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최시선
충북대를 졸업하고, 한국교원대 대학원에서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동안 중ㆍ고등학교 교사, 장
학사와 교감을 거쳐 지금은 충북 진천 광혜원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이다. 오랫동안 붓다의 가르
침을 공부하며 교육의 문제를 고민해 왔다. 청소년단체 ‘파라미타’를 지도하며 붓다의 가르침을 실천
했다. 저서로 『청소년을 위한 명상 이야기』, 『학교로 간 붓다』, 『소똥 줍는 아이들』 등이 있다.
▣ Short Summary
청소년은 미래의 주역이다. 지금의 청소년을 보면 미래 사회를 알 수 있다. 청소년이 올바르고 건강
하게 자라야 나라의 희망이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많이 힘들다. 공부, 성적, 이성교제,
친구관계 등으로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그 결과 삶의 방향을 잃고 헤매고 있다. 최근 부산과
강릉에서 벌어진 여중생 집단폭행 사건은 청소년 일탈 행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게임 중독이나 가출, 학업 중단, 음주와 흡연 등도 심각하다.
나의 관심사는 문제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 해결책을 내놓는 데에 있다. 이를 위해 수없이 고민
하고 번민하였다. 어디서 그 해결책을 찾을까. 다행히 우리 인류 역사에는 훌륭한 스승이 있었다. 중
국의 춘추시대에 어려운 시대를 구하겠다고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훌륭한 가르침을 편 공자가 있었고,
중동에서는 유대에서 예수가 탄생하여 그 시대 도탄에 빠져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으며, 마호메트 또한 그랬다.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가 탄생하여 허름한 옷차림으로 아테네 시
장을 누비며 청소년들에게 진리에 대한 무지를 깨우쳤다.
인류의 스승들은 암울한 시대에 오로지 인류를 구제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온몸을 바쳤다. 그들을 따르
는 제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그 가르침은 제자들에 의해 전수되었다. 그들은 종교를 창시하거
나 학문과 철학의 큰 흐름을 형성하기도 했다. 한편, 인도에서는 붓다가 탄생했다. 붓다는 ‘진리를 깨
달은 분’이란 뜻으로, 다른 스승들과 좀 다른 면이 있다. 오로지 인류를 구제하고야 말겠다는 일념은
같지만, 그 접근방식이 매우 독특하다.
첫째는 한 나라의 왕자로 태어나서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고 출가라는 형식을 취했다. 둘째는 사람들
에게 끊임없이 ‘깨달음’을 강조했다. 셋째는 대단히 인간적인 가르침을 폈다. 넷째는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온유하게 갔다. 천수를 다하고 아주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마지막으로, 맨발로 탁발 걸식
을 하며 제자들을 가르치고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었다.
붓다는 45년간 긴 전도 여정을 마친 후, 쿠시나가라의 조용한 숲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에 제자
들과 세상에게 이런 작별 인사를 남겼다.
사랑하는 나의 제자들아.
너희들 스스로에게 의지하고 진리에 의지하라.
너희들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등불로 삼아라.
이 밖에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마라.
모든 것은 덧없나니, 게으름 피우지 말고 부지런히 공부하라.
나의 가장 큰 관심사는 그분의 교육적 가르침이다. 붓다의 가르침은 실로 놀랍다. 붓다의 눈으로 보
면 모든 사람이 어리석은 중생이지만,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는 자비의 미소가 넘쳐흐른다. 왜냐하면
청소년은 미완의 붓다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 대한민국 청소년들이 올바르게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특히 참을성 없는 학생에
게는 인욕을, 집중하지 못하는 학생에게는 명상을, 자는 학생에게는 진정한 배움을, 흡연하는 학생에
게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폭력을 행하는 학생에게는 자비의 마음을, 자살을 꿈꾸는 학생에게는 자신
의 보배로움을, 선생님에게 대드는 학생에게는 스승의 위엄을 배우고 깨닫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 차례
01 내가 만드는 나
02 세상을 비추는 등불
03 아름다운 삶을 위한 지침
04 좋은 마음, 좋은 인연
05 함께 배워 가는 길
06 배움의 실천, 더없는 행복
▣ 내용요약
내가 만드는 나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의미
나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 심각한 고민에 빠진 적이 있다. 집이 시골이라서 방학 때만 되면 도시의 자
취집에 있는 책 보따리를 싸서 시골로 옮겨야 했다. 시골 집 한구석에 책을 챙겨놓고 가끔 부모님 일
을 도왔다. 공부한답시고 방에 하루 종일 틀어박혀 있다가도 부모님과 형제들의 눈치가 보여 어쩔 수
없이 밭에 나가 일을 돕거나 풀을 베어 오기도 했다.
