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저자 송혜진
갈래머리를 땋고 다녔던 초등학교 시절부터 아침에 눈 뜨면 일어나 신문 읽기를 즐겼던 덕분에 기자를 자연스럽게 꿈꾸게 됐다. 2005년 <조선일보>에 입사했고 2008년 사회부에서 문화부로 건너왔다. 2015년 말부터 조선일보 주말 섹션 와이Why를 만드는 팀에서 커버스토리 인터뷰 ‘송혜진 기자의 느낌’을 연재했다. 현재는 다시 문화부에서 활동하고 있다.
▣ Short Summary
최근 조사에 따르면 대학을 졸업한 20대 구직자들이 평균적으로 취업하기까지 10.7개월이 걸리고, 토익 응시료나 자격증 취득 비용으로 월 40만 원 이상 지출한다고 한다. 하지만 어렵게 취업에 성공한다고 해도 첫 직장에 다닌 기간은 고작 1년 2개월뿐이다. 여전히 많은 젊은이가 취업을 위해 자격증을 준비하고 외국어 실력을 높이고 있지만 이러한 노력이 그들에게 안정적인 직장을 보장하지도, 미래를 약속하지도 못하는 게 현실이다. 여기 열악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각 분야의 최고가 된 사람들이 있다.
저자인 송혜진 기자가 전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성공에는 정답이 없음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준다. 《조선일보》 주말 섹션 ‘Why’에서 23인이 독자들에게 가장 많은 호응을 얻은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들이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반항을 거듭하다 지방 전문대를 간신히 졸업했고 남들이 말하는 스펙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문승지 디자이너나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다가 일상의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온 정웅 파티시에까지, 바로 내 옆에 있는 친구이자 형이다.
둘째, 명문대 졸업장도 없고 영어도 제대로 못 하지만 누구나 도전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영어를 제대로 못 해 일하고 싶다는 자신의 의지를 종이에 써서 보여준 송진국 회장은 물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프랑스 파리 시장에 맨몸으로 뛰어든 우영미가 바로 산 증인이다.
셋째, 나의 생각과 나의 가치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추구하는 방식과 다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잘못된 것이 아니라 조금 다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남과 비교하고 남과 경쟁하는 순간부터 사람들은 예고된 실패를 향해 내달리게 된다.
SNS에 올라온 누군가의 화려한 포스팅을 보면서 울적했다면, 괜스레 내 모습이 남들에게 초라해 보이지 않을까 걱정됐다면, 아이를 키우면서 다른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키우나 주변을 힐끗거린 적이 있다면 이 책의 주인공들에게 도움을 받아보자. 하마터면 남들처럼 살 뻔했지만 자신만의 가치로 새로운 성공 트랙을 만든 이들의 인생 역전 스토리는 당신에게도 자신만의 길을 걷는 용기를 심어줄 것이다.
▣ 차례
프롤로그_ 명문대 졸업장도, 화려한 스펙도 없는 그들만의 성공 법칙
제1장 혼자만의 성공은 싫다_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다
01 퇴사 선언으로 회사의 노예에서 인생의 주인이 되다
02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시계로 장애와 비장애를 뛰어넘다
03 작은 아이디어로 누구나 기부자가 되는 착한 세상을 만들다
04 버려지는 자투리로 새로운 예술을 창조하다
제2장. 핑계 따윈 필요 없다_ 악조건을 자산으로 만든 사람들
01. 내 청춘에 핑계는 없다, 디자인 이단아가 날리는 열정 펀치
02 거리의 부랑아에서 특허 52개 낸 과학자로 성장하다
03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요리로 세상을 바꾸다
04 영어 한 마디 못해도 열정, 성실, 정직으로 성공하다
05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전쟁터 같은 뉴욕 패션 업계를 사로잡다
06 버림의 기억을 성장의 발판으로 삼은 노력파 지구인
제3장. 돈만 벌려고 일하지 않는다_ 회사란 무엇인가
01 사람으로 위기를 이겨낸 257년의 기록
02 사람들이 스스로 병을 다스려 행복해지는 세상을 만드는 철학
03. 빵 하나로 전국에서 찾아오는 명소를 만드는 뚝심
04 이윤만 생각하지 않고 문화와 나라를 살리는 기업가 정신
