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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바보들이 난세를 만든다(강철수 지음)

by 미건주 2020. 7. 10.

바보들이 난세를 만든다 강철수 지음 소담출판사 / 2018년 10월 / 320쪽 / 13,800원 ▣

저자 강철수

 

스토리 구성력과 감각 있는 그림, 그림 칸 구성 등 만화 작가가 갖추어야 할 실력을 이상적으로 구비

한 대표적인 중견 작가이다. 톡톡 튀면서도 예사롭지 않은 문체를 구사하는 강철수는 서라벌 예술대

학 문예창작과 출신이다. 그림 실력이 뛰어나 고교 재학 중이던 1960년대에 이미 어린이 만화

탐정을 발표하며 프로 만화가로 데뷔해, 숱한 어린이 인기 만화와 바둑 스토리, 돈아, 돈아,

돈아등의 성인 만화를 발표했고 지금도 현역 만화가로 활동하고 있다.

 

Short Summary

 

이 책은 저자의 고집과 땀으로 쓴 스토리가 있는 조선ㆍ일본 보고서이다.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의미 있는 흔적들을 돋보기로 살핀, 글로 쓴 동영상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역사 고증에 기대어 쓴 역

사서도, 인문서도 아니다. 오직 만화가 강철수 작가의 두 눈, 두 발로 일본 열도 곳곳을 현미경처럼

살펴나가며 서울에서 도쿄로, 에도에서 한양으로, 도쿄에서 경성으로, 다시 조선에서 오사카로, 직접

보고, 묻고, 느껴서 적어 내려간 풍자와 해학이 담긴 에세이다.

조선시대부터 일본과의 관계를 거슬러 올라가 무엇부터 잘못되었는지 되짚어보며 일본일본인’,

일본 문화에 대한 생각들그리고 일제강점기가 지나고 광복을 찾은 후 한국 서민들의 생활 모습과

생각들도 엿볼 수 있다. 왜 우리나라는 일제에 침탈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저자 나름대로의

해석들과 앞으로 우리나라와 일본이 풀어나가야 할 문제들도 가볍지만 진지한 목소리로 적어나갔다.

50대 이상 독자들에게는 그 시절 한국을 생각나게 하는 글들을 만나며 다시 한 번 일본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볼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차례

 

머리말

일본 가보니 어때 / 나라를 거저 넘긴 사람들 / 역사 퍼즐 재조합 / 5500만 명이 죽은 전쟁 /

1945년 일본 도쿄 다시 보기 / 도쿄 포장마차 / 도쿄 유부초밥 / 1945년 우리나라 / 일본군은 돌아

오는가 / 도쿄역 미스터리 /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거리 / 대한민국 황혼의 애국자들 / 일본은 정말

다 갔는가 / 신이 보낸 바람 / 태평양전쟁 자살특공 비행단 / 인간의 무덤, 물고기의 무덤 / 자살특공

대 후폭풍 / 연락두절 남자 동창들 / 누명 쓴 일본 신문들 / 대한민국 광명의 암흑시대 / 보릿고개를

아시나요 / 군인들의 시대 / 그래도 여전히 가난했던 나라 / 돈과 이 춤추던 시절 / 앉아! 일어서!

! / 군을 평정한 군() / 투기꾼의 최고 전성시대 / 누가 개천에서 용이 난다고 했나 / 히로뽕을

제대로 아는가 / 배가 고프면 뺏어 먹어라 / ! 마루노우치 / 구세주는 조센징의 나라 / 제발 잊어주

세요, 일제강점기 / 일본인은 일본어를 쓰지 마라 / 너무합니다 / 그래도 일본은 일본 / 일본인은 왜

친절할까 / 마지막 퍼즐 / 일본 국가 대표급 사무라이 / 왜구(倭寇) / 임진왜란 워밍업 / 허망한 대마

도 정벌 / 나쁜 관행, 나쁜 유산 / 천심이 민심 / 살륙의 시대 / 임진왜란 진주성 여인들 / 누가 논개

를 두 번 죽였나 / 관상에 의지하는 권력자들 / 복수의 무한궤도 당파 싸움 / 기본도 못 갖춘 철없는

상전들 / 유식한 무지들 / 어느 전무님을 위한 기도 / ! 청계천 / 하멜도 울고 간 조선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저주 / 하수(下手)들의 총집합 / 오사카(大阪) / 천수각 군주를 만나러 갔으나 / 전쟁은

