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자의 습관(최장순 지음)
▣ 저자 최장순
크리에이티브디렉터, 엘레멘트컴퍼니(LMNT COMPANY) 대표, 플러스엑스(PlusX) 전략 자문 이사. 고
려대 언어학 전공. 주로 기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지난 10여 년간 GUCCI, 인천공항, 현대건설,
CU, CJ, 대한축구협회, 삼성전자, LG, 현대자동차, 롯데시네마 등 국내외 유수 기업의 브랜드 전략
및 철학, 네이밍, 디자인, 인테리어, 커뮤니케이션, 마케팅, 브랜드 매니지먼트 등을 컨설팅해왔다. 디
자인 스튜디오 플러스엑스와 함께 텐센트비디오, 왕이카올라, 알리페이, 블루홀의 BX(브랜드 경험)
전략을 자문했다. 2017년, 『본질의 발견』을 썼다.
▣ Short Summary
이 책은 기획의 방법론이나 공식을 달달 외워 흉내 내봤지만, 막상 잘되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는 누
군가를 위한 책이다. 오늘을 빡빡하게 살아가는 당신에게 약간의 여유와 다소간의 용기를 주고 싶었
다. 이 책을 한마디로 요약하라고 한다면, ‘별것 아닌 습관들이 어떻게 기획력을 증대시키는지 보여주
는 텍스트’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못한 누군가를 보면 위안을 얻고 삶에 용기를 얻는다. 그래서 많은 이들에게 용기
와 위로를 줄 수 있는 내 비밀 하나를 밝히겠다. 중학교 때 마지막으로 치렀던 IQ 평가에서 내 점수
는 109밖에 되지 않았다. 100을 간신히 넘는 이 IQ는 아마도 동물과 인간을 구분 짓는 어느 경계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참고로 보노보침팬지의 IQ가 120이라고 한다. 그런 나도 지금 기획을 하며
먹고산다. 기획이라는 걸 통해 브랜드를 분석하고, 브랜드를 만들고 있다. 기획과 크리에이티브를 어
려워하는 당신께 용기와 위로를! 기획이라는 단어가 주는 억압감으로부터 해방되기를/ 공식에서 벗어
나 자유롭게 생각하고 즐겁게 상상하는 습관을 기르길. 기획의 방법론, 혹은 공식을 달달 외우는 일
은 이제 그만하기를. 생각이 자유로워지면, 다양한 방법론들을 자유롭게 나만의 방식으로 요리할 수
있게 된다. 기획에는 천재가 없다. 마찬가지로 기획에는 정석도 없다.
▣ 차례
프롤로그
Part 1. 기획자의 생활습관
생활의 발견 / 관찰의 힘 / 정리력
Part 2. 기획자의 공부습관
공부는 노력이다 / 讀, 나의 독서 이론 / 話, 대화의 격률 / 作, 표현 학습법
Part 3. 기획자의 생각습관
생각의 두 관점 / 발상의 힘 /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에필로그
▣ 내용요약
Part 1. 기획자의 생활습관
생활의 발견
엣지 오브 투모로우(더그 라이만 감독, 톰 크루즈 / 에밀리 블런트 주연, 2014년): 무척 좋아하는 영
화다. 톰 크루즈의 액션도 액션이지만, 영화의 시나리오가 참 좋았다.
주인공 빌 케이지는 광고인이었다. 광고 회사가 망하자 군대의 홍보 장교가 된다. 외계인과의 전쟁에
나가 용감히 싸우자는 광고에 출연해 수많은 청년들을 군대로 끌어들이는 역할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전쟁터에 직접 나가 홍보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자신은 전투 병력이 아니라며 명령에 불복하
지만 전쟁터에 억지로 끌려온다. 그리고 상관 명령에 불복해 탈영하려 한 파렴치한 군인으로 낙인찍
혀 계급까지 병사로 강등된다. 케이지는 첫 전투에 참여하자마자 외계인의 피를 뒤집어 쓴 채로 죽임
을 당한다. 외계인의 피에는 시간을 되돌리는 초능력이 담겨 있어, 그는 전투에서 죽을 때마다 다시
당일 아침으로 돌아와 영원히 하루를 반복하는 군인이 되고 만다.
영원히 같은 일상을 반복하다 보니, 그는 자기에게 일어날 모든 일을 알게 되고, 무수한 전투의 반복
을 통해 실력이 뛰어난 전투병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러저러한 우여곡절 끝에 외계인을 이길 수 있는
새로운 방법들을 찾게 되고 마침내 외계인을 전멸시킨다는 이야기다.