05 20년 만에 세계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비결
06 진짜는 비싸도 팔린다, 품질과 타협하지 않는 고집
07 세상 모두와 잘 살기 위해 회사를 꾸려나간다
제4장. 손익만 따지는 계산기를 버려라_ 확신의 기적
01 세상 어디에서도 없는 특별한 건축을 선물하다
02 돈에 현혹되지 않고 묵묵히 가는 디자인의 힘
03 쓸모없는 고물을 최고의 보물로 만든 중고나라 대통령
04 실패한 파티시에에서 성공한 빵집의 표본으로 거듭나다
05 무명 옷 25년, 수백만 땀으로 기운 사랑과 운명
06 공간에 얽매지 않듯 한계도 훌쩍 뛰어넘는 열정
▣ 내용요약
제1장 혼자만의 성공은 싫다_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다
퇴사 선언으로 회사의 노예에서 인생의 주인이 되다
일본 《아사히신문》 기자였던 이나가키 에미코는 마흔 살이 됐을 때 사표를 쓰기로 결심했다. 누구나 한번 들어가면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는 최고의 직장으로 꼽히는 아사히신문사를 당장 그만두려는 건 아니었다. 10년 후, 그러니까 쉰 살이 됐을 때쯤 회사를 관두기로 마음먹었다. “월급날만 쳐다보고 사는 내 모습이 싫었어요. 인사철만 되면 일희일비하는 것에도 지쳐갔고요. 월급을 받으려고 열심히 일했지만 인사철만 되면 일희일비하는 것에도 지쳐갔고요. 월급을 받으려고 열심히 일했지만 돈은 늘 모자랐고, 갖고 싶은 건 끝이 없었어요. 집에 옷과 물건이 넘쳐났지만 결코 행복하지도 않았고요.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드니까, 사는 방식과 가치관을 완전히 바꾸지 않고서는 은퇴 후에도 답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에미코는 그때부터 소비를 줄였다. 도시락을 싸서 다녔고 집에 있던 TV와 냉장고도 없앴다. 저축이 차곡차곡 쌓였다. 이쯤 되니 월급 없이도 살 자신이 생겼다. 회사 생활도 뜻밖에 즐거워졌다. 월급과 인사고과에 목맬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10년 동안 아사히신문사 오사카 지국 사회부 데스크, 논설위원으로 일하다가 2016년 1월 사표를 냈다.
1965년생인 에미코가 딱 쉰 살이 된 해였다. 그해 6월엔 『혼의 퇴사』라는 책을 냈다. ‘힘써 퇴사를 준비했다’는 뜻이다. 이듬해 1월에 한국에도 『퇴사하겠습니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에미코는 왜 이토록 열심히 퇴사를 준비했을까. 그리고 회사를 나오고 나서 그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에미코는 “기자 생활을 28년 했지만 외국에서 온 기자와 인터뷰를 하게 될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못 해봤다.”라면서 배시시 웃음을 머금었다. 그런 그에게 회사를 그만두고 나면 인생이 정말 환해지느냐는 질문부터 던져봤다. 에미코는 웃으며 답했다 “아뇨.”
퇴사 후 찾아온 진짜 내 인생: 그가 아니라고 대답한 이유는 이렇다. 첫째, 사표를 쓴다고 고민이 사라지진 않는다. 에미코는 이렇게 표현했다. “나도 회사를 그만두면 모든 복잡한 고민이 다 사라질 줄 알았지만, 고민은 그게 마치 자기 자리인 양 늘 같은 자리에 있었어요.” 둘째, 사표를 내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는 월급날만 되면 어딘지 모르게 허전하다. 꼬박꼬박 들어오던 돈이 들어오지 않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셋째, 더는 남 탓을 할 수 없다. 회사 다닐 땐 일이 풀리지 않으면 항상 남을 탓했다. 그러나 회사를 그만두고 나면 그럴 수가 없다. 모든 일이 결국 ‘내 탓’이다.
“이제야 내 인생을 사는 것 같아요.” 에미코는 이 한마디로 답을 정리했다. 매달 꼬박꼬박 입금되던 월급이라는 돈은 퇴사와 동시에 사라졌지만 대신 자유가 늘었고, 남 탓을 못 하는 대신 이젠 스스로 인생을 온전히 책임질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니 놀라운 일도 많이 생겼다. 가령 자기와 마주친 주변 사람들이 돈도 없는데 집에서 자고 가라고 한다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은 본래 남의 사생활에 간섭하는 것이 큰 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웬만하면 이런 말을 건네지 않는데 말이다. 덕분에 에미코는 일도 곳곳에 ‘별장’이 생긴 기분을 누릴 수 있게 됐다. 에미코는 이렇게 덧붙였다. “빈틈없이 살 때는 사람들이 나한테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반대로 내게 빈틈이 많이 생기자 사람들이 저절로 다가와 마음을 열더라고요. 사람은 근본적으로 선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어요.”