승리해도 망한다 / 쿠다라나이 / 정한론의 실체 / 토론은 무슨 얼어 죽을 / 잔인무도 옛사람들 /

, 최고의 예절 / 예술, 그 슬픈 밥그릇 / 일본 여성 / 조선 여인 / 일란성 쌍둥이 / 강적 / 배상금

에 관한 몽상 / 죽음의 미학은 태곳적 전설 / 사죄에 관하여 / 좋은 관계는 모두가 대득 / 달걀이 불

러일으킨 아픈 추억들 / 빈대떡 신사의 슬픔 / 일본 놈을 왜 따라 해 / 일본, 오해와 진실 / 백 엔의

가치 / 아직도 방을 쉽게 못 얻나 / 참으로 합리적인 건물 주인 / 도쿄 거리, 서울 거리 담배꽁초 문

/ 일본의 진정한 애국자들 / 영웅은 아니어도 그리운 사람들 / 채석장 일본 십장님 / 일본 의사의

신의 한수 / 저승 사자 일본 판사 / 우리 삼촌 친구 / 흔적 / 사카우라미 / 군함도는 저리 가라 오무

타 탄광 / 와타나베 수병을 추모하며

 

▣내용요약

 

바보들이 난세를 만든다

 

영국, 프랑스는 바다를 끼고 마주보고 산다. 한국, 일본도 똑같다. 두 나라는 오랜 세월 치고받고 뺏

고 죽이던 앙숙이자 라이벌이었다. 그런데 현재의 두 나라는 어떤가. 바다 밑으로 길까지 만들어 사

이좋게 오가며 사이좋게 선진국이다.

왜 한국과 일본은 그렇게 못 했을까. 영국, 프랑스와 다른 점. 한국은 침략을 받기만 했고 한 번도 일

본 본토를 공격한 적이 없다. 우리 민족이 너무 평화를 사랑해서일까. 그래서 2천 번도 넘게 외세 침

략을 받았을까.

수나라, 당나라, 청나라열거하기도 벅찬 북방 제국들이 이 땅을 먹자고 세세년년 군사를 보냈다.

전쟁을 잊고 편히 잠을 잔 날이 많지 않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렇게 오랜 세월 시달렸으면 북쪽을

향해 눈을 흘겨야지. 왜 우리는 반대 방향에 있는 일본을 미워할까.

일제 36을 날수로 계산하면 36년이 아니고 3411개월 17일이다. 수천년 역사를 자랑하는 대한

민국이 고작 35년도 안 되는 그 짧은 기간에 북방의 2천 번 침공을 능가하는 무엇이 있다는 것일까.

한국에 관심 있는 일본 노인들을 만나면 요즘도 은근 우쭐댄다. “우리 일본이 조선에 기찻길 깔아주

고 다리도 놓아준 거 아시오? 서울 한강철교 아직도 튼튼히 잘 서있죠?” 사실이다. 철도, 다리뿐인

. 학교도 일본이 많이 지었다. 언뜻 들으면 참 고마운 일본. 선의의 통 큰 외교였다면 환대하고 업

어 모셨을 것이다. 그러나 철도는 전쟁 물자를 실어 나르려고, 학교는 일본어를 가르치려는 식민 지

배의 서곡이었다.

왜 우리는 그것을 몰랐을까.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 나라 문무대신 고관대작들이 솔선수범

대문을 활짝 열어주었다는 사실이다. 일본 군대는 군가를 부르며 이 나라 심장부를 걸어 들어왔다.

하기야 상감마마까지 한통속이었으니 말해 무엇하랴. 그렇다면 절대로 침략이 아니었다는 일본의 변

명이 거짓말이 아니네?

임진왜란 때 조선은 일본의 총포에 방선이 뚫렸었다. 200년 후 조선을 일본의 줄기찬 잔 펀치에 무너

졌다. 일본은 총을 등 뒤로 감추고 치밀한 전방위 회유와 겁박성 강온 외교로 야금야금 한반도에 흙

발을 대다가, 어느 날 통째로 삼켜버린 것이 치욕의 1910년 국권침탈이다.