이 영화의 원작은 사쿠라자카 히로시 글, 아베 요시토시 삽화의 일본 소설 『올 유 니드 이즈 킬(All
You Need Is Kill)』이다. 같은 내용인데 제목이 다르다. 일본 원작의 타이틀은 주인공의 행위 자체에
초점을 맞추었다. 외계인을 죽이는 것이 계속 반복된다는 점이 강조된 듯하다. 이에 반해 할리우 드
의 인식은 웬일인지 보다 철학적이다. 엣지 오브 투모로우(Edge of Tomorrow), 내일의 가장자리. 내
일로 가는 듯한 순간에 다시 오늘의 시작점으로 되돌아간다는 시간에 대한 인식을 담고 있다.
영원히 동일한 사태가 반복되는 상황, 왠지 우리 일상과 비슷하지 않은가? 매일 학교에 가야 했던 초
중고등학생의 일상. 1~8교시 후 자율학습. 이후 좀 더 자유로워지긴 했으나 별다를 것 없이 비슷한
나날을 반복해온 대학 생활(군 생활의 엄격한 시간 관리는 굳이 예시로 들지 않겠다). 매일 아침 일어
나면 출근해야만 하고, 야근을 밥 먹듯 하고도 억지 회식에 이른 아침 출근에 몸을 혹사시키고, 그
가운데에서도 버티는 삶을 살고 있는 이 땅의 많은 직장인들. 하지만 좀처럼 바라는 내일은 오지 않
고 언제나 내일의 가장자리에 머물러 또 하루를 반복하고 있는 우리들.
감독은 바로 그 지점을 놓치지 않는다. 바에 앉아 술을 마시는 케이지의 한숨과 표정을 통해 수도 없
이 똑같이 반복되는 전투에 대한 지겨움, 회의감, 매너리즘을 표현한다.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비
슷하지 않은가. 니체는 ‘영원회귀’라고 말한다. 이 개념은 직역하자면, ‘동일한 것의 영원한 반복
(Ewige wiederkehr des Gleichen)’을 의미한다. 시간은 순환적이고, 동일한 사건들이 동일한 순서로
계속 반복된다는 것이다.
출근, 상사의 지적, 클라이언트의 끊이지 않는 요구, 가계 대출의 발생, 가족 문제, 취업 문제, 취업
에 성공해도 여전히 반복되는 진로의 문제, 반복되는 고민과 술자리, 이직을 해도 해결되지 않는 커
리어의 고민… 우리의 삶은 어찌 보면 ‘영원회귀’의 생(生)이라 할 수 있다. ‘반복되는 생활’은 우리에
게 주어진 공통 조건이다. 하지만 그 공통 조건하에서 그저 시간을 버티며 순응하고 살 것인지, 내일
의 가장자리를 넘어 내일로 나아가려 노력할 것인지, 그 삶의 태도를 결정짓는 건 각자의 몫이고 각
자의 능력이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Zarathustra)의 입을 빌어, 입속에 뱀이 들어가 목구멍을 꽉 물어버린 한 양치기
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 양치기는 몸을 비틀고 캑캑거리고 경련을 일으키며 얼굴을 찡그리고 있다.
아마 숨이 붙어 있는 한 계속 그 상태를 유지하다 죽을 것이다. 이 상황을 보고 차라투스트라는 손으
로 뱀을 잡아당기고 또 잡아당기지만 아무리 힘껏 당겨도 뱀은 꼼짝하지 않는다. 그러자 차라투스트
라는 이렇게 명령한다. “뱀 대가리를 물어뜯어라! 물어뜯어라!” 양치기는 뱀 대가리를 단숨에 물어뜯
고 멀리 뱉어내고는 벌떡 일어나 환히 웃었다. 니체는 이 양치기가 더 이상 그 전의 양치기가 아니라
‘변화한 자’, ‘빛으로 감싸인 자’가 되었다고 말했다. 양치기는 생을 억누르는 필연적 조건을 극복한
사람이다.
영원할지도 모를 동일한 조건 속에 사는 우리들, 그 안에서 ‘내일의 가장자리’에 머무르는 대신 조금
씩 꾸준히 생활에 틈새를 낼 수 있는 ‘차이’의 습관을 마련할 수 있다면 좀 더 나은 ‘내일’을 기획할
수 있지 않을까. 동일한 ‘내일’이 아니라, 좀 더 다른 ‘내일’을 기획하기 위한 작은 차이의 연습은 지
금 우리 생활을 다른 무언가로 바꿔준다. 이 작은 차이의 습관을 통해 우리는 생활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한 습관이 반복되면 우리는 일체의 반복되는 억압의 조건들을 극복해 ‘살아 움
직여야 한다’는 당위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비로소 ‘생활(生活)’은 ‘살아 움직인다.’
