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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400년 전, 그 법정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다나카 이치로 지음)

by 미건주 2020. 7. 29.

400년 전, 그 법정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다나카 이치로 지음 사람과나무사이 / 2018년 8월 / 270쪽 / 16,000원

▣ 저자 다나카 이치로


고베 시에서 태어나 고베 대학교 문학부를 졸업했으며, 도쿄 대학교 대학원 이과계 연구과 석사 과정
을 수료했다. 「근대 유럽의 특허제도 기원과 기술혁신 연구 - 1474년 베네치아 특허법 성립을 중심
으로」라는 긴 제목의 학술논문으로 가나자와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전공은 과학기술사
다. 니혼 대학교 이공학부 조교수로 일했으며, 이후 가나자와 대학교 이학부 자연과학 연구과 교수로
도 재직했다. 2012년에 가나자와 대학에서 정년퇴임했으며, 현재 명예교수이자 가나자와 의과대학 초
빙교수로 활동하며 집필에 전념한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관한 일본 최고 전문가이자 인정받는 학
자로, 『갈릴레오 비호자들의 그물 속에서』를 비롯한 과학사 서적을 다수 집필하고 번역 출간했다.


▣ 역자 서수지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지만 회사생활에서 접한 일본어에 빠져들어 회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일본
어를 공부해 출판 번역의 길로 들어섰다. ‘나는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가 삶의 좌우명으로 더 많은
책을 읽고 알리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책을 읽고 옮긴다. 옮긴 책으로 『세계사를 바꾼 10가지 약』,
『당신이 잔혹한 100명 마을에 산다면?』, 『소수는 어떻게 사람을 매혹하는가?』, 『유럽 사상사 산
책』, 『백곰 심리학』(2010년 문화관광부 추천 우수교양도서), 『처음 시작하는 그리스 신화』,
『세상 끝의 아이들』, 『어쩌다 너랑 가족』, 『천국 마일리지』 등이 있다.


▣ Short Summary


1633년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니콜라 코페르니쿠스를 지지하며 지동설을 주창했다는 죄목으로 로마
교황청의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재판을 받았고, ‘무기한 투옥’이라는 형벌을 선고받았다. 이튿날 바로
감형되기는 했지만, 이상하리만치 엄격하고 가혹한 이 판결을 두고 오늘날까지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어떤 이는 ‘명백히 잘못된 재판’이라 규정했고, 또 어떤 이는 ‘갈릴레오가 누명을 썼다’고 주장
했다. 또 다른 어떤 이는 ‘로마 교황청과 갈릴레오, 둘 다 잘못이 없다’는 양시론까지 펴고 있다.
‘과학과 진실을 탄압하는 가톨릭교회와 로마 교황청에 맞서 싸우다 감옥에 갇혀 신음하는 영웅적 과
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라는 슬로건은 18세기 철학자 볼테르를 비롯한 계몽주의자들에 의해 하나의
신화로 완성되었으며, 나폴레옹도 그 열렬한 신봉자 중 하나였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과학을 탄압하
는 가톨릭교회와 로마 교황청에 용감히 맞서 싸운 영웅이었을까? 또 그는 오늘날 평범한 초등학생도
알 정도로 유명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을 실제로 했을까?
이 책은 로마 교황청의 서고에서 잠자고 있다가 운명적으로 세상에 공개된 갈릴레오 재판 기록에 근
거해 집필된 것으로, 400년 전, 위대한 천문학자ㆍ물리학자ㆍ수학자이며 독실한 가톨릭교도였던 갈릴
레이를 피고인으로 이단 심판을 벌인 그 법정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살펴본다. 당시 재판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잘못된 재판이나 누명으로 비난받을 소지가 있는지도 살펴본다.


▣ 차례


저자 서문
1 갈릴레오를 사랑했던 나폴레옹
2 종교재판
3 은밀하게 다가오는 위기
4 서막 - 1616년 종교재판
5 『천문대화』
6 재판 개시
7 제1차 심문 - 1632년 4월 12일
8 제2차 심문 - 1632년 4월 30일
9 제3차 심문 - 1632년 5월 10일
10 판결
11 “그래도 지구는 돈다”
주요 등장인물
저자 후기
주요 참고문헌

▣ 내용요약

갈릴레오를 사랑했던 나폴레옹

1798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로마를 침공했다. 나폴레옹은 교황 비오 6세의 퇴
위를 촉구하고 로마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이후에도 프랑스군의 로마 점령은 간헐적으로 되풀이되
었다. 급기야 1810년에 나폴레옹은 로마 교황청에 보관되어 있던 모든 문서를 몰수해 프랑스로 이송
하라고 명령했다. 프랑스에 도착한 문서의 양은 총 3,239상자, 책으로는 10만 2,435권에 달했다. 당
시 특히 중요하게 여겨진 갈릴레오 재판 기록은 별도로 운송되었고, 나폴레옹은 갈릴레오 재판 기록
을 책으로 엮어 출간하려고 했는데, 그는 과학적인 진보를 저해한 가톨릭교회의 무지몽매함을 대중에
게 낱낱이 알리기 위한 도구로 갈릴레오 재판 기록을 활용할 속셈이었다.