일본은 정말 다 갔는가

조선이 광복되고 서슬 퍼런 일본 순사도 일본군도 물러갔지만 일제 잔재가 동시에 씻겨나간 것은 아

니었다. 일본에 빌붙어 이득을 취하던 친일 뻔뻔이들은 일본 패망을 한없이 아쉬워했다. 웃지 못할

촌극이 전국 곳곳에서 벌어졌다. 지방 소도시 ○○시장통. 작은 극장 앞에 장날도 아닌데 사람들이잔뜩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바닥에 꿇어앉은 30대 남자들 여럿이 삥 둘러 에워쌌는데, 손에 몽둥

이가 들려있었다. 포위당한 남자는 일본인이 운영하던 극장의 영사기사였다. 사장이 극장을 내놓고

일본으로 가버리고 동네 사람들이 일본 놈한테 붙어먹던 기생충일 때려죽이자고 나선 것이었다.

사색이 된 영사기사가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응징자들은 단호하게 몽둥이를 쳐들었다. 그때

였다. 누군가가 잠깐!” 하고 소리쳤다. 응징자들이 멈칫했다. 가만히 중년 신사가 걸어 나오며 조리

있는 어조로 영사기사를 변호했다. “이 사람 죽이면 안 돼! 이 사람 죽이면 우리는 앞으로 영화 못

.” 응징자들은 잠시 고뇌에 빠졌다. 결국 영사기사는 변호인 잘 만나 목숨을 건졌다.

일본인들은 모두 떠났지만 도처에 일본이 남아 있었다. 일본은 결코 모두 가지 않았고, 우리도 모든

것을 떠나보내지 못했다. 지금이야 막상 전력을 자랑하는 세계적인 강군 대한민국 국군이지만, 광복

후 한국군은 솔직히 군대랄 수도 없었다. 탱크가 다 무언가. 변변한 대포, 번듯한 기관총 하나 없었

. 자주포는커녕 비슷하게 그린 그림도 없었다. 일본군이 쓰던 병영, 그들이 버리다시피 남겨준 녹슨

검과 총. 신병 훈련도 거의 일본식이었다. 물통과 식판도 한동안 그대로 썼다.

짬밥(잔반), 총기 수입(총기 손질) 같은 엉터리 일본 말이 고쳐지지도 않고 수십 년간 그대로 썼다.

일본 말을 한다고 무슨 범죄는 아니지만 제대로 알고 써야 품위를 잃지 않고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

하지 않는다. 지라시(전단지), 산마이(조연배우), 잇빠이(가득), 가오마담(얼굴마담), 히야시(차게 함),

마치 우리말같이 섞어 쓰지만 모두 한글 학자들이 불쾌해하는 단어다.

그런데 이 말만은 제발 쓰지 말기 바란다. 땡깡이라는 일본말로, 중년 남녀들이 TV에 나와 아무렇지

도 않게 떼를 쓰다는 의미로 쓰는데, 땡깡은 떼가 아니다. 간질 환자가 간질을 일으킨다는 말이다.

일본의 조선강점기 36년은 하느님의 축복이었다라고 말해 오해를 산 장로님이 있었다. 그것은 아마

일본에 주권을 한때 빼앗겼으나 그것을 계기로 백성들이 눈을 떴다. 내 조국의 소중함을 알았고 불같

은 독립 의지로 뭉쳐 싸울 수 있었다. 그런 내용을 전하려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전 재산을 털어 독립 자금을 보태고 목숨까지 잃은 이의 후손한테 축복까지는 저항이 따랐을

것이다. ‘광복돼서 나라 찾고 자존심은 찾았지만 당장 삶이 나아진 게 뭐냐는 사람도 있었다. ‘삶이

아무렴 어때. 광복되니 그냥 마냥 즐겁다는 이도 있었고, ‘그까짓 돈, 그까짓 집, 그까짓 회사, 다시

만들면 되지!’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국인들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

세계 최빈국 GNP 100달러도 안 되던 거지 나라로 분류되었던 대한민국이 GNP 3만 달러, 세계 10

권 경제 대국. 그야말로 꿈이 현실이 되었다. 시련이 먼저 있고 나중에 축복이 온 것일까. 갑자기 배

가 부르고 마음이 풀어지니 거듭 대인의 풍모를 보이고 싶다.