회사 다닐 때보다 회사를 그만두고서 더 다양하고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된 것도 놀라운 점이다. 에미코는 본래 기자였고, 기자로 일하는 동안 세상 누구보다 많은 사람을 만나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사표를 내고 나니 생각지도 못한 분야의 사람들을 훨씬 더 많이 만나게 됐다. 퇴사 후 자기 이름과 이메일 주소를 새긴 개인 명함을 가지고 다니는 에미코는 “요즘 명함이 팍팍 없어진다.”라면서 웃었다. 회사를 통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와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회사의 노예가 된 나를 보았다: 에미코는 일본 명문 국립대 히토쓰바시 대학 사회학부를 졸업하고 1987년 아사히신문사에 입사했다. 일본에서 ‘남녀고용 균등기회법’이 시행된 첫해다. 기자 직군을 포함한 입사 동시 70여 명 중 여성은 열 명 정도였다. 입사하면 지방 근무부터 시작하는 아사히신문사 전통에 따라 시코쿠에 있는 다카마츠 지국과 교토 지국 등을 거친 후 오사카 지국 사회부 기자, 사회부 데스크를 지냈다. 퇴사 직전까지는 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에미코는 회사가 싫어서 떠난 것은 아니라고 했다. “회사가 내게 준 많은 것을 감사했고, 그만큼 열심히 일했어요. 최선을 다해 일했고, 은혜를 갚을 만큼 다 갚았다고 느껴졌을 때 그리고 이곳에서 내가 더는 할 일이 없다고 느껴졌을 때 비로소 사표를 낸 것뿐이에요.”
그렇다면 왜 10년 동안이나 퇴사를 준비해온 걸까? 에미코는 기왕이면 회사를 더 잘 다녀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이야기는 그가 서른여덟 살이던 무렵으로 돌아간다. 30대 후반이면 조직에서 중견 대접을 받기 시작하는 나이다. 그도 예외는 아니었다. 회사에서 팀장직을 거쳐 데스크급을 향하고 있었다. 단순히 기자로서 활동하는 것을 넘어 조직을 관리해야 하는 관리자의 위치에 접어든 것이다. 슬슬 회사에서 권력을 잡을 수 있는 시기, 즉 그만큼 처신과 정치가 필요해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일만 열심히 하던 ‘젊은 기자’ 시절과는 또 다른 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는 이를 또 다른 기회로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에미코는 그 무렵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처량하다,’ 어느덧 조직이라는 틈바구니 속에서 부속품처럼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만 일하고 있음을 깨닫게 됐기 때문이다.
자신도 모르게 변해가고 있었다. 회사에서의 평가에 일희일비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밀려나지 않고 버틸 수 있는지 고민하는 동안 눈동자는 생기를 잃었고 얼굴도 푸석해졌다. 바로 그 순간부터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월급의 노예가 되지 말자고, 회사의 노예가 되지 말자고, 가능한 한 자발적으로 즐겁고 행복하게 일하다 떠나자고. 그러려면 역설적이게도 언제든 내킬 때 사표를 쓸 수 있어야 했다. 회사가 날 언제 자를까 전전긍긍하면서는 결코 마음껏 즐겁게 일할 수 없고, 원하는 삶을 살 수도 없겠다는 답이 나왔다. 에미코는 바로 그때부터 언제든지 사표를 낼 수 있는 준비를 시작했다.
“너무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월급에 의존하는 삶을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거든요. 그것만으로도 상당히 달라질 거예요. 소비 생활을 한번 찬찬히 들여다보세요. 죽어도 없애지 못할 지출이란 건 없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가장의 월급에만 기대어 사는 삶, 모든 가족이 경제적인 부담과 의무로 얽매여 있는 인생, 그것을 바꿔놓을 수도 있어요. 왜 아빠만, 엄마만, 누군가만 그렇게 계속 허덕여야 하나요. 왜 월급은 그렇게 늘 고정적으로 쓰는 돈이어야 하나요. 어쩌면 우리는 당연하게 돈을 쓰는 건지도 몰라요.”