생활의 의미를 발견하고 실천할 때 우리는 ‘환히 웃는 자’, ‘변화한 자’, ‘빛으로 감싸인 자’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좀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작은 차이의 연습. 내일의 기획은 공식이나 방법론, 프로세스
따위가 아니라, 바로 이곳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관찰의 힘
관찰은 한마디로 ‘보고 살피는 것’이다. 볼 관(觀), 살필 찰(察). 시선은 언제나 깨어 있어 보는 것에
민감해야 한다. 익숙한 풍경 속에서 미세한 변화를 살필 줄 아는 섬세함이 필요하다. 그뿐이다. 관찰
은 그리 거창한 게 아니다. 선배의 안경테가 바뀐 것을 알아보고 “안경 바꾸셨네요?”라고 말하는 것,
동료에게 “헤어스타일 너무 멋지게 바꿨는데?!”라고 이야기해주는 것, “저 가게 결국 문 닫았구나!”
하고 거리의 변화를 눈치채는 것. 이런 일상적 행위가 모두 관찰이다.
관찰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건 바로 그 변화의 지점이다. 무엇이 그대로 있고, 무엇이 변화했는지
파악해내는 관심이 필요하다. 감각을 갖춘 사람들은 모두 감각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세상에 관심
을 보이고,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을 구분 짓는다. 그리고 나에게 들어오는 정보를 파악한 뒤
내 생각과 행동에 반영할 정보들을 취사선택한다.
아담에게 사과를 파는 법: 창세기 3장 4절을 보면 뱀이 여자를 유혹해 선악과(사과)를 따 먹게 하는
장면이 묘사돼 있다(무신론자들이여, 갑자기 등장하는 종교 텍스트 이야기를 불편해 마시라. 나 역시
종교가 없다. 기독교인이여, 성서를 텍스트로만 다루는 태도를 용서하시라. 필요하다면 불경이나 꾸란
도 텍스트로 다뤄주겠다).
(3:4) 그러자 뱀이 여자를 꾀었다. “절대로 죽지 않는다.”
(3:5) “그 나무 열매를 따 먹기만 하면 너희의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
느님이 아시고 그렇게 말하신 것이다.”
(3:6) 여자가 그 나무를 쳐다보니 과연 먹음직하고 보기에 탐스러울뿐더러 사람을 영리하게 해줄 것
같아서 그 열매를 따 먹고 같이 사는 남편에게도 따주었다. 남편도 받아먹었다.
(『공동번역 성서』, 가톨릭용, 대한성서공회, 1997.)
‘뱀’은 인류 최초의 사과 마케터다. 그것도 시장을 100퍼센트 점유한 ‘성공한 세일즈맨’이다. 당시 소
비자는 단 두 명뿐이었는데, 결국 모든 소비자에게 사과를 판매했으니까. 뱀도 남자보다 여자를 설득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나 보다. 그래서 남자가 아니라 여자에게 말을 건다.
이 뱀 마케터에 따르면, 먼저 ‘사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진다.’ 눈이 밝아진다는 것은 눈에 빛이 들어
온다는 것이고, 이는 영어로 번역하면 ‘인라이트먼트(Enlightment)’이다. 이 단어는 ‘빛이 들어온다’,
‘빛을 밝히다’라는 의미로 ‘계몽’, ‘깨달음’을 의미한다. 사과를 먹으면 ‘맛이 있다’, ‘영양가가 높다’도
아니고, ‘지혜가 생긴다’는 말을 남긴 것이다. 즉, 사과를 먹으면 ‘신처럼 지혜를 얻게 된다’고 했던
것이다.
그 한마디를 하자 여자는 스스로 생각한다. ‘과연 먹음직하고 보기에 탐스러울뿐더러(사과의 기능적
편익 - 맛있다) 사람을 영리하게 해줄 것 같다(사과의 자아표현적 편익 - 영리한 사람)’고 느낀다. 결
국 구매를 결정한다. 사과를 한입 베어 먹는 것이다. 뱀은 여자에게 구매 컨펌을 획득한다!