30도가 넘는 어느 여름 날, 부모님은 밭에 팥을 심으러 가자고 했다. 그것도 그냥 밭이 아니라 담배
밭을 헤집고 다니면서 그 고랑에 팥을 심는 일이었다. 한낮이 되자 이마에서는 구슬땀이 흐르고, 숨
이 차오며, 허벅지가 터지도록 아프고, 마침내는 발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담배 잎사귀에서
풍겨 나오는 독한 냄새며, 살겠다고 꿈틀거리며 흙 속에서 기어 나오는 굼벵이도 나를 괴롭혔다.
‘도대체, 이게 무어란 말인가. 이 시간에 공부를 하면 얼마나 좋을까. 도시에 사는 아이들은 학원이다
과외다 야단들인데 도대체 나는 이 시골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
다. ‘왜 하필이면 나는 이 시골에서 태어났을까? 저 힘겨워하는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형제들을 보
라. 어떤 사람은 부모 잘 만나 호의호식하는데 나는 어째서 이런 부모님을 만났을까? 저 고생하는 시
골 아줌마들은 하루 종일 일해서 무엇을 얻는 것인가?’
이런 생각에 빠져서 팥 심는 일을 멈추고 그냥 밭에 나왔다. 도랑가에 가서 얼굴을 씻고 산속으로 들
어가 나무 밑에 누워버렸다. 얼마나 피곤했던지 눕자마자 그냥 잠에 빠져들었다. 한참을 자고 난 후
일어나 보니 하늘이 캄캄하고 비가 올 듯했다. 벌써 저녁이 된 것이다. 그때 자식을 애타게 찾는 어
머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리며 얼싸안았다. “다시는 일 시키지
않으마. 너는 공부만 해라. 공부 열심히 해서 출세해라, 응?” “그래요, 어머니. 저는 공부를 해야 돼
요. 공부하고 싶어요. 공부를 해야 이런 시골에서 벗어난단 말입니다.” 나는 이렇게 외치면서 어머니
의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드리고는 깡마른 당신을 부둥켜안았다.
그때의 일은 항상 기억에 새롭다. 한때의 신세타령이었는지는 몰라도 나에게는 너무도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존재에 대한 물음, 아무런 철학적 배경도 없이 그냥 현실에서 던져진 물음은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였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 왜 하필이면 이런 시골에서 태어났을까? 그리고 왜 나의 부모
님은 하필이면 농부란 말인가?’ 하는 매우 본질적인 질문들이었다.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한 답을 주지
못했다.
청소년기에 누구나 한 번쯤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물음을 던진다. ‘도대체 나는 어디서 왔는가? 어머
님의 뱃속에서 나온 것이 사실인데 그 이전에는 어디에 있었는가?’ 하고 말이다. 서양의 기독교적 사
고로 본다면 ‘나’의 생명은 신이 내려준 선물일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신비적이고 초월적이다.
붓다는 이에 대하여 어떤 답을 내릴까. 붓다는 그런 고민을 하기 전에 일단 “지금의 자신으로 태어났
음에 감사하라.”라는 일침을 놓는다. 삼천대천세계(붓다는 우주의 한량없는 크기를 이렇게 표현하였
음)의 온갖 생명 중에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붓다는 『사십이장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이 죽어서 비록 악도에 떨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다시 태어날 때 사람의 몸을 받기가 어렵고,
사람의 몸을 받았다 하더라도 건강한 사람으로 태어나기 어렵고, 건강한 사람으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좋은 집안에 태어나기 어렵고, 좋은 집안에 태어났다 하더라도 진리의 세계를 만나기는 더 어렵다.
