린 세상이라면 어쩐지 조금 슬프다. 먼저 피해야 되니 피해자인 걸까?
오밤중엔 남의 집에 전화하면 안 된다는 걸 우리는 초등학생 때 배웠다. 그때는 혹시 밤이 가까워진
시간에 전화를 걸게 되면 “안녕하세요, 거기 다인이네 집이죠? 전 다인이 친구 소담이라고 하는데요.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혹시 다인이 있나요?” 하고 말하는 게 모두에게 너무 당연한 일이었는데.
유치원생들도 한 손에 휴대폰을 쥐고 개인 핫라인으로 연락을 주고받고 사는 세상이니 그런 예의를
가르치고 배워야 할 필요도 함께 사라져버린 걸까. 어른을 상대로 ‘남에게 전화해도 되는 시간’ 따위
를 일러주어야 한다는 사실이 종종 슬프다.
공부하기 좋은 나이
나이 서른에 대학원에 입학해 18학번이 되었다. 입학을 앞두고 있던 어느 날, 라디오에서 이런 얘기
를 들었다. “10년이 지날 때마다 학업 능력은 절반씩 떨어진대요.” 지금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냐?
아무튼 학교에 입학한 뒤 ‘공부하기 좋은 나이’란 게 분명히 존재한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되었다.
“공부할 때가 제일 좋은 때여.” “아무 걱정 없이 하루 종일 공부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어릴 땐 어
른들이 하는 이런 말이 다 미친 소리인 줄 알았지. 이런 말들의 의미를 알게 되는 때가 바로 공부하
기 좋은 때다.
공부라는 건 필요에 의해 해야 하는데, 우리들 중 스스로의 요구에 의해 공부를 하는 행운아는 그리
많지 않다.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공부는 당연히 재미도 없고 하기도 싫다. 그런 면에서 이십 대에
대학원에 가지 않은 건 잘한 일이었다. 이십 대에도 대학원 진학을 몇 번이나 고민했는데, 가고 싶은
과가 없어서 관두었다.
밥벌이를 하며 진지하게 공부해보고 싶은 분야가 생겨 대학원에 들어갔고, 학업 의지는 대학 시절의
열두 배가 되었다. 겨우 절반으로 줄어든 학업 능력은 채우고도 남음이 있다.
또 있다. 술 먹을 체력이 달릴 때가 공부하기 좋은 때다.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그 무엇이 됐든 목표
라는 걸 달성하기가 열일곱 배는 어려워진다. 치열하게 노력하며 살 때마다 ‘학생 때 이렇게 열심히
했으면 서울대 갔겠네!’라고 내 스스로에게 말하곤 했지만, 나는 안다. 이렇게 열심히 해도 어차피 술
때문에 지금에 와서도 서울대는 못 간다는 걸.
서른이 되어 술 먹을 체력이 달리기 시작한 건 그런 의미에서 참 다행이었다. 이제는 몸이 힘들어 술
을 그리 많이 마시지 않는다. 어차피 내가 아는 그 물맛이라는 걸 알아서 이제는 절제도 잘한다. 참
으로 공부하기 좋은 시기다.
그렇지만 정말로 공부하기 좋은 나이는 사실 따로 있다. 일하면서 학교에 다닐 수 있을까? 저녁에 수
업 듣기 피곤하지 않을까? 졸업은 할 수 있을까? 논문을 쓸 수 있을까? 입학 전의 고민들은 합격증
과 함께 날아든 등록금 고지서를 보고 난 뒤 강력한 투지로 바뀌었다. 학부 때에도 안 듣던 오전 1교
시 수업까지 세 과목이나 청강 신청을 했다. 힘들 때마다, 아침에 몸이 무거울 때마다 등록금 고지서
에 찍혀 있던 7로 시작하는 일곱 자리의 숫자를 생각한다. 저절로 뇌가 춤을 추기 시작한다.