여자를 설득하면 일이 수월하다. 그 후 창세기 기자는 자초지종에 대한 일언반구 없이 “남편도 받아
먹었다”라고만 기록한다. 남자의 구매 결정은 매우 단순했던 것이다. 남자로서 아쉬운 결론이지만, 인
류 태초에도 구매 결정의 고유 권한, 컨펌의 주체는 여자였다.
강남 한 자동차 매장에서 내가 엿들었던 부부의 대화(남편은 SUV를 사고 싶고 아내는 세단을 원해
서, 남편이 아내를 열심히 설득하고 있었다)와 겹쳐진다. 남자의 물건처럼 보이는 ‘자동차’에 대해서
도 구매 결정에 주요한 역할을 하는 존재가 ‘여자’라는, 매우 중요한 인사이트를 얻게 된 대화였다.
몇 년 후, 모 자동차 회사의 SUV 차량의 브랜드 전략과 브랜드 네임, 세일즈 아이디어를 기획하게
되었다. 동료들과 브랜드 전략, 컨셉, 네임을 일사천리로 마무리했다. 운이 좋았다. 론칭 일정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판매였다. 우리는 외부 전문가들과 함께 다양한 토론을 진행했고,
모두가 동의한 관점은 ‘구매 컨펌은 여자가 한다’는 변치 않는 진리였다.
비록 SUV가 남자들의 장난감, 소위 어덜트 토이(Adult Toy)라고는 하지만 남자들이 이 차를 구매하고
운전하면 얼마나 좋은지 말해서는 아내를 설득할 수 없을 것이다. 메시지 포인트는 여자를 향해야 한
다. 이 차량의 특징은 이전 SUV 모델보다 트렁크가 넓어졌다는 것. ‘트렁크가 넓다’고 말해야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건 “내가 널 얼마나 아끼는 줄 알지?”라고 말하는 매우 정직하고 매력 없는 태도다.
그보다 조용히 아끼는 사람 책상에 음료수를 하나 놓고 간다거나, 노골적이지 않게 그 사람을 위해
양보하거나 하는 태도가 훨씬 매력적이다. ‘넓어진 트렁크’를 표현할 만한 보다 매력적인, 그러면서도
구매 결정권을 지닌 여성들을 위한 메시지가 필요했다.
우리가 타겟으로 선정한 고객군의 라이프스타일을 조사해보니 여성들이 스토케(Stokke)라는 유모차를
선호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스토케는 유모차계의 BMW라고 불리는 매우 비싼 가격의 프리미엄 유모
차다. 이 유모차는 다른 일반 유모차처럼 작게 압축되거나 접히지 않는다. 사이즈도 다른 유모차에
비해 엄청 크다. 볼드한 바디감을 자랑하는 이 유모차는 아이를 태우고 가는 엄마의 표정을 보다 당
당하게 만들어준다. 그녀들을 세련되고 경제적으로 부유한 여성으로 보이게 해주는 신박한 아이템이
다. 그런 스토케가 들어가는 차량은 일단 트렁크가 크다는 이야기다.
‘트렁크가 넓어졌습니다’라고 말하는 건 매력이 없었다. 우리는 ‘이 차에는 스토케가 들어갑니다’라는
세일즈 토크(Sales Talk)를 제안했다. 백번 나은 멘트였다. 참고로 이 차는 출시한 지 4개월 만에 1년
양산 목표의 두 배 가까이 판매 계약되었다.
사과 하나를 선택할 때도 여자의 말을 들어야 했던 인류 최초의 역사가 아직도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여성을 잘 관찰하고 여성의 니즈를 충족시켜주는 브랜드가 더욱 사랑받을 수 있다. 남자가 사용하는
제품인데도 구매 영향력 내지는 구매 결정권이 여성에게 있다는 말이다. 내 경험상 남자가 결혼을 하
고 나면, 80~90퍼센트 이상은 결정권이 아내에게 넘어간다. 아쉽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원망스
럽다는 이야기도 절대 아니다. 나는 내 아내를 사랑한다.
거리의 소음에도 정보가 있다: 길거리에는 활력이 넘친다. 난 사무실을 나오는 그 순간부터 리프레시
가 되는 편이다. 내가 만든 회사임에도 불구하고 사무실은 언제나 답답하다. 천국 같은 사무실? 크리
에이티브하고 리프레시를 주는 사무실? 내가 보기에 그런 건 없다.