돈, 그 묘한 존재와의 관계: 에미코는 10년 동안 퇴사를 준비하면서 아주 열심히 돈을 모았다. 그 덕에 사실 죽을 때까지 먹고살 걱정은 없다고 했다. 그래도 월급이 끊겼으니 아무래도 불안하지 않을까. 에미코의 생활 패턴을 들여다보면 그가 돈을 모은 비결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일단 에미코는 퇴사하고 나서 발품을 팔아 도쿄 도심에서도 아주 싸고 작은 집을 찾아냈다. 집이 워낙 좋으니 뭘 들여놓으려야 들여놓을 수가 없다. 결국 어떤 가구도 들이지 않았다. 그의 집에는 전등, 라디오, 노트북, 휴대전화밖에 없다. 옷은 열 벌쯤밖에 없고 화장품도 거의 없다. 책도 다 읽고 나면 근처 북카페에 가져다준다. 밤에 불을 끄고 작은 집에 홀로 누우면 멀리서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린다. 그의 집은 그야말로 여백이 가득하다.
에미코는 돈이란 게 참 묘하다고 말한다. 남녀관계와도 비슷하다는 것이다. “집착할 때는 손에 쥐이지가 않아요. 쓰고 싶은 곳이 많고 벌어들이고 싶을수록 돈은 잘 안 모이거든요. 반대로 돈에 관심이 없어지면 돈이 슬슬 모여요. 제 앞에 차곡차곡 쌓이는 거죠.”
이웃에게 돈을 쓰는 미니 빌 게이츠: 그렇다고 에미코가 각박하게 산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에미코는 웃으며 말했다. “매일 아주 열심히 돈을 쓰려고 노력해요. 그런데 아무리 열심히 돈을 써도 돈이 좀처럼 줄어들지 않으니 오히려 걱정이에요.”
돈은 어디에 쓸까. 에미코는 ‘이웃’에 쓴다고 했다. 그의 집 근처에는 일본에서 찾아보기 힘든 오래된 손두부 가게가 있다. 아주 맛있는 빵 가게도 있고 아주 정성스럽게 커피를 내놓는 작은 카페도 있다. 에미코는 매일매일 자전거를 타고 그런 곳들을 들러서 두부나 빵을 많이 산 다음 친구들에게 나눠주곤 한다. 그러면 친구들도 정말 맛있다면서 그 가게에 찾아온다.
노인이나 젊은이가 자신의 인생을 걸고 운영하는 작은 가게들, 그들을 응원하기 위해 에미코는 매일매일 돈을 쓴다. 에미코는 이를 두고 일종의 풀뿌리 운동, 들불 운동 같은 것이라고 했다. “일본 총리는 아베 신조지만, 저는 내 이웃과 우리 동네의 총리가 나라고 생각하고 살거든요. 내가 내 이웃의 주인이고 대장인 거죠. 신나지 않나요?” 에미코는 그렇게 평생 모으고 번 돈을 이웃에게 아낌없이 투자해 그들이 잘살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살고 싶어 한다. “내가 가진 걸 그들을 위해 다 쓰다가 죽는 것이 꿈”이라면서 스스로를 ‘우리 이웃의 미니 빌게이츠’라고도 했다. 빌 게이츠처럼 돈이 엄청나게 많지는 않지만, 이웃들을 위해 소소하게 투자할 정도의 돈은 자기에게도 있으니 ‘미니 빌게이츠’라고 불러주면 좋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돈을 쓰고 살다 보면 언젠가는 죽기 전에 이웃을 위해 ‘이나가키 재단’ 같은 것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몰라요.”
제2장 핑계 따윈 필요 없다_ 악조건을 자산으로 만든 사람들
영어 한마디 못해도 열정, 성실, 정직으로 성공하다
‘돈 안 받고 일하겠다. 일단 써 달라. 마음에 들면 그때 월급을 달라.’ 스물일곱 살이었던 송진국 회장은 영어로 이렇게 휘갈기듯 쓴 종이를 화장품호사 코스메틱 스페셜티 랩 사장에게 내밀었다. 아주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 1981년 미국 오클라호마로 건너간 직후의 일이었다. 2차 오일쇼크로 미국 경제도 휘청거리던 시절이었다. 애초에 취직하고 싶었던 정유회사는 이미 직원을 2,000명이나 해고해 고용할 여력이 없다고 했다.