붓다는 『금강경』에서 우주 삼라만상의 생명 있는 것들을 사생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태생(胎生), 난
생(卵生), 습생(濕生), 화생(化生)이 그것이다. 태생은 일반적인 포유류로, 사람이 가장 대표적이다. 하
지만 태어나는 것은 사람뿐이 아니다. 동물의 세계를 보라. 그 천문학적인 수를 어찌 몇십억도 안 되
는 사람의 수로 뭉뚱그릴 수 있겠는가? 사람은 포유류 중에서도 아주 조그마한 부류에 속한다.
난생은 알로 태어나는 조류, 물고기 등을 말한다. 이 같은 생명은 포유류보다 많아서 어떻게 헤아릴
길이 없다. 습생은 습한 데서 자라는 지렁이나 벌레 등을 말하고, 화생은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변하여 생기는 것을 말하는데, 그 숫자를 센다는 것은 해변의 모래알을 헤아리는 것과 같다.
그 수많은 생명 중에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사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수백 번 자신을 찬탄해야 할 일
이다. 부잣집에서 태어났거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거나, 도시에서 태어났거나 시골에서 태어났거나,
건강한 사람으로 태어났거나 몸이 불편한 사람으로 태어났거나, 사람으로 태어났음에 감사해야 한다
는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에 의하면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그만큼 전생에 좋은 업을 지었기 때문이다. 업
(karma)이란 생명이 살아가기 위해 하는 일체의 행위를 말한다. 생명 있는 모든 존재는 업을 짓는다.
업은 행위이기 때문에 모종의 에너지를 발생하게 된다. 예를 들어, 욕을 하면 욕한 파장이 남는다. 이
파장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저장 창고에 차곡차곡 쌓인다.
이와 같이 쌓인 것을 ‘업력’이라고 한다. 이 업력에 따라 다음 생명이 결정된다. 지렁이는 지렁이 업
을 지었기 때문에 지렁이로 태어난 것이고, 소는 소의 업을 지었기 때문에 소로 태어난 것이다. 마찬
가지로 사람은 사람의 업을 지었기 때문에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업 짓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기에 사람으로 태어나기가 어려운 것이라고 붓다는 가르친다.
사람은 주로 세 가지 업을 짓는다. 몸으로 짓는 업, 입으로 짓는 업, 생각으로 짓는 업이 그것이다.
업은 그 질에 있어서 좋은 업, 나쁜 업,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는 업이 있다고 하였다. 붓다는 사람
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좋은 업을 지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즉, 몸으로 좋은 일을 행하고, 입으로 좋
은 말을 해야 하며, 생각으로는 좋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몸으로 폭력과 살생 등 나쁜 행동을 하고, 입으로 거짓말, 폭언, 아첨 등 나쁜
말을 하고, 생각으로 증오, 시기, 질투 등 나쁜 마음을 품는가 말이다. 어쩌면 좋은 업을 짓는 사람보
다는 나쁜 업을 짓는 사람들이 더 많기에 다른 생물에 비해 사람의 수가 훨씬 적은 건 아닐까?
윤회의 가르침
붓다는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윤회한다고 가르쳤다. 윤회(輪廻)란 태어나고 죽는 과정이 반복되는 것
을 말한다. 윤회하는 이유는 업을 짓기 때문이다. 생사가 되풀이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업인 것이다.
따라서 업을 짓지 않으면 태어날 이유도 없고 죽을 이유도 없다. 업이 완전히 소멸한 상태가 바로 해
탈이다. 그래서 붓다는 모두에게 해탈하도록 노력하라고 외치는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에 의하면, 윤회하는 삶은 생유ㆍ본유ㆍ사유ㆍ중유의 4개 사이클로 나뉜다. 먼저 생유
는 어머니의 태에 잉태되는 순간을 말한다. 어머니의 태에 자리를 잡았을 때 이미 생명이 시작된 것
으로 본다. 본유는 어머니의 태내에서 있다가 세상으로 나와서 일정한 세월을 사는 시간을 가리킨다.