많은 이들은 특정 글로벌 IT 기업의 사무실 문화를 부러워한다. 침대도 있고, 식사도 제공되고, 놀이
기구도 있고, 일단 폼 나니까 말이다. 하지만 난 달리 본다. 숙식이 제공되고 놀이기구까지 있다는 건
사무실을 나가지 않아도 생활이 가능하게끔 디자인되었다는 것이고, 회사 주변에 식당을 많이 찾아보
기 힘들고 워낙 집이 먼 사람들이 대부분인 미국의 상황을 대변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이런 디자인의
사무실은 ‘밥도 회사에서 먹고 집에 가지 말고 일하라’는 무언의 암시가 아닐까. 물론 농담처럼 흘리
는 말이니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길.
다시 길거리로 돌아오자. 길에서는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이 걸어 다닌다. 다양한 공
간의 첫인상(매장의 입구, 간판 등)을 접하기도 한다. 기분에 따라 생기발랄한 거리를 택할 때도 있
고, 우중충하고 어두운 길거리를 가볼 때도 있다. 트렌드를 파악하고자 한다면 그 두 부류의 곳을 균
형감 있게 다녀봐야 한다. 난 많이 돌아다니는 편은 아니지만 한번 ‘봐야겠다’ 싶으면 정말 집중해서
거리를 살피는 편이다. 그리고 길을 자주 다니는 동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는 편이다.
무언가 거리에서 영감을 얻고 관찰하고 싶다면, 일단 차를 두고 나와야 한다. 거리를 걸어야 하니까.
그리고 되도록 이어폰을 끼지 않는다. 거리의 소음 역시 중요한 단서다. 버스, 택시의 경적, 자전거
벨소리, 사람들이 걸으며 내는 소리, 부딪힐 때 미안하다는 말, 택배, 중국집 등 배달 오토바이 소음,
경찰차 사이렌, 사람들의 대화, 물건을 사라고 외치는 호객꾼의 목소리, 브랜드 매장별로 외부에 관심
을 끌고자 틀어놓은 음악… 모든 것이 거리의 소음을 이룬다.
길거리는 무정형의 오케스트라다. 그 소음들은 거리에 활력을 준다. 난 그 기운을 온몸으로 느낀다.
그리고 몸에 다음과 같은 정보들을 각인시킨다. 그곳의 교통량과 배달되는 정도, 지역 사람들의 분위
기, 유행하는 음악이 뭔지, 호객꾼은 어떤 기획으로 무엇을 제안하는지… 이어폰은 이런 모든 정보
수집을 단 한 방에 차단한다. 가급적 거리를 관찰할 땐 이어폰을 끼지 마시길! 거리를 다닐 때 이어
폰을 끼면 교통사고 위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는 점도 명심하자.
평소에 난 특별히 무언가를 의도적으로 관찰하려 들진 않는다. 다만 거리의 소음을 듣고, 간판들을
쭉 둘러보는 습관이 있다. 어떤 가게가 망하고 흥했는지 거리 간판의 역사(History)를 살피게 된다.
게다가 간판을 살피면 브랜드 네이밍 트렌드까지도 엿볼 수 있게 된다.
거리를 걸으며 사람들의 패션을 본다. 헤어스타일, 가방, 아우터 신발의 스타일, 남자는 남자대로, 여
자는 여자대로 패션을 통해 자기 몸의 어느 부분을 강조하는지도 살핀다. 그리고 다음에 내 패션을
조정할 기회가 생기면 거리에서 봤던 것을 참고한다. 별도로 패션 잡지를 보지는 않는다. 집에 텔레
비전도 두지 않았다. 그런 것이 있으면 난 완전 중독되기 때문에 스스로의 나태함과 방만함을 차단한
것이다. 대신 유행은 거리에서 파악하는 편이다.
거리의 관찰은 내 취향과 구매 생활에도 적잖은 도움을 준다. 난 신발을 사야 할 때 최소 1~2주간
길거리에서 사람들 신발만 쳐다보고 다닌다. 주로 많이 돌아다니는 색상은 무엇이고, 브랜드는 무엇
인지, 하이탑이 많은지, 컨버스가 많은지, 워커가 많은지, 구두가 많은지, 신발과 어떤 바지를 함께
매치하고 다니는지, 신발에 따른 걸음걸이들은 어떻게 다른지, 습관적으로 쳐다본다. 포멀한 구두를
신는 사람이 발을 질질 끌면서 다니는 경우는 거의 없다.