수소문 끝에 한 화장품회사를 찾아갔으나 역시 사람을 뽑을 계획이 없다고 했다. 그는 사정을 한 번이라도 만나게 해달라며 로비에서 버텼다. 사장이 로비로 내려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송진국 회장은 취직을 하고 싶다고 말했으나 사장은 잘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영어가 짧은 탓이었다. 황급히 종이를 꺼냈다. 펜을 쥐고 써내려갔다. ‘나는 한국에서 화학을 공부했다. 화장품 연구원으로 일을 잘할 자신이 있다. 돈은 받지 않겠다.’ 사장은 재밌다는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오케이. 그럼 내일부터 출근하세요.” 미국에서의 첫 취직이었다.
브로큰잉글리시로 회사에서 1등이 되다: 나테라인터내셔널은 가족들이 100퍼센트 지분을 갖고 있는 패밀리 기업이다. 빚이 하나도 없는 기업으로도 알려져 있다. 유니레버, 피앤지, 로레알 같은 공룡 기업들과 경쟁하고 있지만 밀리지 않는다. 현재 남미를 비롯, 캐나다ㆍ일본ㆍ동남아 등지에 진출해 있고 모두 현지 유통업체를 통해 제품을 판매한다. 그러나 이 회사는 하루아침에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송 회장은 그저 묵묵히 일해 온 시간이 쌓여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처음에는 영어 한마디 못하는 무급 연구원에 불과했다. 다른 미국 직원들보다 돋보이려면 성실함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회사에 앉아 미국인 동료들을 관찰했다. 뜻밖에도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는 직원이 그다지 많지 않아 보였다. 심한 경우엔 시간만 때우고 가는 사람도 종종 눈에 띄었다. 송진국 회장은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이들과 반대로 일해야겠구나.’
누구보다 일찍 출근했고 가장 늦게 퇴근했다. 단순히 엉덩이를 오래 붙이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쌓인 업무를 빨리빨리 제대로 처리했다. 2주쯤 지났을까. 회사에서 그에게 월급을 주기 시작했다. 800달러였다. 다시 몇 개월쯤 지났을까. 회사는 연구실 열쇠를 송진국 회장에게 맡겼다. 매일 연구실 문을 열고 닫는 이가 그였기 때문이다. 2년쯤 지나자 이번엔 아예 연구실장 직함을 줬다.
직위가 높아졌다고 송진국 회장의 태도가 바뀌진 않았다. 여전히 묵묵히 주어진 일을 했다. 그간 연구한 내용을 정리해 화장품으로 여드름을 다스리는 방법에 대한 책도 썼다. 그러다 회사가 곧 파트너들끼리의 싸움으로 여러 개로 쪼개질 위기에 놓였다. 다들 부지런하고 성실한 그를 제품 개발팀장으로 데리고 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송진국 회장은 그때 어느 곳도 택하지 않고 미련 없이 회사를 나왔다. 그만의 회사를 직접 차리기 위해서였다. 1985년쯤의 일이다.
아무리 창피해도 세 번은 가라: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 송진국 회장은 직접 월마트, K마트 등을 다니며 제품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그때도 여전히 영어는 짧았다. 바이어들은 그의 앞에선 열심히 웃고 박수를 쳐줬으나, 뒤돌아서선 한마디도 못 알아듣겠다고 했다. 그래도 송진국 회상은 그들을 다시 찾아갔다. 두 번째 세 번째 방문할 땐 그들도 웃음을 거두고 정식 계약을 체결하고 제품을 구입했다. 송진국 회장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말도 제대로 못하는 동양인 사업가, 그럼에도 그는 창피를 모르고 열심히 설명했다. 두 번째 가면 다들 그의 얼굴을 보고 놀라곤 했다. ‘아, 미스터 송! 또 왔어요?’ 하면서. 그땐 제품을 실제로 써보고 테스트해봤다. 세 번째 가면 결국 샀다. ‘제품 참 좋던데요!’라고 하면서. 송진국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망신당했다고 창피하다고 물러설 거면 애초에 미국에 오지 말았어야 했고, 사업도 시작하지 말았어야죠!”
실수 덕에 이기고 앞으로 나간다: 송진국 회장은 스스로를 어릴 때부터 쓸데없는 일을 많이 했던 아이로 설명한다. 어머니 말은 잘 듣질 않았다고 했다. 하지 말라는 건 많이 했고, 가지 말라는 곳도 잘 갔다. 대학생 시절 주말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런저런 장사와 아르바이트를 했다. 시장에서 땅콩도 팔았고 길거리에서 엿도 팔았다. 대학 졸업 후엔 피어리스에 입사해 1년 정도 연구원으로 일했다. 동진제약으로 옮겼고 연세대 대학원에서 경영학도 공부했다. 그래도 늘 더 큰 세상이 궁금했다. 미국 비자를 받자마자 그렇게 이민을 떠나왔다.