바티칸 문서의 매각: 1811년 3월 바비에르는 파리에 도착한 갈릴레오 재판 기록을 프랑스어로 번역
해 출간하기 위한 7,000프랑의 예산안을 나폴레옹에게 제출했고, 나폴레옹은 승인했다. 이후 본격적
인 번역ㆍ출판 작업이 시작되었고, 아홉 개의 문서가 프랑스어로 번역되었다. 그중 하나가 교황과 이
단 심문소의 추기경을 위해 작성한 1615년부터 1633년 5월까지의 재판 기록을 요약한 문서인데, 이
는 이 책에서 주로 다루는 1633년 재판 당시 사무관이 작성한 문서다. 그런데 프랑스어 번역은 마무
리되지 못했고, 결국 출간은 좌절되었다. 1814년에 나폴레옹이 실각하고 엘바 섬으로 유배당했을 뿐
아니라 번역을 가로막는 또 다른 걸림돌(난해한 줄임말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뒤 프랑스에서 왕정복고가 이루어지고, 1814년 4월 루이 8세는 바티칸 문서를 모조리 돌려주겠다
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는 부분적으로밖에 성공하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프랑스 정부가 운송에
드는 막대한 비용을 부담하지 않으려고 꼼수를 부렸기 때문이다. 바티칸 문서 중 이단 심문소의 집회
의사록, 이단 심문소에서 위탁한 도서 검열 판정, 금서목록은 모두 로마로 돌아갔다. 그러나 황당하게
도, 그 이외의 문서 중 상당수는 운송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폐지업자에게 헐값에 팔아치웠다.


갈릴레오 재판 기록의 행방: 우리가 문제 삼아야 할 문서는 갈릴레오 재판 기록이다. 1814년 11월
바티칸 비밀 문서 보관소 소장 가에타노 마리니는 왕실 담당 대신인 피에르 루이 장 카지미르 드 블
라카스 백작에게 갈릴레오 재판 기록을 돌려달라고 요청했다. 블라카스 백작은 당시 프랑스 왕립 도
서관장이던 바비에르에게 문의했고, 얼마 후 관련 문서를 소장하고 있다는 답장이 왔다. 이에 블라카
스 백작은 마리니에게 갈릴레오 재판 기록을 발견해 반환할 준비가 되었다는 답장을 보냈고, 마리니
는 부랴부랴 백작의 저택을 방문했지만 만나지 못했다. 1815년 2월, 편지 왕래를 거듭하고 마리니를
몇 번이나 헛걸음치게 한 블라카스 백작은 마리니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 따르면, 국왕 루이 18
세가 갈릴레오 재판 기록을 읽고 싶어 하여 문서는 지금 국왕의 서재에 있고, 국왕이 다 읽고 나면
즉시 반환하겠다는 약속도 언급돼 있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1815년 3월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해 파리로 입성했고,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갔다. 마리니는 새롭게 왕실 담당 대신으로 취임한 프라델 백작에게 갈릴레오 재판 기록을 돌려
달라고 또 한 번 편지를 썼다. 11월이 되어서야 프라델로부터 서고를 이 잡듯 뒤졌으나 찾지 못했다
는 답장이 돌아왔다. 로마 교황청은 갈릴레오 재판 기록을 되찾으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교황은
마리니를 파리로 다시 파견해 수색 활동을 재개하도록 지시했다. 1817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마리니
의 모든 노력은 헛수고로 끝났다. 하는 수 없이 마리니는 모든 걸 포기하고 빈손으로 로마로 돌아가
야 했다.
그 후 블라카스 백작의 미망인이 빈에 있던 교황 사절에게 전갈을 넣었다. 서신에는 깜짝 놀랄 내용
이 담겨 있었다. 세상을 떠난 남편의 서재에서 갈릴레오 재판 기록을 발견했다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1843년의 일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갈릴레오 재판 기록은 바티칸 문서고로 돌아왔다. 루이 18세는
정말로 갈릴레오 재판 기록을 읽고 싶어 했을까? 블라카스 백작은 또 무슨 목적으로 문서 반환을 거
절했을까? 이 점에 대해서는 자세한 사정을 알 길이 없다.
1811~1814년 사이에 갈릴레오 재판 기록에 접근할 수 있었던 소수의 사람이 있었다. 덕분에 완결되
지는 못했으나 프랑스어 번역이 이루어졌고, 그 시대에 갈릴레오를 가톨릭교회와 맞서 싸운 ‘영웅’으
로 간주하는 움직임이 두드러졌다. 즉 그때 ‘감옥에서 신음하는 영웅적 과학자 갈릴레오’라는 선명한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날조’된 종교재판이라는 신화가 18세기에 완성되었다.
나폴레옹은 그 신화의 열렬한 신봉자 중 하나였고, 그 신화는 현대인의 고정관념을 형성하며 ‘갈릴레
오와 기톨릭교회와의 대립’, 혹은 ‘과학과 종교의 투쟁’이라는 이미지로 이어졌다고 추정된다.