포멀한 구두를 신으며 통이 넓은 힙합 팬츠를 입진 않는다. 종종 거리에서 반복해서 보는 사람이 있
다. 벌써 시각적으로 정이 들어버린 그런 사람. 그 사람의 패션이 변하는 것을 보는 것도 즐거운 일
이다. 내가 망원역에서 자주 봤던 그 남성은 구두를 신고 수트를 입을 땐 매우 반듯한 걸음새였으나,
농구화와 배기팬츠를 입을 땐 껄렁껄렁한 걸음걸이였다. 신발과 옷은 단지 실용성이나 패션 아이템
정도가 아니라 그 사람의 태도(Attitude)를 대변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옷을 입는 행위는 태도를
입는 것이라는 의류브랜드 베트멍(vetement) 디자이너의 말이 생각났다.
마찬가지로 가방을 사야 할 땐 1~2주간 가방만 쳐다본다. 이발을 해야 할 때, 헤어스타일을 바꾸려
할 때도 거리에서 사람들 헤어스타일만 쳐다보며 다닌다. 이런 식으로 거리를 관찰하고 다니다 보면,
대략 요즘 유행이 뭔지, 어떤 컬러가, 어떤 브랜드가, 어떤 스타일이 대세인지 금세 파악하게 된다.
남들이 하고 다니는 걸 따라 할 때도 있고, 그와 정반대로 할 때도 있다. 선택은 각자의 몫. 다만 다
른 이들은 어떻게 하고 다니는지 잘 살펴보시길.
거리는 어디로 가지 않는다. 늘 그곳에 있다. 단지 조금씩 변화할 뿐이다 그 변화의 속도와 뉘앙스를
파악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많은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고, 이는 기획을 위한 좋은 자양분이 된다. 인
위적으로 만든 트렌드 보고서나 책 따위보다 거리에서의 관찰을 생활화해보자. 개인적으로 난 트렌드
관련 책은 읽지 않는다. 향후 십수 년간은 우리나라에서 발간되는 트렌드 책은 읽지 않을 생각이다.
트렌드는 최소 10년을 가야 하는 것인데, 매년 나온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표현과 단어만 바꾸
어 새로운 현상인 듯 꾸미는 태도는 정직하지 못한 분석이다. 그리고 매년 새로운 트렌드가 나올 정
도로 대한민국이 그렇게 큰 나라인가?
Part 2. 기획자의 공부습관
讀, 나의 독서 이론
좋은 책은 일단 사둔다: 나는 쇼핑하러 가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하지만 물건을 많이 사지는 않는
다. 윈도우 쇼핑은 영화 보는 것만큼 즐겁다. 비록 피곤하기는 하지만. 그래서 매장을 돌아다니기 전
에는 아무거나 조금이라도 먹어두어야 한다. 그리고 짐을 최소화한다. 어떤 아이템을 획득할지 모르
니 가급적 빈손으로 다닌다. 서점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서점을 돌아다니다 보
면, 각 분야별로 눈에 들어오는 안 사면 후회할 것 같은 책들이 있다. 실제로 수년간 그런 책들이 많
았는데, 돈이 아까워 사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어떤 사람들이 내가 사려다 포기한 그 책을 인용하고
칭찬하는 걸 보면 ‘아, 그때 살걸’ 하고 다시 서점에 가거나 온라인 사이트에 접속한다.
무슨 저주를 받았는지 내가 좋아하고 괜찮게 생각했던 책들은 대부분 절판됐다. 그중 일부는 출판사
전화해서 구매했지만 나머지는 구하지 못한 것도 많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는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반드시 샀다. 그렇게 하다 보니 어떤 날은 하루에 50만 원어치 책을 산 적도 있다. 그 달은 카
드값을 아껴야만 했고 먹고 싶은 술과 음식을 포기해야 했다. 책은 안 팔리면 바로 절판된다.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표지 디자인과 마케팅, 편집 상태에 따라서 소비자들에게 어필하는 게 다르니, 절판
되었거나 안 팔린 책이라 해서 무조건 안 좋은 책은 아니다. 개중에 훌륭한 책들이 엄청 많다(절판을
경험한 저자와 출판사에 애도를 표한다). 조금이라도 오래된 책이면 구하기 어려워지곤 하니 괜찮다
싶으면 가급적 절판되기 전에 사두는 것이 장땡이다.