회사를 운영하면서도 그는 누가 시키지 않는 혼자만의 도전에 몰두해왔다. 빚 없이 일하려고 애썼다지만, 그렇다고 혁신까지 포기한 건 아니었다. 연구팀을 언제나 회사의 중심에 놓고 생각했다. 직원이 제품 개발을 하면서 실수하거나 실패해도 절대 문책하지 않았다. 엉뚱한 아이디어를 낼수록 칭찬하고 상을 줬다. 토론도 많이 시켰다. 생각이란 좌우, 상하, 시계 방향, 시계 반대 방향으로 다 흘러야 막힘이 없이 문제가 풀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제품 하나를 개발해도 이게 최선인지 몇 달이고 토론하고 고민해보라고 했다.
물론 그럼에도 때론 실패했다. 가령 1987년 ‘소페이스’라는 남성 화장품을 론칭했다. 야심차게 스킨ㆍ로션ㆍ세럼까지 미국 대형마트에 쫙 깔았지만 소비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 후에도 송진국 회장은 크게 주목받지 못한 브랜드를 종종 내놨다. 그러나 그는 그래도 나름 멋진 제품이었고 자신이 꿈꾸던 것을 실현시키는 경험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고 했다. 현재 송진국 회장은 미국 특허 열한 개를 갖고 있다. 그는 더 많이 실수해서 더 많은 특허를 따내보겠다고 한다.
제4장 손익만 따지는 계산기를 버려라_ 확신의 기적
쓸모없는 고물을 최고의 보물로 만든 중고나라 대통령
‘중고나라’ 대표 이승우가 2012년 초 결혼하고 처음 산 가구는 12만 원짜리 3인용 소파였다. 싼 맛에 샀지만 누워 있으면 허리가 아팠다. 한 달을 참다 자신이 운영하는 인터넷 장터에 9만 원에 내놨더니 10분도 안 돼 연락이 왔다. 동네 파출소 순경이었다. “고 사이즈가 우리 파출소 민원 응접용으로 딱이겄소!” 순경은 바로 화물차를 불러 소파를 실어 갔다.
“그 소파는 내겐 잘못 사들인 물건이었지만 순경 아저씨에게는 안성맞춤이었던 거죠. 나는 소파를 치워서 속 시원했고 순경 아저씨는 찾던 소파를 싼값에 들였다고 흡족해했고요. 물건이라는 게 그렇게 돌고 돌다 보면, 모두에게 좋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2003년 12월 네이버 카페로 처음 문을 연 중고나라는 현재 우리나라 최대 온라인 커뮤니티이자 중고 거래 장터로 꼽힌다. 이들이 내건 구호는 자원의 선순환. 누군가가 쓰다 내놓는 물건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넘어가는 과정에서 좋은 일이 생긴다는 뜻을 담았다. 저성장 시대에 딱 맞는 얘기여서일까. ‘카페’였던 중고나라는 어느덧 ‘나라’가 됐다. 연간 방문자 수가 1억 9,000만 명, 회원 수는 네이버 카페와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을 합쳐 2,100만 명 정도다. 2016년 한 해 성사된 중고 거래 건수는 6,000만 건에 이른다. 대한민국 사람 열 명 중 네 명은 중고나라를 이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1초에 58명 왔다 가는 장터: 2014년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선 주인공 전지현이 아끼던 가방을 중고나라에 몽땅 내놓는 장면이 나왔다. 중고나라 게시판에 물건을 등록하면서 전지현은 실수로 상대역 배우 김수현의 전화번호를 연락처로 남겼다. 김수현은 이후 끊임없는 문자메시지 세례를 받았다. ‘운포인가요?’ ‘에눌은 안 되는 건가요?’ 같은 내용이었다.