은밀하게 다가오는 위기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564년 2월 15일 토스카나 대공국의 피사에서 태어났다. 그는 1581년 피사 대
학교 의학부에 입학했으나 3년 반 만에 중퇴하고 피렌체로 돌아와 아르키메데스의 저서에 의지해 역
학 연구에 전념했다. 그리고 독학한 성과를 책으로 펴냈다. 1586년에 『작은 천칭』을, 이듬해에는
『고체의 중심에 관하여』를 출간했다. 갈릴레오는 이러한 역학 연구를 인정받아 1589년 피사 대학
교의 수학 교수로 취임했고, 1592년 파도바 대학교로 이적한 후 위대한 발견을 이룩하게 된다.
천문 관측을 시작하다: 1609년 말 즈음, 갈릴레오는 달에 있는 산과 골짜기를 발견했다. 그리고
1610년 갈릴레오의 망원경은 목성으로 향했고, 목성에 위성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시데레우
스 눈치우스』라는 책에서 관측 결과를 발표했다. 갈릴레오는 목성의 위성에 ‘메디치의 별’이라는 이
름을 붙이고, 『시데레우스 눈치우스』를 출간한 직후 이 발견을 메디치 가문의 영광으로 돌렸다. 그
덕분에 그는 토스카나 대공 직속 수석 수학자 겸 철학자로 고향인 토스카나 대공국에 금의환향했다.
피렌체 시절, 갈릴레오는 더욱 중요한 발견을 했다. 1610년 12월, 금성이 달과 마찬가지로 차고 이지
러짐을 반복한다는 금성의 위상 변화를 발견한 것이었다. 게다가 관측을 계속하면서 금성이 차오르며
작아지고 이지러지며 커진다는 사실도 추가로 밝혀냈다. 이 현상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서 움직이지
않고 태양을 포함한 모든 천체가 그 주위를 돈다고 생각하는 천동설로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한편
태양이 우주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는 지동설에서는 금성은 지구에서 보면 태양 너머로 움직이면서 점
점 멀어지고 작아지며 차오른다. 반대로 태양과 지구 사이에 오면, 크기는 커지지만 차츰 이지러진다.
갈릴레오는 프라하에 머물던 토스카나 대사 줄리아노 데 메디치에게 “금성은 필연적으로 태양 주위를
돌고 수성과 다른 행성도 마찬가지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관측을 바탕으로 금성의 위상 변화는
지동설을 뒷받침하는 탄탄한 증거라고 믿게 되었다. 1611년 3월, 갈릴레오는 자신이 발견한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짐을 꾸려 로마로 출발했다. 예수회가 설립한 로마 기숙학교는 갈릴레오를 받아주었
고, 흔쾌히 망원경으로 천문 관측을 실연할 기회까지 주었다. 예수회 측에서도 비록 해석은 완전히
일치하지 않았지만, 그가 발견한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인정해주었다.


지동설을 확신한 갈릴레오 / 『성서』와의 모순: 갈릴레오는 예수회 신부들뿐 아니라 로마의 유력자
들까지 자신의 발견을 인정하자 크게 고무되었다. 그런 배경 속에서 그는 점점 더 지동설에 대한 확
신을 굳혀갔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성서』에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태양이 지
구 주위를 돈다고 해석할 수 있는 구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갈릴레오 역서 『성서』의 해석에 감히
도전했을 때 생기는 위험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갈릴레오가 아무리 신중하게 처신해도
그의 천문학상 발견이 알려지며 온갖 반론이 들끓었다.