한번은 엄청 훌륭한 원서를 발견했다. 그래서 절판이 두려워 바로 신용카드로 계산하고 뿌듯해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 책을 훑어본 뒤 미소를 띤 채 책장에 정리하려다 보니, 아뿔싸! 그 책이 집
에 있는 것이 아닌가. 때론 그렇게 두 권씩 갖고 있는 책도 있다. 그런 나를 보며 내 가족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그 많은 책을 다 읽고 또 사는 거야?” 다 읽었을 리 없다고 답한다. 그런데 왜 자꾸
책을 사느냐고 한다. 집에 읽는 거나 다 읽고 사라고 한다. 하지만, 책은 라면이 아니다. 한 봉지 다
먹어야 다른 한 봉지를 먹는 라면 같은 게 아니란 말이다. 지금 읽지 않는 책들도 언젠가 읽게 돼 있
다. 책은 좀 묵혀둬도 괜찮다. 요즘 난 3~4년 전 묵혀뒀던 고전들과 이 책이 여기 왜 있을까 싶을
정도로 생소한, 하지만 분명 내가 구입한 책들을 읽고 있다. 지금은 팔지 않는 책들이다. 좋은 책을
미리 잘 사둔 스스로가 대견하다. 좋은 책이 눈에 들어오면 무조건 사둘 것. 손해 볼 일은 전혀 없다.
Part 3. 기획자의 생각습관
발상의 힘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보게 될 때 사람들은 감동하고 그 아이디어를 함께 즐기게 된다. 기획자 역시
그러하다. 다만 기획자는 한 가지를 더 고민한다. ‘저런 생각을 대체 어떻게 한 거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한 자신을 원망할 때도 있다. 그리고 ‘저거 예전에 내가 생각했던 건데’ 하며 스스로를 위로할
- 9 - 기획자의 습관
때도 있다. 하지만 ‘하지만 난 생각만 하고 실행하지 못했잖아’ 하며 이내 스스로를 질책한다. 기획자
의 생활은 다소 피곤하다. 남들이 고민하지 않는 것을 고민해야 하고, 그 고민을 다른 방식으로 보여
줘야 한다. 아무리 전략적 논리가 탄탄하고 케이스 스터디를 차근차근 했다 해도 마지막에 보여주는
비즈니스 모델, 브랜드 네임, 디자인, 마케팅 프로그램, 광고 시안, 상품 아이디어 등이 시선을 끌지
못한다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간다.
클라이언트들은 그 모든 것들이 ‘자기다움’과 ‘참신함’을 갖추길 바란다. 하지만 모든 기획자가 매일같
이 참신한 것만 생산해내기는 어렵다. 기획자는 무거운 돌을 끌고 산 정상을 향하는 시시포스
(Sisyphos)이다. 무거운 기획이라는 돌을 굴려 마침내 결과물을 만들어 프로젝트가 끝나면, 또다시 정
상에서 굴러 떨어진 그 돌을 끌고 새로운 프로젝트로 향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대부분 건
강한 삶을 살지 못한다. 술과 담배는 기본이고, 수면 시간이 부족하다. 산 정상에 돌을 올려야 한다는
이유 외에는 다른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는 기계적 삶을 사는 기획자들이 많다. 하지만 진정한 기획자
는 정신과 감성이 늘 깨어 있고 활기차다. 세상의 모든 의미를 파악하려는 듯 눈은 영롱하고 새로운
의미를 만들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감각을 다 활용한다.
새로운 기획을 내보이려면 세상을 언제나 낯선 존재로 인식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세상은 언제나 낯
선 관찰 대상이다. 낯선 세계 속에서 모골(毛骨)은 모두 곤두서 있을 정도로 날카로울 때가 많다. 그
렇게 긴장감 속에서 관찰하고 습득된 인식과 판단의 덩어리들은 새로운 발상을 위한 시작을 알린다.
세상은 의미로 가득 차 있다. 세상은 감상하고, 이해하고, 숨은 무언가를 파악하기 위한 대상이다. 기
획자에게 세상은 언제나 익숙하면서 낯설다. 잡히는 듯싶더니 어느새 빠져나간 물고기와 같다.
1년 전 이탈리아의 디자이너 포르나세티(Piero Fornasetti) 전에 갔다가 어떤 그림을 봤다. 나는 그 그
림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잿빛으로 물든 손과 새빨간 물고기가 대비를 이룬다. 손은 물고기를 잡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했을 것이고 거칠어져 있다. 마침내 그 손은 물고기를 매우 간단한 방식으로 잡
는 데 성공한다. 손은 어느새 물고기의 비늘과 닮아 있다. 아래는 당시 이 그림을 보고 기록해두었던
감상평이다.