일제 삼십 몇 년, 그리 유쾌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의미는 있었어. 일본 녀석들 욕심이 조금 과

하고, 과격했지. 하지만 수뇌부 윗대가리들이 나빴지. 일본 국민이야 무슨 죄. 따지고 보면 슬픈 피해

자들이지, .” 그런데 참 알 수가 없다. 그렇게 통 크게 훌훌 털어버리면 간단할 것 같은데. 사람

좋게 용서해버리면 될 것 같은데 그게 그렇지가 않다. 우리가 원래 그렇게 뒤끝 있는 민족일까. 그러

나 민족성하고 결이 다른 무언가가 분명 있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밝혀내기로 했다.

 

대한민국 광명의 암흑시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일본을 극도로 싫어했다. 대통령 가까이서 모셨던 이들 말에 따르면, 일장기만

봐도 경련을 일으킬 정도였다. 한때 거리의 당구장 아크릴을 단속하던 시절이 있었다. 빨간 당구공

표시가 일장기를 연상시킨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어이없어 했다. 아마도 측근 누군

가가 대통령 마음을 지나지게 헤아린 것이 아닌가 싶지만, 증거는 없다. 그렇게 따진다면 빨간 앵두

나 사과, 잘 익은 토마토도 숨겨놓고 팔아야 하는 것 아닌가.

이승만 시절, 학교마다 방공 반일구호가 나붙었다. 아이들은 뜻도 정확히 모르면서 구구단 외우듯

복창했다. 공산당 다음으로 나쁜 나라가 일본이라고 배웠다. 일본을 하도 미워해 축구를 하러 온 일

본 국가대표님 입국도 막던 쓴웃음 짓게 하는 그 시절.

어째 좀 수상쩍다.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했더니 마침내 정국혼미, 나라가 다시 흔들려 요동치고

있었다. 여야 정쟁보다 대통령을 에워싼 고관대작들이 문제였다. 1950년대 후반기 역사는 그때를 이

렇게 적고 있다. “진정한 애국 일꾼보다, 그저 한자리 해먹겠다는 소인배들이 경무대 주변에 파리 때

처럼 들끓었다.”

무능한 간신들에 둘러싸인 노쇠한 대통령의 비운일까. 사람들이 다 자기 같은 줄 알고 아무나 등용한

인선의 실패였을까.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는 참으로 인복이 없었다. 그가 불러서 쓴 인물들이 대한제

국 말엽 고종의 주변 인물과 별 차이가 없었다. 백성들은 끊임없이 개혁과 쇄신을 주문했지만 소귀

에 경 읽기이승만도 그의 측근들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백성들의 원성에 대통령한테 전혀 전달되지

않는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1960, 부정선거를 발화점으로 마침내 국민봉기(419).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린 몇몇이, 몇백만

시민을 거리로 불러냈다. 결국 그 몇몇들이 나라를 망가뜨리고 자기들 명줄도 재촉했다. 당시 시위

군중을 향해 총을 겨누게 한 장관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해 많은 기자들을 놀래 자빠지게 했다. “

은 쏘라고 준 것이다!” 일본 국민들은 늘 전쟁을 끌어안고 살았다고 한다면, 한국 국민 역시 참으로

등골 으스스한 시대를 살았다. 그러나 이승만의 영결식 때, 다시 시위 군중만큼 인파가 몰려나와 눈

물을 흘렸다.

 

돈과 이 춤추던 시절

 

이 나라는 왜 늘 그럴까. 강인 무쌍, 청렴결백의 새 정부가 주야장천 칼을 휘두르는데도, 여전히 힘

있고 빽 있는 사람들 세상이었다. 가난한 시인은 세끼 밥도 못 먹었다. 이름 없는 문화 예술인은 쌀

을 꾸러 가기 창피해서 그냥 집에서 굶었다. 국가는 선진국을 꿈꾸고 있었지만 문화 예술가들 사회적

대접은 후진국 밑바닥을 벗어나지 못했다.

취직하기 어려운 좋아하는 음악이라도 하려 하면 딴따라 말년이 얼마나 비참한지 아느냐?’ 기를 죽

였다. 그림이나 글을 쓰겠다고 하면 굶어 죽고 싶어 기를 쓰냐며 가족들이 펄쩍 말렸다. 타고난 재

능으로 성공하는 사람은 백만 명에 한 명이 될까 말까하늘이 노래지는 불문율이 떠돌며 사람들을

절망시켰다. 특히 연예계는 바늘구멍이었다. 그저 제일은 금수저. 누가 뭐라고 우겨도 이 최고, 줄이 있어야 무엇을 할 수 있었다. ‘중에서도 군 장성 이 약발이 제일 잘 먹혔다는데, 내가 아

는 군 출신은 모두 병장이나 상병 제대였다. 돈이 돈을 버는 세상인데, 그 돈도 연줄이 있어야 꾸어

주었고, 은행은 특히 심했다. 은행이 그렇게 사람을 봐가며 차별을 하는 곳인지 보통 서민들은 아무

도 몰랐다.