카스텔리 앞으로 보낸 편지: 갈릴레오에게 서서히 불운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사건의 발단
은 갈릴레오 자신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1613년 12월 12일에 그의 제자이자 피사 대학교 교수였던 베
네데토 카스텔리가 제공했다. 어느 날 카스텔리는 토스카나 궁전에서 열린 조찬회에 초대받아 참석하
게 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담소를 즐기던 자리에서 어쩌다 메디치의 이름을 붙인 별 이야기가 나왔
다. 카스텔리 딴에는 스승인 갈릴레오의 업적을 알릴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동석한 피사 대학교 교수였던 코시모 보스칼리아가 지구의 운동은 『성서』의 말씀에 반한다
고 지적하고 나섰다.
이 토론은 독실한 신자였던 토스카나 대공 코시모 2세의 어머니인 크리스티나 부인의 관심을 끌었고,
그녀는 카스텔리에게 질문했다. 카스텔리는 스승의 의견을 대변해 크리스티나 부인을 설득하려고 애
썼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제자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갈릴레오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 자신
의 생각을 전했다. ‘먼저 대단히 신중하게 건넨 크리스티나 부인의 질문에 대해서는…… 『성서』에
는 거짓이나 실수가 없다고 하더라도 『성서』를 해석하는 사람이나 설명하는 사람 중에는 때로 실수
를 저지르는 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하며 흔히 저지르는 실수는, 『성서』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데 집착해 이런저런 모순뿐 아니라 중대한 이단이나 모욕이 발생하기도 합니
다.’
갈릴레오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해석했을 때 생기는 오류의 한 예로 「여호수아기」를 다음과 같이
든다. ‘ 「여호수아」의 구절을 고찰해보기로 합시다. ……즉 여호수아의 기도로 하느님이 태양을 멈
추고 낮을 길게 하셨기에 그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고 가정하고 적대자들에게 양보하기로 합시다.
……이 구절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세계관이 틀렸으며,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
며, 다시 말해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옳았음을 명명백백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갈릴레오는 천동설을 채용하더라도 「여호수아기」와 같은 상황에서는 지구는 자전하지 않기 때문에
태양을 포함한 평소 천체 운행은 천구 전체의 일주운동에 따르며, 태양의 독자적인 움직임과는 무관
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태양 그 자체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1년에 걸쳐 12개의 별자리를 따라 이동
한다. 그러므로 태양의 움직임을 멈추면 도리어 일몰 시간이 빨라진다. 이런 맥락에서 『성서』는 천
동설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논리적으로는 그의 말이 옳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이 편지로 금단의 영역에 들어서고 말았다. 감히 건드려서는 안 되는 『성서』의
해석이라는 위험한 영역에 발을 들인 갈릴레오에게 위기가 닥쳤다. 그는 한술 더 떠서 코페르니쿠스
지동설 지지를 확실하게 표명했다. 갈릴레오도 자신의 편지가 남의 손에 넘어가리라는 상황 정도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런 터라 편지 사본이 공공연히 나돌자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갈릴레오는 이단죄로 검사성성에 기소된 이듬해인 1616년 6월 같은 취지의 편지를 크리스티나 부인
에게 보내는데, 이 편지는 ‘크리스티나 대공비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으로 갈릴레오 갈릴레이 연
구자들에게 알려졌다. 이 편지에서 갈릴레오는 제자인 카스텔리에게 보낸 편지보다 상세하게 “감각적
경험 또는 필연적 증거가 우리의 눈과 지성 앞에 제시해주는 자연학상의 결론이 『성서』에 아주 단
편적으로만 기술되어 있는 경우, 그 결론이 『성서』의 기술과 다르기에 감각과 이성을 부정해야 한
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라고 단호한 어조로 주장을 펼치고 있다.


서막 - 1616년 종교재판


고발: 1615년 2월 7일, 니콜로 로리니 신부가 「카스텔리에게 보내는 편지」 사본을 로마로 보내고,
갈릴레오가 이단 사상을 신봉하고 있다고 검사성성에 고발했다. 3월 19일, 예전부터 갈릴레오 비난
선봉에 섰던 카치니가 검사성성에 증인이 되겠다고 신청했다. 이튿날 증언대에 선 카치니는 “코페르
니쿠스의 지구는 움직이고 일주운동도 한다. 그리고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두 가지 명제는 교황
들이 설명하는 『성서』와 신앙과 모순된다. 우리는 신앙에 따라 『성서』에 포함된 말씀은 진실이라
고 믿어야 한다고 배워왔다. ……피렌체에서 널리 퍼진 세간의 의견에 따르면 갈릴레오는 『성서』에
반하는 코페르니쿠스의 의견을 믿으며 옹호한다”라고 고발했고,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인으로
페르디난도 히메네스 신부와 갈릴레오의 제자이자 피렌체 유지인 지아노초 아타반티의 이름을 거론했
다.
11월 13일이 되어서야 겨우 히메니스 신부가 피렌체의 이단 심문관에게 심문을 받았는데, 그는 갈릴
레오의 학생들이 코페르니쿠스 명제와 하느님의 본성을 논하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그들의 의견인지 갈릴레오 자신의 의견인지 알 길이 없다”고 말했다. 자신도 같은 주제
로 아타반티와 토론한 적이 있지만, “모든 것은 토론을 위한 토론이었다”라고 진술했다.
다음 날, 아타반티가 심문을 받았다. 그는 “나는 갈릴레오의 제자가 아니다. 갈릴레오가 코페르니쿠스
학설에 따라 지구는 그 중심 주위를 돌고 전체로서도 움직인다. 태양도 그 중심 주위를 움직이지 전
진하지는 않는다고 말한 걸 들은 적이 있다. 이는 로마에서 출간된 「태양흑점론」이라는 제목의 편
지에도 있다”라고 진술했다. 또 하느님의 본성에 대해서는 “내가 히메네스 신부님과 이야기를 나눈
적은 있지만, 이 논의는 어디까지나 토론형식으로 이루어졌고 공부를 위한 과정이었다.” 라고 말했다.
이렇게 하여 카치니의 증언은 전해들은 이야기를 짜깁기한 데 불과하다는 결론으로 사태는 일단락되
는 듯했다.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믿는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모두 오해에서 빚어진 고발임이 증언으로
밝혀졌다. 오늘날이었다면 재판을 지속할 이유조차 없겠지만, 불행히도 재판은 끝나지 않았다.