사유는 일정 시간을 살다가 생을 마치는 순간, 즉 죽는 찰나를 말한다. 마지막으로 중유는 죽고 나서
다음 생을 받기 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죽는다는 것은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것을 말하는데, 이 영
혼은 미세한 마음의 덩어리로 되어 있기 때문에 육안으로는 볼 수 없다. 이 중유의 기간은 10일에서
49일이다. 그래서 죽는 자에게 49재를 지내는 것이다.
다음 생은 어떻게 받을까? 붓다는 이에 대하여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바로 여섯 갈래의 길인데,
이를 육도 윤회라고 부른다. 즉, 사람은 자신의 업에 따라 여섯 갈래의 길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첫째
는 지옥도이다. 지옥도는 온갖 고통이 심한 세계이다. 기름이 펄펄 끓는 가마솥에 던져져 고통 받는
곳이 화탕지옥이고, 쇠꼬챙이나 면도칼과 같은 날카로운 것으로 몸을 갈기갈기 찢는 듯한 아픔이 끊
이지 않는 곳이 아비지옥이다. 지옥도는 온갖 나쁜 업을 지은 사람들이 가는 곳이다.
둘째는 아귀도이다. 아귀도는 배고픔의 세계이다. 아귀는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는다. 왜냐하
면 아귀의 배는 엄청나게 큰데 목구멍은 바늘구멍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배가 고프고 또 어
쩌다 밥알 하나라도 그냥 넘기면 좁은 목구멍에 걸려서 엄청난 고통을 받는다. 이 아귀의 세계는 남
에게 베풀 줄 모르고 인색하기가 그지없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다.
셋째는 축생도이다. 축생도는 어리석음의 세계다. 축생은 개나 소, 돼지 등 짐승들을 말한다. 짐승이
사람과 다른 점은 사리 분별을 못한다는 것이다. 사리를 모르고 앞뒤가 꽉 막힌 사람을 개나 소 같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축생은 이렇게 사리분별을 못하고 어리석은 짓을 많이 한 사람들이 가는 곳이다.
넷째는 수라도이다. 수라는 아수라라고도 하는데 싸움이 끊이지 않는 세계이다. 질서가 없고 싸움이
끊이지 않아 소란하기가 이를 데 없는 곳이 아수라장 세계이다. 교만하고 늘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들
이 가는 곳이다. 축생의 세계보다 지혜는 있으나 ‘나’라는 고집이 강하기에 고통이 심한 곳이다.
다섯째는 인간도이다. 바로 우리가 사는 세계이다. 지혜를 가지고 있어 배우기를 좋아하고 마음만 먹
으면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 그런데 여간 좋은 업을 짓지 않고는 사람으로 태어나기가
어렵다. 또한 사람으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다음 생에 다시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보장이 없다. 따라서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단순히 좋아할 것이 아니라, 사람의 몸을 받은 것에 감사하며 어떻게든 진
리를 깨치도록 노력하라고 붓다는 가르친다.
마지막은 천도이다. 이곳은 하늘의 세계로 그야말로 좋은 업을 지은 사람들만이 가는 곳이다. 왜냐하
면 인간의 세계보다는 괴로움이 적고 평화롭고 즐거움이 많은 세계이기 때문이다. 천도에도 28천, 혹
은 33천이라 하여 여러 가지 하늘이 있다고 한다. 그중에 광음천이란 곳은 하고 싶은 일을 생각만 해
도 모두 해결된다고 한다. 우리가 사는 인간 세계는 먹고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언가 행위를 해야
하는데, 그곳은 생각만 하여도 해결된다니 얼마나 좋은 곳인가? 그러나 이 세계도 영원한 것이 아니
니, 여기서도 업을 소멸하지 못하고 그대로 가지고 있거나 오히려 짓게 되면 그 업대로 다른 세계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윤회, 이것은 붓다가 기존의 인도 사상을 받아들여 체계화한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 속에서 귀중한
교훈이 깃들어 있다. 우선 업을 짓되 좋은 업을 지으라는 것이다. 붓기는 근기가 약한 사람들에게는
“선인선과(善因善果)요 악인악과(惡因惡果)이다.”라는 가르침을 폈다. 즉, 좋은 업을 지으면 좋은 결과
를 얻을 것이요, 나쁜 업을 지으면 나쁜 결과를 얻을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인과응보란
말은 바로 여기서 유래한다. 즉, 원인과 결과는 항상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청소년기에 얼마나 고민이 많은가. 그러기에 자칫 잘못하면 일을 그르치게 마련이다. 학교폭력, 따돌
림, 흡연 같은 것들이 모두 나쁜 업을 짓는 일이다. 이것에는 반드시 결과가 따른다는 것을 명심할
일이다. 적어도 붓다의 가르침에 의하면 말이다.