Fish in the Hand. 미끄러워 잡히지 않는 물고기처럼 사태의 본질은 쉽게 잡히지 않는다. 손안의 물
고기는 도달하기 어려운 통찰의 경지를 상징하는 듯하다. 두 손도 아니고 한 손으로. 그것도 전력을
다한 손이 아니라 무심한 듯, 자신 있는 손으로. 피사체의 포스처는 매우 미끄러운 물고기를 매우 간
단히 잡았음을 보여주는데, 이는 화가의 자존심과 자긍심을 보여준다. 때론 오만으로까지 해석될 수
도 있는. 그런. 그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나처럼 해봐! 못하면 말고!”
그 손은 바로 기획자의 손이다. 세계를 기획하는 그는 자신만만하게 한 손으로 미끄러운 물고기를 잡
는다. 하지만 기획자는 물고기를 잡은 데 만족하지 않는다. 이미 그의 시선은 또 다른 물고기를 잡기
위해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가급적 아침 미팅을 잡지 않는다: 일상에서 남들을 최대한 관찰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정보를 흡
수하려면, 일과 중에 내 생각을 하고 내 공부를 할 시간이 줄어든다. 그런 시간은 대부분 남들의 일
과가 끝날 때이다. 그래서 기획자들은 야행성이 많다. 실제로 다른 방해를 받지 않으며 기획을 할 수
있는 시간은 대개 일과 후다. 뭔가 억울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생활인 듯하다.
잠이 충분하지 않으면 그날 하루 일과를 망쳐버린다. 지각을 하더라도 난 잠을 더 자는 편이다. 우리
회사에서는 새벽까지 기획으로 고민을 하다 지각하는 경우는 문제시하지 않는다(하지만 클라이언트와
의 약속에 지각하면 가차 없다).
그날 하루 머리를 잘 굴리려면 아침에 5분, 10분이라도 더 자두는 게 낫다. 아침에 미팅을 잡게 되면
속을 편하게 하고 머리를 원활하게 돌리기 위한 워밍업, 미팅 장소로의 이동, 아침 미팅에 대한 시뮬
레이션 등 사전 확보해야 할 시간이 적잖이 필요하다. 그런 시간 확보 없이 진행했던 아침 미팅은 내
기준에서 대부분 실패였다. 내 머리가 멍했으므로. 게다가 아침에 지각까지 하게 되면 정말로 낭패다.
그래서 난 가급적 내가 먼저 오전 미팅을 잡진 않는다. 하릴없이 오전 미팅을 잡게 되면 전날 저녁 9
시 정도에 잠을 청한다.
감사하고 미안하게도 아내가 육아를 도맡아주고 있지만 퇴근 후에는 아이들과 잠시라도 놀아줘야 한
다. 아이들을 재우고 나면 내 일을 해야 한다. 잠을 일찍 잘 수 없는 형편이다. 아침에 미팅 없이 여
유로운 시간을 확보해야 그날 마음 편하게 업무를 볼 수 있는 것 같다.
기획을 최적화하기 위한 시간대를 명확히 파악하고 생활을 그에 맞춰보자. 대다수의 현대인들이 살아
가는 방식이 반드시 나에게도 맞는 방식은 아니다. 전국에서 아침형 인간을 떠들어댈 때 난 그와 관
련된 내용은 한 자도 읽지 않았다. 관련된 뉴스가 나오면 채널을 돌렸다. 아침 일찍 일어나 사무실에
출근을 해도, 조금 늦게 일어나 출근을 해도 퇴근이 늦는 건 매한가지였던 시절이다. 세상을 온갖 방
식으로 마음에 담아 두어야 하는 기획자로서는 머리를 절대적으로 쉬어줘야 할 시간이 필요하다.
만일 늦게 잠을 잘 수밖에 없는 생활이라면, 가급적 아침에 중요한 일을 약속하지 말자. 가능하다면
늦게 출근하는 방법을 기획해보자. 그것도 안 되면 출근한 후 어떻게든 틈틈이 쉴 수 있는 방법을 생
각해보자. 하지만 대부분의 직장인이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다. 내가 창업을 하기 전 직장생활을 할
때 했던 방법들인데, 잠시 화장실 가서 낮잠을 자든, 당당하게 상사에게 말하고 사우나를 다녀오든,
차라리 병원에서 링거를 맞으며 잠을 청하든, 그래도 마음이 불편하면 반차를 써서라도 쉬었다 오자.
단 그런 부탁은 친한 상사에게 할 것. 그리고 그날은 일을 제쳐 두고 무조건 쉬어 둘 것.