지동설 검열: 모든 절차는 극비리에 진행되었다. 하지만 갈릴레오는 로마에서 자신에 대한 재판이 진
행되는 중임을 전해 들었던 모양이다. 그는 로마로 가서 자신의 이단 혐의를 풀고 코페르니쿠스의 정
당성을 보여주겠다는 생각을 품기 시작했다. 11월 말, 갈릴레오는 로마로 출발했다. 갈릴레오는 집필
중이던 「조수 간만에 대한 논의」라는 지구의 운동을 긍정하는 논고를 로마에서 탈고해 갓 추기경
자리에 오른 오르시니에게 바쳤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안토니오 케렌고가 알레산드로 데스테 추기경
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갈릴레오는 “그를 무자비하게 공격하는 열다섯 명에서 스무 명의 적들과
맞서 싸우며” 논의를 거듭하고 있었다. 갈릴레오의 행동과는 별개로 종교재판은 진행되고 있었다.
1615년 말, 검사성성은 심의를 계속 진행한다. 모두 열한 명의 신학자로 이루어진 고문단으로 특별위
원회가 꾸려졌고, 다음과 같은 답신이 1616년 2월 24일에 제출된다. ‘검열되어야 할 명제 - 첫째 태
양은 세상의 중심이며, 한 치도 움직이지 않는다. 검열 전원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명제에 대한
발언은 모두 철학적으로 무지하고, 부조리하며, 공식적으로 이단으로 간주된다. 둘째 지구는 세상의
중심이 아니며, 움직이지 않고, 전체로 일주운동을 한다. 검열 전원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명제는
철학적으로는 같은 판정을 받아, 신학상의 진리에 관해서는 적어도 신앙상 오류가 있다.’


훈고(訓告): 1616년 2월, 교황 비오 5세는 특별위원회의 답신을 받아 검사성성 집회에 갈릴레오를 소
환한다는 결정을 알리고 집행을 명령했는데, 바티칸 비밀문서고에 소장된 문서에는 사건의 경위가 다
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벨라르미누스 추기경 예하께서 갈릴레오를 소환해 상기 추기경 예하, 도
미니코회 검사성성 총주임인 로디의 세기치 신부 앞에서, 갈릴레오와 교황 성하와 전(全) 검사성성의
이름으로, 태양이 세상의 중심에서 움직이지 않고, 지구가 움직인다는 상기 의견을 전면적으로 포기
하고, 앞으로는 구두로든 문서로든, 어떠한 형태로도, 그러한 생각을 품거나 가르치거나 옹호해서는
안 된다고 명하셨다. 만약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면 검사성성은 갈릴레오를 재판에 세울 것이라고 엄
중히 경고하셨다.’ 이 금지 명령에 상기 갈릴레오는 동의하고 기꺼이 따르겠다고 약속했다.


『천문대화』


평온한 나날 속에 점점 커져만 가는 위험: 벨라르미누스 추기경의 경고를 받고 나서 갈릴레오는 한동
안 몸을 사리며 천문학에 관한 발언을 애써 삼갔다. 그런데 ‘혜성 출현’으로 이는 무너졌다. 1618년
가을에 혜성이 세 개씩이나 연거푸 출현하자 오스트리아의 레오폴드 대공이 그에게 자문했기 때문이
다. 갈릴레오는 1619년에 자신의 견해를 제자인 마리오 귀두치의 이름으로 『혜성에 관한 논의』로
정리해 출간했다. 이에 대해 예수회 오라치오 그라시 신부가 『천문학과 철학의 균형』이라는 책을
출간해 반박하고 나섰다. 그러자 갈릴레오가 실명으로 『분석자』라는 책을 1623년에 출간해 도전장
을 받아들였다. 『분석자』는 혜성뿐 아니라 다방면에 걸친 내용을 다루었다.
다행히 이 책이 출간될 무렵 마패오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어 우르바노 8세가 되었다.
갈릴레오는 린체이 아카데미 회원들의 조언에 따라 부랴부랴 새 교황에게 바치는 헌사를 작성해 제목
에 바르베리니 가문의 문장인 세 마리 벌 그림까지 찍어 헌상했다. 교황은 갈릴레오가 보낸 『분석
자』에 매료되어 식탁에서 낭독했을 정도다. 한편 카스텔리는 수력학 전문가로 교황령에서 치수 사업
에 참여했는데, 스승을 위해 여러모로 힘써주었다. 또 제자 덕분에 갈릴레오는 1626년부터 교황의 두
조카의 가정교사로 로마에 살게 된다. 상황은 급작스럽게 갈릴레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돌아갔다.
갈릴레오는 이제 걱정할 일이 없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다음 그는 다시 연구에 전념하고
싶어 했다. 그는 현안이었던 ‘조수 현상’을 주제로 다루는 책 집필에 몰두했다. 이 책은 『천문대화』
라는 제목으로 1632년에 출간되는데, 그의 계획은 오르시니 추기경에게 증정한 「조수 간만에 대한
논의」를 확장해 조수 간만과 지구의 운동을 관련지어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이 책이 지동설,
특히 지구의 공전과 자전을 전제로 삼는 것은 논리적으로 당연했다.