위대한 존재의 씨앗, 불성
인간의 본성은 무엇일까. 인간은 본래부터 어떤 성품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일까. 애초부터 선한 상태
로 태어나는 것일까? 아니면 동물과 똑같은 본능을 가지고 태어나서 인간으로 교육되고 훈련되는 것
일까? 인간 본래의 성품을 규정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만큼 인간은 복잡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 본성에 대한 의문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본디 선하다고 주장하는
‘성선설’을 지지하는 사람은 동양의 맹자와 서양의 루소가 대표적이다. 본디 악하다고 주장하는 ‘성악
설’을 지지하는 사람은 동양의 순자와 서양의 홉스가 있고, 중립적 입장의 ‘성무선악설’은 동양의 고
자와 서양의 로크가 대표적이다.
그러면 붓다는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어떤 가르침을 폈을까? 『열반경』에서 붓다는 “일체중생 실유
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이라고 했다. 이는 일체 생명이 있는 존재는 모두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누구나 붓다가 될 수 있는 잠재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
이다. 따라서 붓다의 인간 본성에 대한 가르침은 ‘불성설(佛性設)’이다. 붓다는 불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나는 이제 모든 중생들이 다 가지고 있는 불성이 여러 번뇌들에 의해 덮여 버린 바 되어, 보지 못하
고 있음을 알려주노라. 이것은 마치 가난한 사람이 진짜 보배를 안에 가지고 있으면서도 능히 얻지
못하는 것과 같음이다.”
붓다는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선언한다. 붓다 자신이 오랜 수행 끝에 직접 체험하여 선언한
것이라서, 이론적으로 무언가를 연구한 끝에 결론을 내린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불성이라는 개념은
불교 사상이 발전하면서 여러 명칭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부처님의 품성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라 하
여 ‘여래장’이라고도 하고, 한결같은 마음이라 하여 ‘일심’이라고도 하고, 스스로 갖고 있는 맑고 깨끗
한 마음이라 하여 ‘자성청정심’이라고도 하였다.
“누구나 노력만 하면 최고의 경지인 ‘깨달은 자’가 될 수 있다!” 이 이상으로 매력적인 말이 있을까?
언뜻 보기에는 맹자의 성선설에 가까운 듯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다르다. 맹자는 전국시대에 다투는
양상을 보고 그 싸움을 그만두게 하기 위해 인간은 본래 선한 마음씨를 갖고 있다는 논지를 폄으로
써, 그 선한 마음을 회복하는 데 주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붓다는 직접 깨달음을 이룬 분으로서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불성’이라고 보고, 불성이 완전히 발현된 상태를 ‘부처’라고 보았다.
이것은 마치 한 알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서 땅의 기운과 잘 결합하여 싹이 트고 완전히 열매를 맺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래서 붓다는 “중생이 곧 부처”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생명 있는 모든 것에는 이
미 불성이 내재되어 있어 언젠가는 ‘깨달은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불성은 깨달음의
씨앗이다. 깨달음이란 인간으로서의 최고의 경지를 말한다. 아무것에도 걸리지 않은 자유로운 경지,
태어남과 죽음이 둘이 아닌 경지, 즉 해탈의 경지를 말한다. 욕심도 성냄도 사라지고 더 이상 어리석
음도 범하지 않는 가장 안락한 경지가 바로 깨달음의 경지이다.