눈치 수업 직장인반
호기심 지옥
호기심 많은 게 천국처럼 좋은 건 줄 알던 때가 있었다. 그건 아마도 <호기심 천국>이라는 귀여운 제
목의 방송 프로그램이 방영되던 20년 전 즈음이다. 나이 들어보니 누군가의 왕성한 호기심은 타인에
게 지옥을 선사할 때가 더 많더라.
호기심. 새롭고 신기한 것을 좋아하거나 모르는 것을 알고 싶어 하는 마음. 그것이 한 인간에게 쏠리
는 순간을 우리는 경계해야 하는데, 특히 당신이 누군가의 상사라면 고용인에 대한 호기심은 적당히
갖는 것이 좋다. 그리하여 당신이 고용인에게 묻지 말아야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남자 친구 있니? 여자 친구 있니?
결혼할 사이니? 얼마나 만났니? 어떻게 만났니? 어디서 만났니? 주말에 만났니? 어제도 만났니?
부모님 뭐하시니? 부모님과 함께 사니? 형제는 몇이니? 형은 뭐하니? 동생은 뭐하니?
대답하기 싫을 수도 있는 사생활에 관한 거의 모든 것.
당신이 고용인에게 물어야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계좌번호는? 끝.
‘착하다’는 말의 의미
사회생활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세 가지 덕목이 있다. 친절, 호의, 인내. 이 세 가지를 뇌리에 새
기고 절대 금해야 한다.
친절: 사회생활 중 “너무 착하고 친절하신 것 같아요.”라는 말을 들으면 재빨리 위험한 사인으로 받아
들이고 스스로의 모습을 성찰하는 것이 좋다.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면 ‘조만간 이 인간으로
인해 헬게이트가 열리겠구나’ 생각하면 되는데, 이런 예감은 보통 틀리지 않는다.
착하다는 건 영어로는 번역조차 불가능한 단어다. 착하다는 게 대체 뭔데? 사회생활에서 ‘입맛대로
다루기 쉽다’, ‘부당한 대우도 곧잘 참는다’, ‘화를 낼 일에도 화를 내지 않는다’는 말을 대신할 때 주
로 쓰이는 표현이다. 최근에는 ‘품질이나 성능에 비해 싸게 먹힌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이를테면 가
격이 착하다는 식.
인간이란 누울 자리를 봐가며 다리를 뻗는 본능이 뛰어난 존재다. 사회에서 억울한 일, 부당한 일을
당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착하고 친절하다고 소문난 사람들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무엇보다 사회에서
착하다는 평을 듣는 사람이 뛰어난 업무 능력을 가진 것은 거의 본 일이 없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을 두고 착하다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호의: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페이를 받지 않고 하는
일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경력을 위해 할 수 없이 열정 페이를 받고 일하는 사회 초년생들을 두
고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먹고살 만해질수록, 그거 안 해도 충분히 살 만할수록 악착같이 업무와
행위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챙겨야 한다.
월급이 제때 입금되지 않는 것, 정당한 노동에 대해 성의 표시 정도의 임금만을 지불하는 것 등에 대
해 ‘나는 월급이 하루 이틀 늦게 들어와도 큰 상관은 없으니까’, ‘나야 당장 그 돈 없어도 사는 데 지
장 없으니까’ 하며 넘어가주는 나의 너그러움은 월급이 하루만 늦게 입금되어도 발등에 불이 떨어지
는 타인의 성대한 피해로 이어진다. 나의 호의는 그 돈에 생사가 달려 있는 이들에 대한 착취의 수단
으로 악용된다. 배려가 사람을 다 ‘배려놓는’ 것이다. 더 큰 범위에서는 내가 속한 업계의 하향평준화
에 기여하는 셈이 되기도 한다.