『천문대화』출간: 갈릴레오는 새 책을 로마에서 내고 싶었다. 1630년 5월이 되어 갈릴레오는 로마로
떠났다. 로마에 도착한 갈릴레오는 출판을 허가받기 위해 여기저기 분주히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도
니니코회 소속 라파엘로 비스콘티 신부는 6월 16일에 갈릴레오에게 낭보를 전한다. ‘장관 신부가 인
사를 보내와 그 책이 마음에 드니 다음 날 아침 교황 성하와 책 표지 그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예
정이라고 하십니다.’
갈릴레오는 교황과의 알현을 윤허받았으며, 프란체스코 바르베리니 추기경에게 성찬식 초대까지 받고
만족해서 피렌체로 돌아갔다. 그러나 갈릴레오가 로마를 떠난 10개월 후에 갈릴레오의 후원자였던 체
시(Cesi) 백작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이후 사태는 급물살을 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페스트
가 창궐하며 문제가 복잡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5월 로마 방문에서 얻은 『천문대화』출판 허가는 잠
정적이라 정식 출판 허가는 추가로 이루어질 수정을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대부분의 본문 검열은 피
렌체 이단 심문관 에디지에게 맡겨졌고, 토스카나 대공을 섬긴 에디지는 인쇄 허가를 내주었다.
1632년 2월 『천문대화』는 1,000부를 인쇄했다. 나중에 문제가 되지만 표지 그림 뒤에 출판을 허가
했던 다섯 명의 이름이 들어갔다. 그중에는 피렌체의 이단 심문관 에디지뿐 아니라 피렌체 출판을 허
가할 권한이 없었던 검사성성 장관 리카르디의 이름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22일 갈릴레오는 토스카나
대공에게 책 한 권을 헌상한다. 5월 말에는 친구 피에트로 마갈로티에게 책 여덟 권을 맡겨 인편으로
로마로 전했는데, 이 책들은 추기경 프란체스코 바르베리니, 검사성성 장관 리카르디, 로마 주재 토스
카나 대사 프란체스코 니콜리니, 조반니 참폴리, 토마소 캄파넬라, 검사성성 고문 로도비코 세리스토
리, 로마 기숙학교 교수 레온 산티 손에 들어갔고, 마지막으로 마갈로티 자신이 한 권을 가졌다.
그런데 7월 25일이 되자, 리카르디로부터 에디지 앞으로 폭풍 전야를 예고하는 편지가 보내졌다. ‘갈
릴레오의 책을 받아 보았습니다. 탐탁지 않은 부분이 몇 곳 보입니다. 교황 성하께서는 무슨 수를 쓰
더라도 수정하시기를 원합니다. 우선 그분은 책을 압수하고, 앞으로 수정해야 할 부분을 보내지 않는
한 피렌체에서 책을 내서는 안 된다, 하물며 외국에 보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셨습니다.’


교황의 진노: 1632년 9월, 교황과의 알현에서 토스카나 대사인 니콜리니가 『천문대화』는 정식으로
허가를 얻어 인쇄에 들어갔다고 반론하자 교황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갈릴레오)와 참폴리는 파렴치
하게 나를 기만했다. 특히 참폴리는 뻔뻔하게도 갈릴레오는 교황 성하가 명하신 바를 모조리 따를 생
각이며, 모든 것이 순조롭다고 말했다. 이것이 내가 아는 전부이며, 책을 본 적도 읽은 적도 없다.’


재판 개시


이단 심문소 소환: 특별위원회가 작성한 보고서를 바탕으로 소집된 1632년 9월 검사성성 총집회에서
갈릴레오를 로마의 이단 심문소로 소환하라는 결의가 내려졌다. 갈릴레오 주변 사람들은 그의 로마
소환을 막으려고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1633년 1월 1일, 교황의 단호한 명령을 전하는 교황의 동생
안토니오 바르베리니 추기경의 다음과 같은 편지가 에디지에게 도착했을 때 갈릴레오는 자신이 쓸 수
있는 모든 패를 다 내놓은 후였으므로 더는 로마행을 거부할 수 없게 되었다. ‘검사성성은 갈릴레오
가 그에게 내려진 로마로 오라는 명령을 조속히 이행하지 않았음을 심각한 죄로 간주한다.’ 갈릴레오
는 1633년 2월 13일 로마에 도착했고, 두 달이나 대기한 후인 4월 9일이 되어서야 니콜리니에게 심
문 개시 통고를 받았다. 그동안 니콜리니는 사태 파악을 하느라 나름대로 분주했다.


1차 심문 - 1632년 4월 12일 / 2차 심문 - 1632년 4월 30일 / 3차 심문 - 1632년 5월 10일
위대한 과학자 갈릴레오가 검사성성에 출두하기 전 니콜리니는 그에게 충고했다. 니콜리니는 토스카
나 대공국 총리 안드레아 촐리에게 아래와 같이 보고한다. ‘재판을 조속히 마치기 위해 그에게 다음
과 같이 충고했습니다.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지 말고, 그들이 지구의 운동이라는 특정 문제로 그의
믿음을 바꾸어 놓으려거나 종용하려고 애쓰면 거스르지 말고 복종하라고.’