좋은 마음, 좋은 인연
미래는 현재의 자화상
나는 고등학교에서 교양 과목으로 교육학을 가르친 적이 있다. 이 과목은 말 그대로 고등학생에게 폭
넓은 교양을 심어주기 위해 개설된 과목이었다. 과목 성격상 평가는 하되 내신에는 성적이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과목에 비해 좀 더 자유롭게 주제를 정하여 수업했던 편이었다. 이 과목 수업에
서 꼭 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10년 후의 자화상’을 글로 써 보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다양한
글이 나왔다. 자신의 미래 자화상을 마치 소설처럼 줄줄 꾸며 나간 학생이 있는가 하면, 정확하게 판
단을 내리지 못하여 이것저것 가능성 있는 것을 나열한 학생도 있었다. 한껏 꿈에 부풀어서 자신의
미래를 조명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사람은 마음의 작용이 있기에 10년 후, 50년 후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이것은 매우 교육적이고
소중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기를 소망하면 성공의 씨앗이 심어지고, 그 씨앗이 무럭무럭 자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을 교육학에서는 ‘자성 예언’이라고 한다. 주위 사람이나 자신이 미래
에 성공한 모습을 그리며 그렇게 될 것이라고 반복해서 예언하고 상상하면 이뤄진다는 이론이다.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붓다는 이 물음에 대하여 명쾌한 답을 내리고
있다. 『법화경』에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너의 전생을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지금의
너의 모습을 보라. 너의 내생을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지금 네가 하는 일을 보라.’ 여기서 ‘전생’이란
단순히 태어나기 전의 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이전의 삶을 총체적으로 말한다. ‘내생’이란 단
순히 죽은 후의 세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닥쳐오지 않은 미래를 총체적으로 말한다.
붓다는 이와 같은 이치를 ‘인과법’이라고 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속담은 바
로 이 인과법을 잘 말해준다. 콩 심은 데서 콩이 나야지 팥이 나면 그것은 인과법칙이 아니다. 이것
은 생명의 법칙을 어긴 것이요 자연의 도리에서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관상을 보는 사람이 찾아오
는 사람의 얼굴이나 손금 모양을 보고 그 사람의 과거의 삶을 알아맞히는 것은 어쩌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현재의 모습을 보고 과거를 알아맞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는 과거의 산물이요, 미래는 현재의 산물이다. 그 어느 것도 그냥 뚝 떨어지는 법이 없다. 반드시
그렇게 되려는 의지와 노력이 있어야 한다. 어려서 아무리 꿈과 희망을 가졌다 한들 성장하면서 의자
가 식는다거나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 꿈과 희망은 변질되거나 사라질 수밖에 없다. 또 아무리 의
지와 노력이 있어도 주위 여건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꿈과 희망은 이루어질 수 없다.
의자와 노력이 ‘인’이라면 주위 여건은 ‘연’이다. 미래의 꿈과 희망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지금의 자
신에게 인과 연이 따라 주어야 한다. 그 인과 연의 적절한 결합에 의하여 자신의 모습이 변증법적으
로 발전되어 나아가는 것이다. 만일 인과 연이 잘 결합되지 못하고 어긋나는 일이 잦으면, 그만큼 미
래의 나는 희망대로 되지 않는다.
함께 배워 가는 길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나올 때
공부는 때가 있다고 한다. 평생 하는 것이 공부이지만 그 적기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르치고 배
우는 것도 때가 있어야 한다. 가르쳐야 할 때 가르치지 못하고, 배워야 할 때 배우지 못하면 공부가
익지 못하는 법이다. 교육학자 에릭슨은 가르치고 배워야 할 적기를 ‘결정적 시기’라고 했다. 예를 들
어, 언어발달은 유아기에 잘 이루어져야 하고, 대학 선택은 고등학교 시기에 잘 이루어져야 한다. 결
정적 시기를 지나서 하려고 하면 배우는 학생이나 가르치는 선생님이나 다 애를 먹는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드는 인간 발달의 결정적 시기는 3세 내지 5세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초기 경험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또한 교육학자 블룸은 8세 이전에 지능의 80%가 결정된다고 했다. 이는 사람
이 배울 때는 결정적인 시기가 있음을 뒷받침하는 주장들이다.