인내: 부당한 상황에 대한 인내는 참다 참다 부당함을 밝혔을 때 “그럼 처음엔 왜 참았어?” 하는 공
격으로 되돌아온다. 그때는 왜 참았을까? 뭔가 켕기는 게 있는 거 아니야? 본인도 즐기다가 뒤통수
때리는 거 아니야?
“오랜 시간 동안 고통을 감내했구나.” 하는 상식적인 반응이 아닌, “그때 말하지 대체 왜 이제 와서
터뜨리는 거야?” 하는 비상식적인 의심의 눈초리만 쏟아진다. 선물을 줬다가 나중에 물건 값 내놓으
라고 억지 부리는 사람과도 같은 취급을 받게 된다(자신의 잘못을 참아주는 걸 대가 없는 아름다운
‘선물’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이 세상엔 무수히 많다).
그러므로 부당함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참지 말아야 한다. 참으려거든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겠으
나, 다음에는 묵과하지 않겠다.”는 의사표현을 반드시 해야 한다. 부당함을 참는 것은 본인뿐만이 아
닌 사회 전체의 피해로 돌아간다. 나의 인내는 부당한 것을 참지 않고 지극히 당연한 대응을 한 사람
들에게 “당신은 왜 그리 유난이냐”, “너는 어째서 참을성이 없느냐”는 공격이 가해질 빌미를 제공한
다. 인내력은 더 나은 나의 내일을 위해 소주를 참을 때 쓰는 것이지, 개차반으로 구는 남 앞에서 쓰
는 것이 아니다.
친절, 호의, 인내. 이런 것은 사회에서 뺨 맞고 돌아오면 같이 화내주고 울어주고 술 마셔주는 내 가
족과 친구에게나 베풀어야 하는 게 아닐까. 집 밖에 나가 친절, 호의, 인내 3종을 쓸데없는 곳에 낭
비하지 않으면 내 주변에 더 많이 나눠줄 수 있으니 더욱 좋다. 나는 언제부턴가 ‘착하다’고 소문난
사람들이 곱게만 보이지 않는다. 그들에게서는 ‘선한 얼굴로 사회 전반에 궁극의 민폐를 끼칠 가능성’
이 강하게 엿보이기 때문이다.
편하게 하라는 불편한 말
‘산미치광이’라는 학명을 가진 동물이 있다. 온몸에 길고 뻣뻣한 가시털이 덮여 있는 호저이다. 호저
는 날씨가 추워지면 서로 모여들어 체온을 나누는 습성이 있는데, 그러다 보면 서로의 날카로운 가시
에 찔리고 만다. 쇼펜하우어 선생은 이걸 두고 ‘호저의 딜레마’라고 표현했다. 타인으로부터 따뜻함을
구하고자 하면 타인으로부터 상처받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는 의미. 사회생활에서는 서로의 가시에 찔
리지 않을 거리를 잘 유지하는 것이 특히 중요한데, 그런 의미에서 ‘호저가 가시 꺼내는 소리’로 들리
는 말들이 몇 개 있다.
오빠라고 불러.
언니라고 불러.
말 편하게 해.
불편하니까 말 놓자.
일단 나는 업무적인 관계로 만난 사이에 ‘언니’ 또는 ‘오빠’ 호칭을 쓰는 것이 너무나 불편하다. 언니,
오빠라는 말은 나보다 연장자인 이에게 자동으로 붙일 수 있는 호칭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이와 성장
속도가 대체로 비례하던 학창 시절에는 한두 살 많은 사람을 언니, 오빠라고 부르는 것이 자연스러웠
다. 예컨대 아홉 살짜리의 눈에는 열 살짜리가 진짜 언니 오빠로 보이곤 하는 법이니까. 그러나 내면
의 성장 정도와 나이가 거의 무관해진 시기에 사회에서 만난 사람에게는 넉살 좋게 언니, 오빠, 하는
말이 그리 쉽게 나오지 않는다. 편하게 말을 놓자는 말도 불편하다. 알고 지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이 혹은 업무적으로 교류하는 관계에서는 존대를 쓰는 것이 훨씬 편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밥은 먹었냐?” 하는 것보다 “식사는 하셨어요?” 하고 묻는 것이 편하다. 일을 통해 만난
사이여도 점차 친밀한 관계로 발전해 말을 놓게 될 수는 있는데, 친밀하지도 않은 관계에서 그냥 강
제로 말만 대뜸 놓는 것은 조금도 편하지 않다. 또 친하다고 해서 무조건 말을 놓아야 하는 것도 아
니다. 존대가 오가는 관계에서도 친밀은 충분히 차고 넘칠 수 있는데, 그걸 모르는 사람이라면 친밀
한 관계로 발전하고 싶지도 않다.