중고나라라는 한 온라인 커뮤니티가 어디까지 우리 삶에 파고들었는지를 보여주는 드라마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이승우도 이 얘기를 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중고나라 회원들끼리만 쓰던 인터넷 용어가 어느덧 보통명사가 돼버렸어요. 운포(운송비 포함), 택포(택배비 포함), 에눌(물건 값 깎아줌), 미개봉(뜯지도 않은 중고품), 쿨거래(기분 좋은 거래), 드림(돈 안 받고 그냥 줌) 같은 말을 너도나도 쓰는 세상이 된 거죠. 그게 나중엔 드라마 대사로도 쓰이고. 어느덧 이 시대의 문화가 된 겁니다. 카페를 만든 건 저와 초창기 멤버들이었지만 지금의 중고나라는 제가 만든 게 아닌 거죠.”
초창기 중고나라에선 카메라, 렌즈, 한정판 CD 같은 것들이 많이 팔렸다. 처음엔 아무래도 수집벽이 있는 사람들이 주로 찾는 공간이었다. 아내 몰래 쌈짓돈으로 값비싼 물건을 수집하는 남자들 말이다. 특수한 곳으로 여겨졌다는 뜻이다. 그러다가 2008년 미국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불황이 왔고, 너도나도 중고를 사고팔기 시작했다. 중고나라 회원은 그때 한번 폭증했다. 회원이 200~300만 명에서 갑자기 500만 명이 넘어섰고, 금세 1,000만 명이 되고 곧 2,000만 명이 됐다.
돌아보면 우연이기도 하고 또 운명이기도 했다. 애초 중고나라를 처음 만들 때만 해도 이승우는 ‘중고’ 자체가 장사가 될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저 미국 페이팔 같은 온라인 결제 시스템을 만들어서 그걸로 돈을 벌어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렇게 고민해서 개발한 프로그램이 바로 ‘안전결제’였다. 이 시스템이 잘 돌아가는지 테스트하려면 커뮤니티가 필요했다.
사람들이 이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뭔가를 사고팔아야 했다. 아무래도 중고품을 사고팔 때 이 프로그램이 유용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중고나라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정작 안전결제 프로그램은 당시 크게 히트한 미국 페이팔에 밀려 빛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이승우도 그렇게 낙담하고 있었다.
중고나라는 무료로 운영했다. 수수료를 받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고 싶진 않았다. 이러한 운영 방식은 시장 갈 때 입장료 안 받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이승우에게 이곳은 누구나 손쉽게 오고가는 일종의 장터였다. 사람들은 이곳 중고나라에 모여서 와글와글 만나고 그가 벌여놓은 판에 모여 떠들었다. 그런 걸 보는 것만으로도 재밌고 즐겁다고 생각했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켜주고 있다는 희열, 처음엔 그게 다였다. 그러나 중고나라는 그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거대한 사업 모델로 자라나고 있었다.
기업으로 거듭난 커뮤니티: 중고나라 이용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용자가 늘어나자 문제점도 함께 커졌다. 사기 거래가 함께 늘어난 것이다. ‘입금 먼저 하자고 해서 돈을 넣었더니 곧바로 도망갔다’는 식의 신고가 끊이질 않았다. 중고나라 운영진이 사기 판매자를 경찰에 신고하고 그를 강제 탈퇴시키는 식으로 열심히 조치를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쯤 되자 자원봉사자들이 나타났다. 카페 운영을 돕겠다는 이들이었다. 이들과 함께 ‘이용자 수칙 및 이용 제재 규정’은 점차 빽빽해졌고 길어졌다. 그래도 사기 거래를 완전히 근절할 순 없었다.
2014년 이승우는 결국 중고나라를 법인화하기로 결정한다. 회사 이름은 ‘큐딜리온’이었다. ‘질문’과 ‘엄청난 수’라는 뜻의 두 단어를 합친 말이다. 한마디로 세상의 모든 질문을 소화하는 회사가 되고 싶다는 다짐을 담았다. 2015년에는 엔젤 투자자 및 벤처캐피털에서 80억 원가량을 투자받았다.
2016년 4월 개선 사항을 반영해 새롭게 내놓은 중고나라 모바일 앱은 두 달 만에 100만 건 이상의 다운로드를 기록했다. 사기 거래를 막기 위한 ‘큐싸인’이라는 시스템도 개발했다. 사기꾼이 즐겨 사용하는 사기 패턴을 읽어내는 시스템을 개발한 것이다. 이승우는 “앞으로 중고 거래를 할 때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상대편이 사기꾼이라는 결론이 나오면 거래 상대자에게 빨간불 경고가 보이는 식으로 한층 더 진화된 서비스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지체장애인과 고물상이 스타가 되는 회사: 최근에 폐쇄형 공동구매 쇼핑몰 ‘비밀의 공구’, 직접 방문해서 중고품을 실어주는 ‘주마’ 서비스도 시작했다. 2017년 1월에 시작된 ‘비밀의 공구’는 현재 가입자 수가 벌써 10만 명이 넘는다. 싸고 품질 좋기로 소문난 물건을 짧은 시간에 팔아치우는 공동구매 쇼핑몰이다. 이곳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 검색해도 보이지 않는다. 이곳에 먼저 입장한 회원에게 초대를 받고 가입 절차를 밟아야만 물건을 살 수 있다. ‘유통 질서를 해친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이승우는 이 서비스를 폐쇄 형태로 운영했다. 미리 가입된 회원 중 누군가가 초대하지 않으면 이 사이트를 찾아낼 수가 없도록 한 것이다.