붓다는 가르치고 배우는 것에 대하여 어떤 가르침을 폈을까. 붓다의 가르침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전
수되었다. 붓다의 가르침을 훌륭히 담고 있는 중국 선종의 대표적인 저서인 『벽암록』 제16칙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어떤 수행자가 스승인 경청 화상에게 물었다. “저는 달걀의 껍질을 깨고 세상에 나오려는 병아리와
같으니 부디 화상께서는 밖에서 껍질을 깨뜨려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잘 나올 수 있겠느냐?” “제
가 만약 밖으로 잘 나오지 못하면 스님은 사람들의 비웃음을 살 것입니다.” 그러자 화상이 그를 질책
했다. “에끼, 이 멍청한 놈아!”
이 이야기는 선사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줄탁동시”라는 화두다. ‘줄탁’이란 말은 ‘톡톡 탁탁’이라
는 뜻으로,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나올 때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병아리가 바깥으로 나오고자 하
면 먼저 안에서 톡톡 쪼아야 한다. 그러면 어미닭이 때를 알고 밖에서 탁탁 쪼아서 마침내 껍질을 깨
뜨리고 부화하게 된다.
병아리가 부화하는 모습은 수행자가 깨달음을 완성해 가는 것과 같다. 병아리는 수행자이고 어미닭은
스승이다. 수행자가 내부에서 치열한 자기 수련을 할 때 스승은 밖에서 수행을 열심히 하게 돕고, 마
침내는 도를 깨치게 하는 것이다. 공부란, 병아리와 어미닭이 안과 바깥에서 호응하듯이, 제자와 스승
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자가 공부를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스승은 가르칠 수 없다는 점이다. 만
약 스승이 제자를 가르치지 못했다면 위의 『벽암록』의 이야기처럼 스승이 자격이 없다고 비웃음을
살지 모른다. 그러나 책임은 병아리(제자) 쪽이 더 크다. 왜냐하면 병아리는 껍질을 깨뜨리지 못하면
그 속에서 목숨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스스로 깨고 나오지 않으면서 스승을 탓하려 하는 것은 ‘멍청
한 놈’이다.
‘줄탁동시’란 위에서 말한 ‘결정적 시기’의 구체적인 상황을 가리킨다. 자식의 마음에서 배우고 싶은
동기가 일어날 때, 그 시기를 놓치면 부모의 도리를 못하는 것이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제자의
마음에서 공부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분출될 때, 이 욕구를 채워 주지 못하면 스승의 잘못이 크다.
제자가 잘못을 저질러서 꼭 지도해야 할 때, 그 시기를 놓치면 그것 역시 스승의 잘못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어미닭은 때를 알아서 병아리가 부화하도록 바깥에서 도와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고행을 즐겨라
요즘 청소년들은 의자가 나약하다고 한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다 보면 그런 상황을 종종 본다.
예를 들어, 청소년들은 컴퓨터에는 오래 앉아 있으면서도 힘든 일은 하기 싫어한다. 선생님이 심부름
이라도 시키려고 하면 우선 내빼고 본다. 학교에서 노력 봉사를 좀 하라고 하면 “왜 우리가 학교에서
이런 일을 해야 해요?”라고 이의를 제기하기가 일쑤이다. 인문계 학교 학생들은 마지못해 하면서 “그
거 하면 봉사 시간 얼마나 주는 데요?”라고 먼저 묻는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는 정말 달랐다. 선생님이 심부름을 시키면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고, 조금 어
려운 일을 시켜도 감히 못하겠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사실 그때는 학교 다니기가 쉽지 않았다. 그
먼 학교를 걸어서 다녀야 했고, 소풍 또는 원적이라 하여 걸어갔다 걸어왔다. 모내기 철이 되면 모내
기 노력 봉사, 방학이면 풀베기 노력 봉사, 벼 수확하는 가을이 오면 벼 베기 노력 봉사 등을 하며
학교생활을 했다. 그 시절 나를 포함한 아이들은 이런 일을 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교육학에서는 이를 ‘노자 교육’이라고 한다. 노작 교육은 막상 할 때는 어렵고 힘들지만, 그 땀방울
속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가치를 배우도록 한다. 나의 경우 농촌에서 부모님의 일을 도우며 자란
것이 지금도 큰 힘이 된다. 요즘은 정말로 달라졌다. 물질적으로 풍부하고 모든 것이 기계화되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지만, 몸이 편하다고 하여 정신까지 나약해지는 것은 좋지 않은 현상이다. 청소년
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대충 편하게 살고 보자는 식이다. 이러한 자세는 평상시에는 문제가 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위기가 닥쳤을 때는 심각해진다.