존댓말은 영화제 신인상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가능한 시기가 정해져 있는 것이다. 말이라는 건 한
번 놓으면 다시는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존댓말이 오고 가는 상태라는 건 서로의 관계에 딱
한 번 있을 수 있는 소중한 시기인데, 그걸 왜 그리 빨리 내팽개쳐버리려고 하는 것일까?
누군가에게 말을 편하게 하자고 권할 때에는 그것이 나에게만 편한 것은 아닌지 먼저 생각해볼 필요
가 있다. 언니, 오빠라는 호칭의 사용은 나만 상대에게 허락해준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도 잊
지 말기로 하자. 요컨대 네 나이가 더 많아도, 너는 언니 같아야만 언니고 오빠 같아야만 오빠다.
당신에게 눈치를 선물하고 싶습니다
그런 질문은 하지 마세요
- 왜 이렇게 답장을 늦게 해?
그런 질문은 하지 마세요. 이미 답을 알고 있으니까요.
- 왜 연락 안 해?
그런 질문도 하지 마세요. 이유를 모르지 않으니까요.
- 답장 하나 보낼 시간도 없어? 그거 10초도 시간 못 낼 만큼 바빠?
당연히 10초도 없지 않습니다. 그 바쁜 와중에 생긴 잠깐의 여유 동안 당신이 떠오르지 않았을 뿐입
니다. 당신과 메시지를 하는 것보다 담배를 한 대 태우거나 의미 없는 인터넷 기사를 읽거나 페이스
북을 뒤적이거나 콧구멍을 한 번 더 후비는 편이 더 편했을 뿐입니다.
왜 이렇게 답장을 늦게 해? 말하는 순간, 그다음에는 더더욱 답장을 하기가 싫어집니다. 이전에는 여
유가 생겼을 때 당신에 관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면, 그 말을 들은 이후에는 당신에 관해 부담
스런 마음부터 떠오르게 됩니다.
인간관계의 모든 서운함은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 만큼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데에서
옵니다. 왜 답장을 늦게 하느냐는 말도, 왜 그때 했던 말을 까맣게 잊었느냐는 말도, 내가 보고 싶지
않느냐는 말도 결국엔 “내가 너를 좋아하는 만큼 왜 너는 나를 좋아하지 않느냐”는 말과 같습니다.
그 물음엔 답이 없습니다. 상대도 나도 답을 알지 못하는 문제입니다. 내가 상대를 좋아하는 만큼 상
대가 나를 좋아하지 않아서 생기는 내 마음의 상처는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니지만, 굳이 따지자면 내
가 좋아하는 만큼 그 사람도 나를 좋아하도록 만들지 못한 내 자신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그냥 그렇
게 생각하기로 하면 조금 편해집니다.
고백해도 되는 순간
매력적인 여성을 보며 사람들은 생각한다. 저 여자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고백을 받아봤을까? 그러
나 여자의 미모와 고백 받은 빈도는 그다지 폭발적인 비례 관계에 놓여 있지 않다. 생각해보자. 남자
가 사귀자는 고백을 하는 때는 언제일까. 사랑에 빠졌을 때? 아니다. 여자가 오케이를 할 것 같은 때
다.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한 일정 기간의 줄다리기가 오간 뒤, 네 맘도 나와 같구나, 사귀자고
하면 나랑 사귀겠구나, 어느 정도 확신이 들 때 남자는 고백한다. 요컨대 누울 자리 보고 다리 뻗는
법이다.