군사정권이 정치를 잘해서인지, 기업이 수출을 잘해서인지 국민소득이 늘었다. 깡패가 많이 잡혀가고

조국 찬가가 여기저기서 울려퍼졌다. 그럴수록 정직하고 투명한 사회가 돼야 하는데 수면 밑으로 더

많은 부조리가 용암처럼 흘렀다. 보통 사람 눈으로도 그것이 훤히 보일 때가 많았다. 어찌 보면 당연

한데 참 신기했다. 힘 있는 사람 힘은 더 세지고, 국민소득에 맞춰 뇌물액수도 점점 올라갔다. 가끔

신문에 안 났으면 일반 서민들은 그런 큰돈이 세상에 굴러다니는 것도 몰랐다. 종종 배달 사고라는

것이 있었지만 곧 위험수당이라는 파생상품이 생겼다. 이래저래 돈 가진 사람들의 세상. 그들만의 리

그였다.

바보라는 별명을 가졌던 전전 대통령 노무현은 정의가 실종되고 부패 비리가 득세한 세상이라고 했

. 당장 여기저기서 자유민주주의 국가 부정이냐맞받아쳤지만, 딴 건 몰라도. “정의가 실종된 사

는 분명 맞다. 무서운 것은 정의가 실종된 사회라고 함부로 떠들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골로 가

세상이었다.

실제로 어떤 기원에서 큰 소리로 당하는 놈만 억울한 세상이라고 했다가 붙들려 간 남자도 있었다.

알고 보니 상수의 꾐수에 자꾸 대마가 죽어 짜증이 나서 한 소리였다. 6급 실력의 그는 매는 맞지 않

고 금방 풀려났다. 그러나 그 웃기는 일 하나만 보더라도 당시 사회 감시망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것

같지 않은가.

 

일본인은 왜 친절할까

 

일본을 다녀보면 산이나 바다나 기암절벽, 우리나라랑 거의 똑같다. 일본이 정리가 잘돼 있고 깨끗하

다 뿐, 도로 폭이 우리보다 좁다는 느낌뿐, 고속도로 요금징수, 톨게이트, 주차 시설, 식당과 자판기

전부 똑같다. 문화의 차라고 하지만 같은 쌀밥을 먹는다. 똑같이 된장국을 좋아한다. 일본인은 매운

것을 못 먹고 생마늘 같은 거 입에도 못 댄다는 소리는 거짓말이다. 고추장, 떡복이, 매운 김치 너무

잘 먹는다. ‘지고쿠 라멘이라고 해서 들어가 먹었는데 과연 한국인이 놀랄 정도로 매웠다. 그래서 지

고쿠 라멘(지옥 라멘)인가.

한일 양국이 인구절벽으로 고민하고, 특히 고령화 현상은 거의 두 나라가 판박이다. 공원에서 담소하

는 노인들을 보면 여기서 일본인지 한국인지 얼른 구분이 안 된다. 간판 글씨만 바꾸면 그대로 서울,

부산, 광주다 싶은 거리가 너무 많다. 열심히 사는 중소도시 서민들, 고달픈 도시 서민, 어디를 가봐

도 똑같이 먹고 사느라 바쁘구나.

길거리에서 큰소리로 전화하는 것까지 똑같을 것 같지만 그건 아니다. 일본도 목청 큰 사람이 많지만

(특히 선술집 젊은 손님들) 전화 소음 서로 배려하자는 포스터가 곳곳에 붙어 있고, 구호로만 그치는

게 아니라 절대다수 시민들이 협조한다.특히, 도쿄 같은 큰 도시에서 전차를 타보면 큰소리 통화는 고사하고 스마트폰 벤소리 하나 들을 수

가 없다. 믿어지지 않아 알아보았더니 무음(진동)이 도시인 기본 에티켓이란다. 그거 하나 진실로 존

경스럽다.