붓다는 이러한 청소년들에게 어떤 가르침을 줄까? 바로 적절한 고행을 하라고 한다. 여기서 고행이란
단순히 육체를 괴롭히고 훈련하는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제거하고, 잡풀처럼 솟아나는 번뇌와 망상과 유혹을 떨쳐버리기 위해 자신
과 싸우는 그러한 일련의 수련을 말한다. 이러한 수련의 기회를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몸과 마음은
굳건해진다. 각종 수련은 그래서 필요한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면 나로서는 특히 사찰 수련을 권장하고 싶다. 사찰 수련은 매우 독특하고 현대
인에게 유익하다. 템플스테이라고 하여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떠나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문호도
개방되어 있다. 나는 불교계에서 만든 청소년 단체인 파라미타를 지도하면서 학생들과 매년 한 번씩
수련대회를 치르고 스스로도 수련모임에 참여한 적이 있다. 참여할 때마다 항상 느낀 것이, 이 수련
이야말로 요즘 의지가 부족하고 나약한 청소년에게 좋은 고행의 기회라는 것을 실감했다.
그 이유는 우선 사찰은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있어서 그 안에 들어간 것만으로도 일단 몸과 마음이
깨끗해진다. 공부와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청소년들에게 그보다 좋은 것은 없다.
두 번째로 사찰에서 수련을 하다 보면 항상 있는 프로그램이 잘못을 참회하도록 하기 위해 108배 내
지는 1080배를 하는데, 이 절을 하는 과정에서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든다. 중도에 그만두고 싶은 유
혹의 고개를 수없이 넘는다. 그런 것들을 모두 이기고 절을 마쳤을 때의 뿌듯함이란 천만금을 주어도
못 살 일이다.
세 번째로 명상의 참맛을 느낄 수 있다. 명상을 흔히 사찰에서는 ‘참선’이라고 하는데, 이를 하기 위
해 방석에 고요히 앉아 있노라면 풍경소리가 울리고, 새소리가 들리며, 가끔 맑은 바람이 이마를 스
친다. 게다가 물 흐르는 소리까지 청아하게 곁들이면 마음의 찌든 번뇌는 천 리 밖으로 달아난다. 어
느 해 여름, 나는 국립공원 월악산 영봉이 보이는 모 천년 고찰에서 일주일을 혼자 보낸 적이 있는
데, 그 고즈넉하고 명상에 잠기는 맛이 참으로 감미로웠다.
네 번째로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예불에 참여하는 맛을 느낄 수 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새벽 밤하늘
을 한 번 바라보라. 하늘에서는 별이 쏟아지고, 커다란 법고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진다. 언젠가 속
리산 법주사에서 청소년들과 수련을 할 때 바라보았던 밤하늘은 무척이나 좋았다. 그때 에드리안이라
는 미국 원어민 교사와 함께 참여했는데, 그는 하늘을 보고 너무도 좋아하며 ‘원더풀, 원더풀’을 연방
외쳤다. 고요함 속에서의 새벽 예불 또한 하나의 예술이요 수련의 극치이다.
이 외에도 사찰 수련의 좋은 점이 많지만 듣기만 해서는 느끼지 못하는 법이다. 소금도 입에 넣어야
짠맛을 알듯 직접 맛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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