잘될 것이라는 예상은 그야말로 보기 좋게 적중했다. 거래액은 2016년 8월 3,000만 원에서 그해 12월에는 8억 원을 넘어섰다. 비밀의 공구에선 ‘MJ(Multi Jockey)’라 불리는 이들이 홈쇼핑의 쇼핑 호스트처럼 뛰어다닌다. 이들이 직접 어떤 물건을 팔지 기획하고, 유통망까지 확보한 다음 실시간 동영상 방송으로 물건을 파는 식이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 물건을 파는 MJ도 있다. 은퇴한 개그맨 출신이 이 중 제법 된다. 개그 프로그램이 사라져 갈 곳을 잃은 개그맨들이 이젠 MJ로 새로운 길을 찾게 된 것이다.
이들은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공동구매를 진행했다. 때론 이해를 돕기 위해 공장이나 생산지를 방문하고, 옷을 입어보거나 직접 먹어보는 식의 ‘시범’도 몸을 아끼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이들이 내놓은 물건은 대부분 완판된다. MJ 전대위가 소개한 ‘추억의 아케이드 게임기’는 2016년 10월에 공동구매를 시작하자마자 두 시간 만에 준비된 50대를 모두 팔았다. 한 대당 50만 원으로, 총매출은 2,500만 원이었다. 회원들이 더 팔라고 요구하면서 2차 공구도 진행했다. 200대를 또다시 모두 팔았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몇몇 MJ는 덕분에 월 매출을 몇 억씩 올리게 됐다.
‘주마 서비스’도 화제다. 중고 물품을 팔 때 가장 힘든 것이 덩치 큰 물건을 옮겨야 한다는 점이다. 이승우는 여기에 착안해 직접 화물운반 기사가 찾아가 팔고 싶은 중고 물품을 치워주고 팔아주고 사주는 식의 서비스를 시작하기로 했다. 기사는 전국 곳곳에 퍼져 있는 수백 명의 고물상을 활용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고객의 수요를 정확히 읽은 서비스였다. ‘우리 집에 와 달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공급이 수요의 절반을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가 됐다. 전국 고물상들도 반색했다. 장사하기 쉽지 않은 요즘에 중고나라와 손을 잡자마자 찾는 이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요즘 중고나라와 일하는 고물상 기사들은 예전과 달리 돈을 상당히 번다고 했다. 이승우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이 고물상 기사 분들이 ‘중고나라 덕분에 살 만해졌다’고 하시는 말 들으면 기분 참 좋죠. 중고나라는 사실 이렇게 내 낡은 물건이 누군가에게는 보물이 된다는, 이른바 ‘자원의 선순환’ 개념을 내세운 커뮤니티였어요. 주마 서비스는 바로 이 자원의 선순환을 보다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서비스였고요. 일부러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이 서비스를 하면서 함께 일하는 분들 형편이 나아지는 효과까지 보게 됐네요. 이젠 이런 서비스를 아예 베트남과 같은 외국에까지 확대하고 싶어요. 요즘 같은 저성장 시대에 우리뿐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도 함께 잘살아봐야죠.”
2016년 이승우는 뇌병변, 지체장애인 네 명을 정직원으로 채용했다. 이들은 중고나라에 올라오는 사기ㆍ불법 거래를 감시하고 신고하는 일을 담당한다. 이들은 뜻밖에도 일을 대단히 잘해냈다. 책임감이 투철했다. 하루 270건이 넘는 사기 거래를 잡아내기도 했다. 작년에는 이들 장애인 직원 전원에게 우수사원 시상을 했다. 장애인 직원은 올해 일곱 명으로 늘었다. 이승우는 이들에게서 일하는 자세를 처음부터 다시 배우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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