부부 싸움도 이웃에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창문을 꼭꼭 닫고 조용히싸운다. 그나마 요즘은 부부 싸

움 구경하기 힘들다. 싸우면서 사느니 아예 갈라서는 것인지. 요컨대 남에게 폐를 끼쳐서 안 된다

는 것을 교통법규 이상의 철칙으로 삼고 살아간다.

특히, 타인에 대한 친절과 양보, 잠시 불쾌해도 참고 타인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려고 애를 쓴다. 일본

인들이 하도 친절하다고 해서 나는 처음에 장사 해먹으려면 당연히 친절해야 손님이 오지. 흔한 장

삿속 웃는 얼굴일 거야했는데 아니었다.

손님이 찾는 물건이 자기 가게에 없으면 그 손님을 수십 미터 떨어진 다른 가게로 모시고 간다고,

은 경험자들이 두고두고 감탄한다. 혹시 친척이 하는 가게 아닌가 했는데 전혀 모르는 사이였단다.

내가 짖궂게 점원을 붙들고 뭘 그렇게까지 하느냐, 선행하는 기분으로 그렇게 하느냐물었다. 그랬

더니 선행은 전혀 아니고 손님이 우리 가게 아닌 데서도 돈을 쓰고 가면 이 지역이 그만큼 이득이 되

고 결국 자기한테도 이득 아니겠냐는 것이다.

친절이 몸에 뱄다는 것은 이미 그 사람은 사회인으로 성공했고, 아주 탄탄한 생활 기반을 구축한 것

이다. 세상은 친절한 사람에게 유익을 주기 때문이다. 친절을 모르는 무뚝뚝한 사람도 친절한 상점을

애용한다. 한국에도 친절한 사람이 많은데 나는 그것을 일본에 가서 깨달았다.

 

! 청계천

 

도쿠가와 막부에도시대 후반, 전쟁이 없는 세상이 되니 칼을 쓸 일이 없었다. 사무라이들은 대부분

실업자가 되었다. 칼잡이가 무직인 시대는 나라가 생기고 처음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 개인 경호원

으로, 혹은 장사를 하다가 가진 돈 다 까먹고 범죄자로 전락한 딱한 사무라이도 있었다. 그러나 전쟁

이 있다 해도 작동이 쉬운 다연발 소총에 권총, 물레방아식 기관총까지 반입되니 이미 칼잡이 종언

시대였다.

그러나 사무라이들은 낙심하지 않았다. 독서로 세상을 다시 읽으면서 세계를 공부했다. 그 시절

무가에 세계지도 없는 집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역시 빠르고 자세에 빈틈이 없는 사무라이들인

. 비교하기 불쾌하지만, 그 당시 조선은 세계지도는 고사하고 국내 지도 한 장 구하기도 별따기였

. 혹 잘못 소지했다가 첩자로 의심받기 십상인 세상이었다.

세월이 한참 지나 외국 선교사가 중국에서 가져온 세계지도 달랑 한 장이 최초이자 전부였다. 물론

돈을 주면 보따리 무역상들이 구해다 주겠지만, 조선 임금도 신하도 우리끼리 지금 이대로가 좋았

.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지만 알 필요도 없었다. 도대체 정보라는 것이 성가셨

. 덕분에 아무 힘없는 농민들은 그저 하늘만 바라보았다. 극심한 가뭄 때 나라가 신경 써주는 일은 기우제가 전부였다. 백성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농사가 잘돼

야 많이 거둬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 기우제는 국가의 펀딩이었고, 임금도 신하도 오직 거기 매달

렸다. 도랑을 막아 물을 가둔다거나 빗물을 모은다거나, 작으나마 저수지를 어찌 해보는 것은 돈이

들고 귀찮았다. 전문가도 없었다. 있어도 선뜻 안 나섰다. 중매쟁이는 뺨만 맞지만, 괜히 난공사 맡았

다가 돈은 커녕 죽을 수도 있었다. 그저 안전빵이 기우제였다. 돼지 대가리를 삶고 그저 하늘에 빌었

.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왔다. 비가 올 때까지 지내니까.

그토록 오매불망 중국 따라쟁이를 하면서, 중국 대륙 곳곳에 뚫리고 연결된 수로는 보지도 배우지도

알려고도 안 했다. 중국이나 일본 이곳저곳 올망졸망 꼬마 운하가 있는 것은 베네치아처럼 곤돌라를

띄우고 산타루치아를 부르기 위함이 아니다. 농산물, 공산품, 어류를 신속히 나르기 위한 물류 통로였

.