심문 개시 / 예상치 못한 전개: 4월 12일, 마쿨라노의 심문은 검사성성 검찰관이던 카를로 신체리가
동석한 가운데 형식적으로 시작되었다. 질문은 라틴어로, 답변은 이탈리아어로 기록되었다. 심문은 계
속 이어졌고, 이야기는 1616년 갈릴레오가 로마를 방문했을 때로 옮겨진다. 그러다가 심문은 갑자기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난데없이 1616년의 세기치의 금기 명령이 튀어나왔다. 갈릴레오는 당연히
기억에 없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의 핵심은 가설로서는 품을 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는 벨
라르미누스의 증명서와 ‘어떠한 형태로든 품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한 세기치의 금지 명령 중 어느 쪽
을 채택할지에 달려 있다. 이후 이어진 실제 재판 경위를 생각하면, 갈릴레오는 벨라르미누스 추기경
에게 받은 증명서의 효력을 과대평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심문은 1616년에 내려진 명령을 리카
르디에게 전해 들었는지로 옮겨 갔다.
제1차 심문 결과는 마쿨라노에게 예기하지 못한 것이었으며, 또한 의도하지 않은 것이었으리라. 피고
는 죄를 고백하고, 총주임은 그 결과를 검사성성의 추기경 집회에서 보고하면 임무를 완수했을 터다.
일반적인 종교재판에서 탈선이 있었다고 한다면 갈릴레오의 언동이 탈선을 부추긴 셈이다. 피고는 무
죄를 주장하고 검사성성이 그 존재를 몰랐던 벨라르미누스의 증명서까지 끄집어내며 사태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이단 증거를 찾아 - 고문위원회: 갈릴레오가 이단죄를 인정하지 않았기에 어떤 의미에서 재판은 원점
으로 되돌아갔다. 검사성성은 세 명의 고문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위원회를 발족시켰다. 한 해 전 가
을에 설치한 특별위원회는 말하자면 교황의 사적 자문기관이라는 위치였다. 새롭게 꾸려진 위원회는
『천문대화』에 인쇄 허가를 내준 경위를 조사해 재검열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실질적으로 갈릴레
오를 고발한 사람은 교황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위원회의 보고로 갈릴레오가 기소당했기에 형
식적으로는 새 위원회가 고발인이었다. 이번 고문위원회는 검사성성에서는 공적 기구로, 『천문대
화』내용을 꼼꼼하게 재조사하고 이단 증거를 찾아내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리고 1632년 4월 30
일 2차 심문이, 1632년 5월 10일 3차 심문이 진행되었다.


판결


1633년 6월 22일, 갈릴레오는 산타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에 세워졌다. 관례에 따르면, 그는
참회를 위해 흰옷을 입어야 했다. 재판은 관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거의 정해진 절차대로 진행해
판결을 확정했다. 위태로운 갈릴레오 앞에 판결문이 낭독되었다. 판결문 서두에 검사성성 추기경 열
명 모두의 이름을 기재하고, 판결 본문이 이어진다. 우선, 1616년 사건을 서술한다. 나, 피렌체 출신
빈센초 갈릴레이의 아들, 70세 갈릴레오는, 1616년에 본 검사성성에 고소되었다. 특정한 이들이 가르
친 잘못된 학설, 즉 태양은 세상의 중심에서 움직이지 않고, 땅은 움직이며 일주운동을 한다는 학설
을 진실로 간주하고, 이 학설을 가르친 제자를 두고 같은 학설을 주제로 독일 수학자들과 서신을 교
환했고, 동 학설을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태양 흑점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편지를 인쇄했으며,
『성서』에서 근거를 찾아 나에게 가해진 반론에 『성서』를 임의로 해석해 답변했다.
갈릴레오의 유죄 사유는 1616년에 세기치에게 받은 금지 명령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다. 또 그는 벨
라르미누스의 온건한 명령마저 위반했다고 지적받았다. 벨라르미누스의 증명서에 지동설이 『성서』
에 어긋난다는 기술이 있었음에도 ‘개연성 있는 주장’, 즉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정식 절차에 따라 내려진 출판 허가는 허위 신고에 기초했기에 검사성성의 과실이 아니라 모든 책임
은 갈릴레오 자신에게 있다. 판결문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판결 주문이 들어 있다.
‘나의 이 중대하고 유해한 잘못과 위반이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도록, 또 내가 앞으로 보다 신중해지
고 유사한 다른 죄를 범하지 않는 본보기로 내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대화』를 공식 포고로 금지할
것을 명한다. 우리가 바라는 기간, 당 검사성성의 정식 감옥에 투옥할 것을 명한다. 잘못을 뉘우칠 수
있도록, 앞으로 3년 동안, 매주 한 번, 일곱 차례 참회 시편 암송 의무를 부과한다. 형벌과 참회 기간
동안 일부를 경감하고, 변경하고, 혹은 철회할 권한은 우리가 보류한다.’ 이 판결문도, 이단 내용에
대한 설명, 검사성성에서 이루어진 심의 내용, 그리고 최후 방면과 권고와 형벌이 있고, 검사성성이
앞으로 판결을 변경할 권한을 보류한다는 문장으로 끝맺는다.