게다가 초식남의 세상이 아닌가. 차일 위험을 듬뿍 안은 채 단지 반했다는 이유로 여자에게 대시하는
무모한 남자는 많지 않다. 초식남의 세상이 됐어도 사귀자는 고백은 여전히 주로 남자의 몫이긴 한
것 같다. 그런데 고백이 온전히 남자의 몫이었던 적도 실은 별로 없다는 사실.
남자들은 자신이 고백할 타이밍을 스스로 ‘선택’해 고백한다고 생각하지만, 당신의 고백 타이밍은 여
자 쪽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여자는 ‘이제 사귀면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면 다양한 방법으
로 남자의 고백을 유도한다. 이제 사귀자고 말해도 돼, 하는 사인을 보내는 것인데, 앞서 썼듯 여성이
보낸 무언의 사인으로 인해 ‘고백하면 받아주겠구나’ 싶은 느낌을 받은 남자는 그때 고백한다.
그러니 매력적인 여자가 셀 수 없이 많은 남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을 수는 있겠으나 그들이 전부
그녀에게 고백한 것은 아니다. 나는 관심 없는 남자가 나를 좋아할 때 남자가 나에게 고백하지 않도
록 도와주곤 하는데, 그건 사실 남자가 아닌 나 자신을 위해서다. 거절이라는 것. 당하는 쪽이 기분
나쁜 건 물론이겠지만 하는 쪽으로서도 별로 유쾌한 경험은 아니다. 그냥 네가 별로여서인데, 지금은
연애할 생각이 없다는 둥 너라면 더 좋은 여자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둥 이 말 저 말 예의상 지어내기
도 귀찮고, 어쩐지 미안하기도 하고, 이래저래 불편하다.
그래서 여자는 마음에 없는 남자가 나를 좋아할 때, 온 힘을 다해 그가 내게 고백하지 않도록 돕는
다. ‘네가 고백해도 난 절대 안 받아줄 거란다’, ‘난 너에게 관심이 없단다’ 하는 사인을 지속적으로
보내는 것이다. 그냥 “넌 아니야!” 하고 말로 하면 피차 편하겠지만, 남자가 고백하기도 전에 거절할
순 없는 노릇이 아닌가. 게다가 앞으로도 계속 봐야 할 상대라면, 거절의 사인을 보내는 건 참 중요
한 법이다.
경험이 어느 정도에 이르면 ‘상대에게 고백 유도하기’의 역으로 ‘상대가 고백 못 하게 하기’쯤의 스킬
은 저절로 익히게 된다. 굳이 배우려고 애쓴 것도 아니지만, 그냥 자전거 타듯 자연스럽게 몸이 익히
게 된다. 대부분의 남자들 역시 적당한 거절 신호를 받으면 더 이상 선을 넘지 않는다. 그래서 별 탈
없이 일상은 흘러간다.
그러나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 X가 Y에게 사귀자고 고백했다가 차였다는 유의 말은 너무나 들려오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의아하다. 차일 상황인데 고백은 왜 했을까? 좋아한다는 고백이야 거절을 염두
에 두고도 할 수 있지만, 교제에 관해 거절당할 고백이란 건 애초에 해서는 안 됐을 고백인데…….
부디 고백이 완전한 나의 자유라고 생각하지 말자. 거절당하면 내 속만 쓰릴 거라고 생각하지 말자.
해도 된다는 일말의 사인 없이 내뱉는 고백은 때때로 타인에게 민폐가 될 수도 있다. 고백해도 된다
는 사인이 떨어졌을 때 그때가 바로 고백해도 되는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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