소달구지는 느리고 말은 비싸고 관리도 힘들어, 서민들은 물길을 헤치고 연결해 삶에 속도를 더한 것

이다. 어느 시대, 어느 국가든 물을 잘 활용하는 나라가 부강했다. 농사가 전부이다시피 한 조선은 논

두렁, 밭두렁 물꼬 하나까지 고색창연 조상님의 은덕뿐, 효율적으로 개선해 보려는 왕도, 신하도,

을 원님도, 그 때까리도 없었다.

그러면서 물 낭비는 심해, 그야말로 물을 물 쓰듯 쓰고 나서 비가 안 온다고 하늘을 원망했다. 조선

왕조 500년에 물을 제발 좀 아껴 써라교시를 내린 왕이 한 명이라도 있기는 있었나? 빗물을 모으

기는커녕, 꼬마 운하를 꿈꾸기는커녕, 미국에서 알 카포네가 시가를 물고 기관총을 휘두를 때, 정말

부끄럽게도 서울 광화문 일대는 비만 오면 아낙네들이 요강을 들고나와 맑은 개천에 쏟아부었다.

조선시대만 해도 물이 맑다고 청계천이었는데 인구가 급격하게 는 탓인지. 온갖 잡동사니를 개천에

던지고 오물까지 버렸다. 청계천은 금방 더러운 탁류, 오물천이 되었다(1960년대). 어느 이른 아침

술집 여종업원이 그 물가에 쪼그려 앉아 조심스레 세수를 하고 있었다. 하필 그때 아침 산책을 나왔

던 외국대사관 직원이 그 광경을 보고 딱 두 마디했다고 한다. “, !”

 

배상금에 관한 몽상

 

독일이 지난 과오를 사죄할 때마다 한국인들은 꼭 한마디씩 한다. “독일은 저러는데 일본은 뭐냐.”

똑같은 전쟁 가해자 독일과 일본이다. 그러나 두 나라의 생각과 처지는 아주 다르다. 독일은 전후 반

드시 나치망령을 털어내야 했다. 독일은 수십 년에 걸쳐 피해 당사자를 찾아내고 일일이 사죄하고

보상했다. 전 세계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독일이 가야 할 유일한 길이었다.

우리나라 충청도를 떠올리면 독일이 쉽게 이해된다. 만약 항공, 뱃길, 다 끊기고 육로도 막혔다고 가

정해보라. 서울도 부산도 인천도 광주도 못 간다. 제주도나 중국은 아득히 멀어진다. 독일은 정밀기계

가 주력 산업이었다. 인터넷도 없고 전화마저 시원찮던 시절, 수출이 막히고 고립되면 그대로 고사한

. 국경을 맞댄 나라가 충청도보다 몇 갑절 많아 더욱 그렇다. 거기에 비해 일본은 좀 다르다.

약육강식의 시대였다. 당신네 조선이나 중국이 거꾸로 일본을 쳤어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 조선인 박해다. 난징학살이 어쩌고 하지만 나치독일은 유태인만 600만 명을 죽였다. 일본과 비교하지 말라. 이미 한 세대가 지난 일 아닌가.’ 일본은 그런 인식을 가진 듯하다.

패전 후 일본은 왜 독일같이 고립을 염려하지 않았냐고? 독일은 같은 레벨의 강대국과 싸웠다. 일본

은 주변국이라고 해야 조선, 중국, 러시아인데 솔직히 미미했다(청일전쟁, 노일전쟁, 모두 일본 승리).

선박, 항공, 경중공업 모두 일본이 압도적이었다. 한중이 견제할 수 없었다. 오랜 전쟁과 핍박에 시달

리다가 일본 천황 항복뉴스만으로 그저 살았다! 하던 시대다.

설사 배상 관련 국제법이 있다 해도 이미 미꾸라지 일본, 태평양전쟁에서 참패하고 빈털터리가 된 국

가였다. 물어낼 돈이 없었다. 배 째라고 하면 배를 쨀 국가도 없었다. 그러던 일본이 기적처럼 재기,

드디어 먹고살 만해졌다. 거대 미국을 바짝 뒤쫓는 경제 대국 소리도 들었다. 그렇다면 이웃나라 빚

진 것도 좀 갚아야지! 일본이 원래 철면피 국가였느냐. 일본은 고민했다. 경제 대국으로서 이미지 관

리도 필요했다. 큰마음 먹고 선뜻 지갑을 열었다. 대일청구권을 받아들인 것이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그것을 산업자금으로 아주 요긴하게 잘 썼다. 그러나 이웃집 자동차를 부숴놓고 물어내라니까, 겨우

타이어 두 개 값 정도의 액수였다.