이단 포기 선서: 판결이 내려진 후, 갈릴레오는 이단 포기 선서를 했다. 이 이단 포기 선서는 검사성
성이 미리 준비한 서류로 갈릴레오가 직접 작성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형식적인 부분은 차치하고, 이
이단 포기 선서를 근거로 갈릴레오가 본심에서 이단죄를 인정했다고는 할 수 없다. 한편 그날 밤 갈
릴레오는 검사성성 내에 구류되었으나, 다음 날 바로 감형되었다. 그는 감옥에 갇히는 대신 메디치
가문의 저택에 연금당하는 처분을 받았다. 니콜리니가 26일에 본국으로 보낸 “갈릴레오에게 내려진
형은 이미 트리니티 데이 몬티 정원으로 송치 또는 추방으로 변경되었다”라고 보고한 사실로도 충분
히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다. 토스카나 대사관저와는 별도로 로마의 트리니티 데이 몬티 거리에는 메
디치 가문의 거대한 별채가 있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갈릴레오는 메디치 가문의 저택으로 이송되었다. 니콜리니의 노력 덕분에, 7월 초순에는 지인이었던
시에나 대주교 아스카니오 피콜로미니의 관리하에 연금되었다. 피렌체 근교의 아르체트리에 있는 자
택에는 그보다 반년 후에나 돌아갈 수 있었다. 한편 유죄 판결을 받고도 갈릴레오의 연구에 대한 열
정은 좀처럼 식을 줄 몰랐다. 갈릴레오는 아르체트리에서 만년의 저작 『새로운 두 과학』을 완성했
다. 1636년의 일이었다. 책의 내용은 지상의 역학으로, 천문학 관련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
검사성성이 내린 처분, 즉 외부인을 불러서도 안 되고 찾아온 사람과 대화를 나누어서도 안 된다는
조건은 이후 완화되었다. 최초로 갈릴레오 전기를 집필하게 되는 빈센초 비비아니, 진공을 발견한 사
람으로 알려진 에반젤리스타 토리첼리가 한집에 살며 조수로 갈릴레오의 과학 연구를 도왔다. 아르체
트리는 갈릴레오의 마지막 보금자리가 되었고, 그는 1642년 1월 8일에 영면에 들었다.
한편 갈릴레오에게 내려진 판결문은 종교재판 관례에서 크게 벗어나 이탈리아 방방곡곡의 이단 심문
관과 유럽 각지의 궁정에 파견된 교황 사절에 전달되었을 뿐 아니라, 철학과 수학 교수 모두에게 전
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1633년 7월 9일, 피렌체 이단 심문관 에디지는 안토니오 바르베리니에게
분부대로 다음 주 중 모두 지체하지 않고 실행하겠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엄중한 판결 내용과는 달리 실제 처벌은 교황이 예정했던 수준에 근접했다. 판결에서 내린 형
의 무게와 실제 처분에는 괴리가 있었다. 판결에서는 중벌을 내리라는 측에 양보해주고, 나중에 자신
의 권한으로 처음에 예정했던 수준으로 경감해주려 했던 교황의 의중이 반영된 결과였다. 그래서 갈
릴레오의 판결과 그가 실제 받은 처분은 교황의 타협 산물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갈릴레오가 재판 결과에 순순히 승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해주는 일화가
남아 있다. 재판 직후에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혼잣말했다는 이야기다. 너무나 유명해 그 발언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경우조차 드물다. 로마 교회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진실을 꿋꿋이 주장했던 영웅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라는 이미지를 굳히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대사다. 우리는 이 대사가 어떻
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전해졌는지 검토해야 한다.
이 일화는 토리노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장기 체류했던 주세페 바레티가 1757년에 출간한 『이탈리아
도서관』에서 갑작스럽게 튀어나온다. 책에는 “그 유명한 갈릴레오는 지구가 돈다고 말해 6년간 조사
를 받고 고문을 당했다. 그는 자유의 몸이 되자마자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내려다보고 발을 구르며
말없이 생각한다. 지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래도 돈다고 말했다”는 문장이 등장한다(정확히는
‘지구’라는 주어는 없다). 일단 갈릴레오가 “6년간 조사를 받고 고문을 당했다”라는 주장은 사실과 다
르다. 말 그대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표현도 옳지 않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그대로 믿기에는 의문
이 남는다.
또 비슷한 일화를 전하는 책이 있는데, 수도원장이라는 저자명만 있는 익명의 인물이 1761년에 프랑
스어로 집필한 『문학 논쟁』이라는 책이다. 그 책에는 “자유의 몸이 되자 갈릴레오는 곧장 자책감에
사로잡혔다. 그는 땅바닥을 내려다보고, 발을 구르며 말했다. 그래도 돈다.”라는 구절이 실려 있다.
이 일화를 전해주는 두 권의 책 모두 18세기 중반에 출간되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미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으로 태양 주위를 도는, 지구를 포함한 여러 행성의 운동이 설명되었고, 누구에
게나 지동설이 확고한 진실로 받아들여졌다. 이와 같은 과학의 발전을 배경으로 삼아 18세기부터 갈
릴레오는 기독교와 싸운 영웅으로 숭배받게 되었다. 어쨌든 갈릴레오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혼
잣말했다는 이야기는 18세기 유럽 사람들의 소망을 반영해 몽매한 가톨릭교회에 항거하며 진실을 주
장하고 과감하게 싸웠던 영웅 과학자에게 어울리는 일화로 널리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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