밀실의 양국 대표단도 그것을 잘 알면서 대충 넘어갔다. 아주 운이 좋았다. 없는 살림에 돈을 잘 쓴

우리가 아니고 일본이. 푼돈 얼마로 지난 과오가 완전 면피된 줄 아느냐 소리도 아니다. 그 시절 중

국이 덩치만 크고 힘이 없는 존재였기에 망정이지. 만약 요즘에 돈을 주겠다! 그것을 중국이 봤다!’

당장 팔을 걷어붙이고 달려와 우리 중국은?” 했을 것 아닌가. 중국뿐 아니라, 동남아 여러 나라가

야자수 그늘 밑에서 튀어나오며 우리도 줘요!” 할 것이다.

인간이 처음으로 달에 발을 내디뎌 온 지구가 떠들썩하던 그때, 순수하고 순박했던 당시 일본 총리의

호의였을 뿐, 시절이 다르다. 오늘의 일본은 단단한 쇠지갑을 쉽게 열지 않는다. 근래 들어 중국이 커

지고 발언권도 막강해졌다. 중국이 손을 내밀지 않는다. 왜일까. “그까짓 달러 우리도 있을 만큼 있거

든요!”일까.

하기야 미국을 얼른 따라잡아 지구 일등을 꿈꾸는 중국이 과거 문제 구실 삼아, 라이벌 일본에

주시오는 대국의 풍모가 아니다. 그러나 사실은 체면이나 자존심 영역의 문제가 아니다. 중국도 겉

으로 보기 졸부 같아도 솔직히 그 나라도 돈 들어갈 곳이 너무 많다. 문제는 그 청구 액수다. 쉽게

말해 얼마를 달라고 해야하느냐다.

가만히 잘 있는 나라 쳐들어와서 총 쏘고 대포 쏘고 사람 죽이고 했으니 1천만 달러 물어내라. ,

너무 적은가? 100억 달러 배상하시오! 그래도 적다. 보유외환이 조 단위인데 차라리 안 받고 말지.

그럼1천억 달러? 1천억을 받으면 중국의 가치가 겨우 1천 억 달러가 된다. 안 된다. 우리 스스로

평가절하할 수 없다.

따지고 보면 국토가 망가진 것보다 200만 명이 넘는 인명피해, 찢긴 자존심, 정신적 피해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결국 아무리 계산을 해봐도 돈 얘기는 안 하는 쪽이 나을 것 같다. 괜히 긁어 부스

럼이요, 풀숲 뒤져 뱀 불러내기다. “그래, 점잖게 그냥 있자. 우리 중국 아무 말도 안 했어요.” 그렇

게 보자면 한국도 대동소이. 중국과 같은 입장, 같은 배를 탄 가슴앓이 선객들이다.

이것은 다시 우스개 삼아 상상해본 것인데. 그래도 태평양전쟁 피해국들이 똘똘 뭉쳐 세계 여론에 울

면서 호소했다고 하자. 어찌어찌 국제 재판이 진행됐다고 치자. 엄청난 시간과 비용을 소모한 끝에

일본이 배상하라!”가 도출됐다고 하자. 당황한 일본이 배 째라고 버티다가 끝내 국제 여론에 굴복.

나라를 다 팔고 끝내 일본이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됐다고 치자. 거기서부터가 진짜 문제다. 국가간의

이해관게는 오늘날 어느덧 사람 몸속의 신경망처럼 진화했다. 그것이 어느새 유기체화, 혈액처럼 호

환되고 있다. 한 나라가 망하면 여러 국가가 함께 망하는 구조다.

일본이 없어지면 여럿이 같이 없어질 수 있다. 물귀신처럼 다 같이 죽게 되어 있다. 가해자 일본은

그것을 믿고 있을까. 피해국들은 그것을 빠삭하게 알고 있어 인내하는 것일까. 둑이 무너지면 당장

내 양말, 내 바지부터 젖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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